우리는 흔히, 선거제도란 것이 노동운동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도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많이들 하게 되었지만, 양 노총이 정당명부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요즘에 들어서는 또 하나의 숙제를 안게 되었다. "정당명부제가 좋다는 건 알겠는데, 독일식이 어떻고 일본식이 어떻고, 도저히 알아먹기 어렵다." 대개의 노동조합 간부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푸념이다.
국민들은 더 혼란스러워 한다. "1등 한 놈이 한 자리 차지하는 게 화끈한 거 아니냐?" 이런 시각에 대해 하버드대의 한 정치학자는 "공정한 투표나 선거제도가 존재하고, 그를 통해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환상이다. 모든 투표제도는 특정한 이해를 반영할 뿐이다"고 일갈한다.
지난 십 년 동안 정당명부제를 공부하고 주장하며 발견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 세계 어디에도 동일한 투표-선거제도는 없다는 점이다. 지지투표와 마찬가지로 거부투표가 있는 곳도 있고, 이스라엘이나 네덜란드처럼 아예 지역구 후보 없이 정당투표만 하는 곳도 있고, 세 표나 네 표를 행사하는 곳도 있다. 요컨대, 우리가 정당명부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복잡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제도는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제시 잭슨 목사는 미국의 선거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도 꽤 진전돼 있고, 선진국이라 알려진 미국의 선거제도가 공정치 않다니 무슨 소린가?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국민들이 스스로 유권자로 등록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문맹률이 높고 관공서를 싫어하는 흑인들은 유권자로 등록하지 않아 선거권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이에 잭슨 목사는 미국의 선거제도가 흑인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노동운동이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는 투쟁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당명부식 선거제도가 유럽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유럽 역시 진보정당이 창당 초기부터 맹위를 떨치지는 못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 기반한 진보정당들은 노동자가 밀집한 특정 지역 중심의 정치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전국적인 지구당 망을 갖는 보수정당보다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지역구에서 경합할 때는 노동운동가의 정책보다는 보수정치인의 지명도가 위력을 떨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럽에 오래 전부터 도입돼 있던 정당명부제는 선거의 양상을 개인 지명도에서 정당간의 정책 대결로,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를 계급투표로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유럽의 진보정당이 성장하고, 노동자의 이해가 국가정책에 관철되는 데 있어 정당명부식 선거제도가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다소 형식화하면 다음 과정을 그려볼 수 있다.
한국은 소선거구에서 일등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단순다수대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 제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 지는 명약관화하다. 개표 방송 때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세 정당의 상징색으로 도배·분별되는 것은, 단순다수대표제가 일반 유권자의 지역주의 투표와 노동자를 비롯한 개혁적 유권자의 사표방지심리를 강제하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대안정치를 봉쇄하고 부패한 보수정치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현재 뿐 아니라, 총선 전에도 자민련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민주노동당은 단 한 석도 없고, 자민련은 15석이 넘는다. 왜냐하면, 현행 선거제도가 60∼70%의 국민 지지표를 사표화(대개의 국회의원은 30∼40%의 득표로 당선된다)함으로써 진보적인 대안정당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가 없는가, 민주노동당이 얼마만큼의 의석을 가지고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가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이익, 노동운동의 발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지난 8월31일, '올바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실현을 위한 노동.시민사회 단체 연대회의'를 발족하였다. ▷ 진보정치 ]
민주노동당의 정당명부제 방안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선거제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노동당은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주장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독일식은 정당투표(제2투표)에서의 득표율이 의석 수에 정확히 반영되는 제도이고, 일본식은 그렇지 못한 제도이다. 독일식은 어떤 정당이 정당투표에서 얻은 지지율이 50%라면, 지역구 당선자가 몇 명이든 50%만큼의 의석을 보장해준다. 반면 정당득표율을 비례대표에게만 적용하는 일본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현행 선거제도보다도 득표율과 의석수의 왜곡 현상이 더 크게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제도는 일본공산당과 사회당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실을 하였다. 그래서 여당인 민주당이 일본식 정당명부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지역대표 50%와 비례대표 50%로 국회를 구성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현 단계에서 지역대표성과 계급대표성의 적절한 배분이 50 대 50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비례대표제도 자체를 없애자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개헌 사항이므로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비례대표를 줄여 진보정당의 몫을 줄이는 데는 모든 보수정당들이 대동단결할 것 같다.
셋째, 정당명부는 전국 단일로 작성하여야 한다. 인구도 많고 국회의원도 많은 나라, 무엇보다도 연방주의를 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연방별 명부제가 합리적일 지 모르지만, 광역 한 곳에서 비례대표 네댓 명 뽑는 권역별비례대표제는 한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정당명부 투표마저 경상도 전라도로 갈라져,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정당명부제의 취지를 유명무실케 할 뿐이다.
정당명부제를 둘러싼 최근의 동향
얼마 전 헌법재판소는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 모두(비례대표 구성제, 비례대표 배분 하한제, 기탁금제)를 받아 들였다. 한국 정치판에 일대 강진이 몰아친 것이다. 이에 각 정당은 각각의 이해에 따라 찬반을 표하고 있다.
민주당은 일본식 정당명부제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입장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의 진출은 최소 수준에서 막으면서도, 자당의 목적인 동진(東進) 또는 당세 확대를 이루기 위함이다. 재작년과 작년에 민주당이 정당명부제를 주장한 이유는 정당명부제의 원래 취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명부제 도입에 의해 불가피해질 지역구 조정을 미끼로 경상도와 중부권의 현역의원들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민주당이 자민련과 과감히 별거하는 배경에는 정당명부제 도입 과정에서 자당에 적지 않은 합세가 있으리라는 판단도 자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수준의 지지율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자민련이 정당명부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별다르지 않겠지만, 지지율 1위의 한나라당이 정당명부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당명부제가 한나라당의 분당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당명부제는 당세가 미약하더라도 정책이 분명한 신진 정치세력의 진출을 조장한다. 이런 예측은 내년 대선 때문에 별 수 없이 동거하고 있는 한나라당 안의 중간 보스들에게는 독립 의지를 실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유혹이다.
이처럼 복잡한 정치판도대로라면 조만간 정당명부제가 도입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재보궐선거와 내년 지방선거에 관련된 일부 조항만을 급히 손질한 후 2004년 총선 직전까지 뭉개고 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게다가 기성 정치권은 헌법재판소의 판결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개악 입법을 서슴지 않는 전과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정당명부비례 의석을 최소화하여 진보정당의 진출을 막자는 데는 기성 정당 모두가 이해를 같이 할 것이다.
기성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따른 선거법 게리맨더링에 대항하기 위해 양 노총과 시민단체들은 지난 8월 31일, '올바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실현을 위한 노동·시민사회 단체 연대회의'를 발족하였다. 꽤 긴 이름이지만, '정당명부제 연대'의 기자회견문을 통해 정당명부제의 역사적 의의와 핵심 사업 계획을 알아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정치개혁은 사회개혁의 시발점이자 시금석이다. …… 이에 우리 노동·시민사회 단체는 1인2표 정당명부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민의를 올바로 반영하고, 신진 정치세력의 진출을 북돋우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왔으며, 오늘 그 중요성과 절박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우리는 정당명부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는 지가 한국 정치의 개혁,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 지를 판별하는 기준이라 선언한다.
…… 우리 노동·시민사회 단체들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밀실거래를 일삼는 기성 정치권에 정치관계법의 개정을 맡겨두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우리는 정치 선진국에서와 같이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기구가 구성되어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국회는 그에 대한 거부나 입법만을 책임지는 식으로 정치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 국회와 중앙선관위, 제 정당과 사회단체에 '정치개혁국민위원회'의 공동 구성을 제안하며, 우리의 제안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조속한 답변을 기대한다. '정치개혁국민위원회'의 구체적인 모습과 운영 계획은 열린 자세로 의논해 나갈 문제이다.
올바른 정당명부제의 실시 여부는 87년 직선제 쟁취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향후 수 십 년을 좌우할 시금석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