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인권은 공장의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다. 작업장에 있는 동안 노동자의 일거수 일투족뿐 아니라 생각까지 회사의 재산으로 취급되면서 인권이 박탈당하는 현실을 고발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편리를 가져온 현대 과학기술이 작업장 안에서는 철저히 자본의 도구가 되어 최후의 일초까지 노동을 쥐어짜고 노동자들을 탄압해 왔다. 특히 최근의 첨단 기술은 작업장 안에서 노동자를 전천후로 감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그 경향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노동자 감시의 대표적인 모습과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최근 (주)대용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북 익산 2공단에 소재한 (주)대용은 지난 7월 22일 하룻밤 새 작업장에 CCTV를 설치했다. 계속되는 산업재해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던 대용 노동자들은 지난해 8월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활동해 왔고, 회사가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부당해고 및 징계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는 데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특히 지난 7월 25일 작업 중이던 노동자가 700℃에 달하는 알루미늄 주물을 뒤집어쓰고 심한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계속되는 산업재해에도 회사측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채 오히려 디지털녹음기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불법적으로 감시하고 사찰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려 해왔다. 그러던 끝에 노동조합과 어떠한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CCTV를 설치한 것이다. 이에 대용 노동자들은 노동 감시 중단과 CCTV 철거를 주장하며 지난 8월 28일 파업에 돌입했다.
대용뿐 아니라 최근 작업장 내에서 CCTV 이외에 IC CARD, 생체인식 기술, 액티브 뱃지 등 첨단 기술을 이용한 노동자 감시에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노동자 감시는 극도의 노동 탄압이며, 노동자의 인권을 말살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마땅한 사회적 토론과 대응은 부족하다. 이 글에서는 감시 기술의 몇 가지 전형을 간단히 살펴보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2. 감시 기술의 전형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감시의 전형적인 사례는 대부분의 서울시내버스에 CCTV가 설치된 사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난 1996년 10월, 석달 전의 버스요금 인상이 실은 238억원의 운송 수입금을 빼돌려 회사를 적자 상태로 만든 업주들의 '조작극'에 의한 것이었음이 검찰에 적발되었다. 이어 다음해 3월 버스요금이 다시 인상될 조짐을 보이자 버스수익 투명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때 "버스 수익이 불투명한 것은 운전기사들의 삥땅 때문"이라는 업주의 주장이 부각되었고, 이렇게 해서 버스업주들의 비리때문에 시작된 '시내버스 개선종합대책'은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한 CCTV를 거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남겨놓고 마무리되었다. 서울시에서는 업주들에게 거액의 CCTV 설치비를 지원했고, 서울시내버스에 일제히 CCTV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CCTV는 이제 더 이상 버스수익 투명화와는 관계가 없다. 몇 년 사이에 널리 보급된 교통카드가 요금을 '투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입 명분을 다했음에도 CCTV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업주들이 버스 CCTV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CCTV 화면을 모니터링하는 전담 직원을 채용하고, 노동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CCTV를 백배 활용한다. 어떤 버스 회사는 "물증을 잡았다"며 노동조합 활동가들만을 해고했고, 또 다른 회사는 관례대로 커피값을 뽑아간 노동자에게 "200원 삥땅쳤다"는 이유를 들어 퇴사를 종용했다. 때때로 그들은 CCTV의 '공익적 목적'을 강조하기도 한다. 9시 뉴스에서는 버스 CCTV에 잡힌 소매치기 장면을 생생하게 중계하며, 시청자는 소매치기의 행위에 분노하면서 CCTV가 우리에게 주는 기능적 효용에 안도한다.
작업장 감시 문제에서 가장 '전형'적인 양상은 감시 기술 도입에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노골적 표현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뉴사우스웨일즈 프라이버시 위원회는 1995년 9월 발표한 보고서 [보이지 않는 눈 : 작업장 비디오 감시에 대한 보고서]에서 사용자측의 9가지 전형적인 '도입명분'을 제시하였다. ① 절도 방지, ② 적대적인 기물파손·방화·파괴 방지, ③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작업 모니터링, ④ 고객 서비스 향상, ⑤ 고용인 교육, ⑥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⑦ 법적 의무 준수, ⑧ (법적 분쟁 발생시) 사용자 면책, ⑨ (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과정 모니터링이 그것이다.
또 다른 전형은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의 정치성이다. 기술은 작업장에 일단 도입된 이후에는 도입명분과는 다르게 생산성이나 효율성의 측면보다 노동과정 통제기능을 주요하게 수행한다. 즉 사용자가 발휘하는 '정치성'이 기술에 투입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노블은 공작 기계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 끝에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이 정치적 논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자동화에는 녹음재생(record-playback) 방식과 수치제어(numerical control) 방식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는데 녹음재생 기술이 객관적인 생산성에서 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수치제어 시스템을 선호하였다. 이는 "녹음재생 시스템에서는 급송, 속도, 작업량, 산출고에 대한 통제권이 기계공에게 주어져 있는 반면, 수치제어 시스템에서는 통제권이 경영진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은 늘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기술 자체가 발명되고, 선택되고, 도입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합리적인 과정이기보다는 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생산 주체로서, 또 감시받는 당사자로서, 이 정치적 과정에 당연히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 대용CCTV 철거대책위 ]
3. 작업장 기술의 정치성
첨단기술의 정치성은 첨단기술이 공장이 세워진 이후 계속되어 온 노동통제 기술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필연적인 현상이다.
노동력 자체가 주요한 생산력의 하나지만, 인간의 능력은 기계의 능력에 비해 매우 잠재적이며 제한적이다. 따라서 한정된 시간 안에 잠재적인 노동력에서 최대한의 생산력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자측은 노동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감시와 통제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작업장은 보다 완벽한 통제를 원하는 사용자와 노동자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 왔다.
노동자들을 한 지붕 아래 모으고, 노동시간을 정착시키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통제가 비교적 인격적이며, 육체적 '처벌'로 이루어져 왔다면, 19세기말과 20세기, 즉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제적 통제가 오늘날 기업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발전된 회계 기법과 위계적이며 정기적인 보고서, 그리고 '과학적 관리'를 특징으로 하는 관료제는 전문적 관리자층을 등장시켰고, 노동과정에 대해 보다 전면적이며 직접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자유롭게 맺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 계약이 통제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관료적 감시는 그 정당성을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관료제가 확장되면서 생산기구가 점점 거대하고 복잡해져감에 따라, 조직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비용이 증가할 뿐더러 통제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테일러주의적 생산 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감과 저항은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계속 불러일으켰고 축적의 위기에 봉착한 자본측을 당황하게 했다.
테일러주의의 과잉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는 '유기적' 조직과 스스로 '책임자율성'을 갖는 조직원에 의한 통제 방식이 등장했다. '유기적' 조직은 공식성이 낮고 수평적인 정보흐름이 많으며, 위계상의 지위보다는 전문성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에서 '기계적' 관료제와 많이 대비된다. 그러나 이 '유연화'된 통제는 통제의 본질적인 면에서 변화한 점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통제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강화된 것이다. 노동자 개개인의 '자유 재량'을 늘인 듯이 보이는 '책임자율'적 통제 방식은 오히려 소위 '동료에 의한 감시'를 조장하면서, 보다 엄격하게 생산력 할당을 통제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 비해 시간·장소가 극도로 유연화된 조직 구조에서 성과급 등의 심리적·이데올로기적 경쟁 기제를 끊임없이 제시하면서 과거에는 동료였던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킨다는 점에서 '책임자율'적 통제는 가장 비인간적이며 전면적인 통제라 할 만하다. 이 통제 방식의 또다른 비인간적 면모는 그 기계적 특성에서 드러난다. 인격적 통제가 줄어든 부분을 '첨단 기술에 의한 통제'가 메꾸게 된 것이다. 관리자와의 인격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대신 정밀한 기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첨단기술에 의한 작업장 감시 논란이 불거진다.
이 감시 기술은 노동 과정만을 통제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있다는 데서 그 본질적인 정치성을 드러낸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실제로 미국의 작업장에 도입된 CCTV가 노동조합 조직화에 위협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미국의 모기업에서 노조 조직화가 시도되자, 사용자는 공장내부에 비디오 감시장비를 설치하고 그것의 초점을 모든 개인의 작업장소와 작업자에게 맞춰놓았다. 모니터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오직 관리자만이 사무실에서 볼 수 있었다. 사용자는 모니터링이 안전을 목적으로 하며, 작업과정의 위험요소 및 잠재적 위험가능요소를 파악해 냄으로써 노동자의 보상보험요율을 낮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 조직화의 열기가 높아지는 동안, 작업공간을 떠나서 휴게실로 간 두 명의 노동자에게 허락없이 작업공간을 떠나지 말라는 주의처분이 내려졌다. 이는 곧 노조조직화를 위한 활동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판매부서에 있는 노동자 100명 중 89명이 조합의 대표권을 인정하기 위한 선거에 동의하는 위임장에는 서명을 했으나 실제 투표결과는 대표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의결정족수에 12표가 모자라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회사측이 비디오 촬영을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4. 노동자의 프라이버시는 기본적인 인권이다
작업장 감시 기술의 문제는 쉽게 사회에서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는 첫째,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위협 요소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작업장에서 감시 기술에 대해 기층 노동자들이 느끼는 위협이 노동조합 간부들의 판단과 달라 논란이 크게 불거지곤 한다. 둘째, '시스템'을 큰 특징으로 하는 현대 기술에서는 '감시기술'을 포착하더라도 분리해 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은 언제나 기계가 도입된 이후에야 그 기능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사후적으로 대응을 하다 보니, 기계 자체의 철수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감시가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점은 푸코가 '전자 판옵티콘'에 대한 유명한 통찰에서 보여준 바 있다. 판옵티콘 혹은 일망감시는 감시받는 대상에게 불을 환하게 쪼여 투명하게 만들고, 감시하는 자의 위치는 조명의 뒤편에 두어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점점 더 투명해지는 개인,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권력'으로 요약되기도 하는 이런 감시 모형도는 소위 정보화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며, 가장 큰 문제는 감시를 받고 있는 대상이 감시의 시선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규율 권력을 내면화하게 되는 데 있다. 즉, 실제로 감시당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저기 달려 있는, 혹은 숨겨져 있는 CCTV로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음을 언제나 의식하고 행동을 조절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 자율성'의 요체이자 최근 많은 기업주가 감시 기술을 열렬하게 도입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또, 프라이버시권의 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 시내버스 CCTV가 도입될 당시 많은 노동조합은 '양심 보너스'를 받는 조건으로 사측과 CCTV 도입을 합의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감시의 문제가 양심의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라이버시권의 핵심은 '내가 감출 것이 없어도' 나의 정보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출 것이 없으면 감시당해도 괜찮다는 것은 비약이며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이 감출 것이 있어서 엽서가 아닌 편지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명분으로 감시 기술이 도입되든지 간에 감시를 당하게 되는 '당사자'들이 이 기술의 도입에 대해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투명할 것을 주장하는 경영진일수록 오히려 불투명한 태도로 특정 기술의 기능에 대하여 은폐하곤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경영진이 노동 과정에서 틀림없는 우위를 점하게 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핵심은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도입될 기술의 모든 위험성을 공개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즉 기술 통제권의 확보야말로 작업장 프라이버시권의 핵심이며,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동 통제의 권리를 돌려주는 정당한 과정이다.
5. 나가며
우리 사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감시와 통제가 강력하게 사회구조화 되어 있다. 30년이상 지속된 주민등록제도에 의해 온 국민이 수백가지의 개인정보를 국가에 등록해야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이 개인정보가 어디로 어떻게 유출되는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주민등록 정보가 유출되어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에 익숙해져 있다. 비단 국가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영역 곳곳에서 범죄를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감시 기술이 설치되고 있고, 개인정보가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라이버시권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은 개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감시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노동권의 일환으로서 프라이버시권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른 나라처럼 프라이버시보호를 위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의 제정을 위한 꾸준한 운동이 필요할 뿐더러, 당장은 단체협상을 통해 작업장 내에서의 노동자 감시를 제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비인간적 노동 통제의 악순환을 끊는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대응은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에 대해 노동자들이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