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은 한국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30년 가까이 계속되던 군부독재체제가 종식되고,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민주화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5년.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 더 좋은 사회로 바뀌었을까? 이 책은 ‘아니다’고 말한다. 오히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는 게 필자의 입장이다. “지난 15년 간의 한국 민주주의 실험은 실패했으며 뭔가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문제는 변화에 저항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민주 세력이 보여준 무능력이다.” 왜 필자는 “한국 사회가 점차 나쁜 방향으로 급격히 퇴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노동 없는 민주주의
가장 큰 이유는 노동자와 서민을 정치적으로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보수 독점의 정치 구조가 민주화 이후에 변화되기보다 오히려 강화되었고, 선거란 누가 덜 부패했나를 다투는 경쟁이었으며, 그런 와중에 계급간 불평등구조가 심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국가는 기존의 규제 장치를 점차 없애버렸고, ‘기득구조’와 ‘특권체제’가 군부가 후퇴한 자리를 장악했다. 그 결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의 권력이 수구특권층에게 집중·독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에 기반한 획일주의는 ‘이념과 가치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억눌렀으며, 여기에 ‘증오와 배제의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인 냉전반공주의가 결합되면서 민주적 가치와 제도가 위협받고 있다는 게 필자의 분석이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엔진
한국 사람들은 정치 갈등도, 경제 갈등도, 사회 갈등도 없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더군다나 사회경제적 관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축으로 나눠져 있는 근대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필자는 “정의는 갈등”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사회가 서로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건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 발전하려면 사회가 갖고 있는 균열과 갈등을 반영하는 정치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갈등을 통해 갈등을 완화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기 때문이다. 즉,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인 것이다”.
부분적 인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필자의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우선 국가가 자신의 민주적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왜냐면 “시장 경쟁에서의 열패자, 불평등한 소득 분배구조에서의 약자, 그 밖의 다양한 소외 그룹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조직은 국가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회선거에서의 비례대표제와 대통령선거에서의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승리자를 지지하지 않는 표를 사표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는 양당 체제의 보수독점구조를 강화시키는 한편으로, 진보세력을 위시한 제3세력의 출현을 어렵게 만든다.
여기서 필자의 비판은 날카롭다. “양당 구조는 일종의 반민주적 범죄와 같으며 … 서민 대중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한, 한국의 정당체제 역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제안 가운데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총제적 인간’보다는 ‘부분적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그는 ‘부분적 인간’을 “개인의 자율성과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으로 설명한다.
위기에 빠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원인과 대안을 찾아보자. (최장집 짓고 후마니타스 냄.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