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이 다시 비틀거리고 있다. 숨돌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재정통합 문제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건강보험은 둘도 없이 중요한 사회보장제도이므로 '정치'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건 정치도 타협도 아니다. '정략'이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 12월 26일 민주노총 등 29개 시민사회단체가 한나라당사 앞에서 건강보험 재정분리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출처; 매일노동뉴스 ]
정략으로 망가지는 건강보험
여야간에 피장파장이지만 첫 번 잘못은 야당 몫이다. 당초 예정된 재정통합 시행일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덜컥 상임위만 통과시켜 놓고 본회의는 다음 해로 미뤄 혼란을 자초했다.
이제 여야가 재정통합을 미루기로 하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통합 유예로 돌파구를 삼아봐야 해결은 고사하고 문제를 키울 뿐이다. 조직이 통합되었으면, 재정도 통합되는 것이 당연지사, 재정만 계속 분리하고 있으면 다음은 통합된 조직까지 다시 분리하자는 소리가 나올게 뻔하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통합과 분리의 장단점을 구구하게 다시 설명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국정운영의 치졸한 절차와 염치를 모르는 정략은 불쾌하다. 무엇보다 크게 비판받아야 할 것은 결정의 졸속성이다. 십여 년을 토론해 왔고, 사회 합의로 건강보험을 통합한 것이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다고 수레바퀴를 되돌리는가.
사회적 합의를 거친 사안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은 자명하다. 야당도 당론과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책인 만큼, 이를 되돌릴 때에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마땅하다. 또 그동안 논의되었던 여러 제도의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나온 대안은 비판받던 옛날 것이요, 새 제도는 출발도 하기 전이다.
직장가입자가 불리하다?
부작용이 예측되기 때문이라고 하나,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유리알' 지갑인 직장가입자가 지역가입자에 비해 보험료를 더 부담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주장 아닌가. 필자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사정이 또 다르다. 현재 직장의 적자 폭이 더 크므로, 재정을 분리하면 최소 5∼6년 간은 직장가입자의 부담이 당초 예상보다 더 커지게 된다. 당분간은 직장근로자가 더 불리한 것이다.
자영자는 소득파악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특히 수긍할 수 없다. "봉급생활자는 봉"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악선전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을 가로막는 비겁하고 정략적인 구호이다. 흔히 자영자 소득파악률이 30%에 불과하다고 하나, 이 말은 70%의 지역가입자에게는 아무렇게나 주먹구구로 보험료를 매긴다는 뜻이 아니다. 지역가입자에게 직장가입자의 30% 수준의 보험료만 부담하게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직장가입자의 소득 파악이 상대적으로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역가입자에게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부담능력'을 평가하여 보험료를 매긴다. 직장가입자에게는 소득에만 보험료를 물리지만, 지역가입자의 경우에는 소득 파악이 미진하다고 판단되면 직장가입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재산, 전월세, 심지어는 배기량과 연식까지 따져 자동차에도 보험료를 매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가장 정교한 방법으로 소득을 파악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일부 눈에 띄는 극단적인 음성소득자나 세금탈루자만 보고 직장가입자만 불리하다고 지레 판단할 일이 아니다.
부담 능력에 따라 보험료 부담해야
어떤 제도가 미래지향적인가 하는 점에서도 건강보험을 지역과 직장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현재도 해마다 연인원 900여만 명이 직장과 지역 사이를 옮겨다니고, 한 사람이 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6년에 지나지 않으며, 재가근무나 1인 창업 등 새로운 근로형태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현재 지역가입자 가운데 상당수는 소규모 직장이나 영세사업장의 근로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사실상 직장가입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머지 않아 농민이나 도시의 소상인(1인 사업장) 등 일부를 제외하면 직장과 지역가입자의 경계를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노인인구의 급증도 또 다른 고려요소이다. 2010년이 되면 노인의료비가 전체의 30%를 차지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측이다. 직장에서 퇴직하여 지역으로 편입된 노인에 대해서는 직장보험에서 지원하는 형식의 공동기금을 만들면 된다지만, 전체 재정의 30%를 공동으로 운영할 바에야 재정을 분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문제를 최소화하는 길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이라도 재정통합을 예정대로 시행하는 것이 부작용을 줄이는 첩경이다. 통합을 미루는 것은 사실 더 나쁜 선택이다. 몇 해 사이에 결정적으로 달라질 게 없는데, 소모적인 논쟁의 기간만 한껏 늘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단점은 고스란히 안은 채, 통합과 분리의 장점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재정통합 예정대로 시행해야
건강보험의 통합과 분리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제도의 본래 취지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부담 능력에 맞는 보험료 부담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부담 능력'을 기계적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험료 체계를 개발할 수 없다. 직장근로자만 하더라도 같은 임금을 받아도 실제적인 부담능력은 주택소유여부, 부양가족의 수, 지출 구조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렇다고 연말정산 식으로 보험료 계산을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분담,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회보장의 큰 흐름에 흔쾌하게 동참하는 것이 옳다. 현재의 보험료 부담체계는 여러 조합을 따로 운영하여야 할 정도로 형평성의 훼손이 심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통합이 옳다. 그것이 사회보장의 원래 정신에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약육강식의 '야만적 사회'로 후퇴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