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만이 남은 세상
아일랜드 분도랜 근처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주인공 소년 프랜시는 알코올중독 아버지와 ‘정비소(정신병원)’를 들락날락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세상은 모두 허위로 가득 차있다. 트럼펫을 불며 ‘아무개 자식만을 따라 갔으면 멋진 음악의 인생이 펼쳐졌을 텐데’하며 돈은 벌어오지 않고 연신 술만 퍼대는 아버지, 삼촌이 온다고 하루종일 내내 빵만 구워대는 어머니.
장난꾸러기 프랜시의 유일한 벗은 그 또래의 ‘조’. 둘은 피로 맺은 의형제이다. 존웨인을 흉내내며 현실을 벗어나 멋질 세상을 동경하고, 조와 함께 자신들만의 은신처에서 행복을 누리지만 그도 잠시. 마을에 새로 이사온 누젠트 가족이 조로 하여금 그나마 행복했던 세상을 온통 위선과 배신, 폭력이 진실임을 깨우쳐 준다.
가장 진실스러워 보였던 사제의 길을 선택하지만, 프랜시가 본 성모마리아를 설명해달라며 신부는 자위를 하고, 의형제 조가 자신을 배신하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름다웠던 신혼여행은 아버지의 술과 어머니의 울음이 전부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프랜시는 결정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이사온 누젠트 가족(상당히 60년대 미국 영화속에서 본 의상과 인물들)의 아줌마가 가져 온 저주라는 걸, 이제 복수만이 존재한다. 누가 그에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속삭인다면 그는 돼지를 죽이는 연장으로 그/그녀를 사지절단해 뒤뜰 썩은 양배추속에 집어넣고 말리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성년이 되어 정신병원을 다시 나오는 프랜시에게 의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선의 세상으로! 두려움에 움찔거리는 프랜시에게 다시 찾아온 성모마리아. 그는 성모에게 묻는다. “성모님, 아직 이 세상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게 남아있나요?” 성모가 전해주는 작은 들꽃하나. 이제 그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을 미치게 한 사회
닐 조던의 푸줏간 소년은 한때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던 패트릭 매케이브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60년대 초 아일랜드가 배경인 푸줏간 소년은 열두살의 소년 프랜시가 광기어린 폭력에 빠져드는 모습을 따라간다. 사람은 가끔 현실의 고통 때문에 스스로를 가눌 수 없게 되면 자신이 만든 허구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고 상상과 허구가 어느 덧 현실의 자리를 꿰찬다. 주인공 프랜시의 경우가 아마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프랜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을 버림받게 만든 원인을 한 가족에게 돌리고 살인까지 하는 광기에 갇힌다. 감독은 ‘이 영화는 한 사회, 문화가 한 사람의 정신상태를 통제불능으로 만드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영화 내내 나오는 핵폭발 관련 대사들과 빨갱이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증오는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빗대고 있다. 영화에서는 프랜시가 살인을 하는 모티프로써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된 프랜시는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죽은 아버지의 몸에 파리떼들이 날아다녀도 그 파리들을 쫓으며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과 살인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고 친절하게도 푸줏간 주인 아저씨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프랜시의 모습을 보노라면 프랜시는 자신의 행위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차라리 공포보다는 애처로움이 들 뿐이다.
대중문화의 모순
미국의 영화잡지 씨네아스트에서 마틴 맥루운은, 닐 조던의 푸줏간 소년을 아일랜드의 현대화 효과에 대한 복잡한 고찰이라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 영화는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시련에 처했던 그 당시의 아일랜드에서 어떻게 전통과 모더니티가 충돌했으며 미국 문화의 충격을 어떻게 흡수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과거 역사가 아니라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닮아 있으며 현재 속에서 해석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푸줏간 소년에는 성장 영화의 특유의 향수를 느끼게 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프랜시의 정신상태는 그가 태어난 폐쇄적인 가톨릭 사회와 가난, 광신, 무지, 공허한 민족주의적 수사에 길들여진 문화 산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랜시의 정신착란은 현대화 과정의 과잉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티와 전통문화의 잘못된 만남은 프랜시가 왕성하게 섭취하는 미국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언어에서 잘 드러난다. 주변 세상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변할수록 외국의 대중문화는 프랜시의 의식을 파고 든다. 자신의 뿌리와 소속을 부정하면서, 곧 절망적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프랜시는 환각에 가까운 환상에 빠져 우상파괴적인 마음상태에 떠밀려 들어가 나름대로 내적인 논리를 채우고 끔찍한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다. 푸줏간 소년은 관객을 놀라게 하고 충격을 주고 혼란스럽게 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아일랜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심원하고 풍부한 화술의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