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 때 상무부 차관을 지낸 제프리 가튼 예일대 경영대학장은 최근 9·11테러 이후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이 '신경제'에서 '포위경제'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폐쇄적인 경제체제"인 포위경제의 핵심은 미국 대외경제정책의 '정치화'와 외교정책의 '재군사화'를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필자는 포위경제라는 신조어가 신경제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현재의 실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매우 부정확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9·11테러 이후 미국 경제의 '준 전시자본주의화' 속에 지난 20년 동안 다그쳐져 온 자본의 세계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근거는 이렇다.
먼저 클린턴 정권과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 발언을 통해 '상대방 배려주의', '유연한 상호주의'로 통하는 햇볕정책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클린턴 정권의 외교정책이 부시 정권보다 더 나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1994년 북한 금창리 핵사찰을 둘러싸고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던 장본인은 다름아닌 클린턴 정권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9년 4월 유고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벌인 당사자도 역시 클린턴 정권이었고, 이라크에 대한 거듭된 공격은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 클린턴 정권의 대북 정책은 일종의 예외였고, 일부 외교분석가들은 '유일한 성공사례'로 꼽기도 한다.
물론 부시 정권의 '악의 축' 규정은 그나마 유일한 성과였던 클린턴 정권의 대북 정책마저 무위로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후퇴'이자, 이에 대한 우리 민중의 반대는 한없이 정당하다.
환상으로 끝난 신경제
지난해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신 다자간협정)로 불리는 '도하 개발 의제'가 9·11테러 이후 개최됐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9·11테러는 폐쇄경제 체제는커녕 개발도상국에 지적재산권의 일부와 미국의 반덤핑 제소 남용 등과 관련해 양보를 제공하더라도 농업 및 서비스의 자유화, 금융 자유화 등을 다그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더욱이 포위경제가 '신경제'라는 환상을 전제로 한 것인 이상 그 한계는 명확하다.
신경제는 이른바 '저물가-저실업-고생산성'을 현상으로 하며, '경기순환은 없다'는 것을 본질적인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신경제는 실물이 아니라, 주가 상승에 바탕한 금융 축적이 낳은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미국 경제의 금융 축적은 닷컴 기업들의 투자 급증, 가계의 소비 급증 및 이에 따른 저축 감소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로버트 고든 교수가 간파했듯이, 1990년대 생산성 증가는 그 대부분이 내구재, 특히 컴퓨터와 관련 부품의 제조에서 나온 것이었을 뿐, 경제의 나머지 부문에서는 생산성 증가는 사실상 없었다. 예컨대 1990년대 생산성 향상은 386컴퓨터가 486으로, 그리고 펜티엄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 차지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1990년대 미국 경제가 기록한 평균 성장률 3.1%는 1980년대보다 조금 높을 뿐, 1950년대와 1960년대의 4%를 훨씬 밑도는 것은 물론, 1970년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경제를 풀이하는 좌파적 분석의 배경에는 197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불황과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이 깔려 있다. 실제로 미국 경제학자 프레드 모슬리에 따르면, 미국 자본주의의 이윤율은 1940년대 후반 22%에서 1970년대 중반 12%로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지난 20년 동안에 걸친 미국 경제의 급격한 재편에도 이윤율은 1990년대 중반 16%로 상승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런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융적 축적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좌파 경제학자 해리 셧은 자신의 책 『자본주의의 문제』에서 금융자산의 가격이 상승하여 얻게 되는 자본이득이 점점 중요한 수익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1979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과 영국의 자본투자 수익에서 자본이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75%에 이른다. 반면 1900년부터 1979년까지 이 비중은 50% 미만이었다. 이에 비춰 금융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유동성이 공급되지 않는 한, 그리고 이를 통해 금융자산의 가격이 계속 상승하지 않는 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신경제의 핵심이자, 월스트리트의 논리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언급보다 지난해 12월2일 미국 제7위 기업 엔론의 파산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엔론 파문은 신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엔론의 파산을 계기로 투자자들이 기업 회계정보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엔론과 유사한 사기 행각을 벌여온 상당수 기업들의 파산이 촉진되고 있다. 지난 1월 텔레콤 업체인 글로벌 크로싱의 파산도 그런 예이다. '퀘스트 커뮤니케이션'도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고, IBM 역시 합법적인 회계 조작을 통해 수익을 부풀렸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엔론과 신경제
엔론은 단지 미국 제7위의 기업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신경제에서 '시장의 선도자'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엔론의 흥망은 곧 신경제의 흥망이기도 하다. 미국 「뉴욕타임스」 1월15일치 칼럼에서 프린스턴 대학 폴 크루그먼 교수는 엔론 사태는 "미국판 정실 자본주의"라고 규정했고, 18일치 칼럼에서는 "엔론 붕괴는 실패한 한 기업의 이야기만 아니라, 실패한 시스템의 이야기다. 이 시스템은 부주의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부패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엔론을 규제했어야 할 시스템이 부패했다는 것이다.
한계는 있지만, 그의 지적은 옳다. 4년 전 동아시아 경제위기 때 아시아의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비난했던 이들에게 크루그먼의 비판은 타당하다. 엔론 사태는 정실이라는 것이 동아시아 자본주의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에도, 유럽식 자본주의에도 두루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런 점에서 엔론 회장이던 케네스 레이와 한보그룹 회장이던 정태수씨, 대우그룹 회장이던 김우중씨와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공화당 부시를 위한 대통령 만들기, 에너지 정책 탈규제 로비 및 이를 통한 폭리 취득, 기후환경협약인 교토의정서 거부 로비, 천문학적 회계 조작 등 엔론 경영진의 행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우리나라의 재벌총수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주식시장에서 엔론의 성공은 체계적인 정보의 왜곡을 통해 이뤄졌다. 증권회사와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분석가)들은 엔론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엔론 주식을 "사라"고 권고했다. 이미 드러난 대로 엔론은 3500개의 자회사를 설립했다. 이 가운데 약 900개가 케이먼군도 등 돈 세탁과 금융 은폐의 중심지인 역외 조세천국에 세워졌다. 목적은 부채를 대차대조표에서 숨기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엔론은 엄청난 수익을 내는 것으로 포장됐다. 엔론의 신용등급은 최고로 유지됐고, 차입비용은 매우 쌌다. 주주들과는 달리, 경영진, 엔론에 대출해 준 은행 등 선택된 투자자를 포함한 엔론의 내부 거래자들은 이들 자회사가 매출과 수익을 부풀리고 부채를 감추는 데 이용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엔론의 회계감사기관인 아서앤더슨은 이를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보수를 받으며 사기극을 연출하는 데 조연으로 참가했다. 영화 '스팅'에서 마피아를 속여 한탕 챙기기 위해 차린 가짜 경마중계소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처럼, 엔론의 법률가와 회계감사, 은행가들은 주주와 노동자를 속이는 과정에 동참했다. 심지어 아서앤더슨은 엔론의 핵심 경영자료를 파기하기까지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북풍 관련 자료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파기한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양심적으로 꼽히던 엔론 부회장 J. 클리포드 백스터는 지난 1월25일 자신의 차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회계절차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가 의회의 제동에 걸려 결국 좌절했던 전 미국증권거래위원장인 아서 레빗은 이렇게 토로한다. "(거짓말하고 기만하고 속이는) 게임맨의 문화가 90년대 신경제의 열풍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신경제=거대한 금융사기
이런 '게임맨의 문화' 속에 작은 가스라인 운영업체이던 엔론은 10년 만에 사실상 규제받지 않는 거대한 금융기관으로 커졌다. 엔론의 연간 총수입 1천억 달러였다.
그 2/3는 전력과 천연가스에 대한 온라인 거래에서 창출됐다. 에너지를 개발 생산해 공급하는 데서 창출된 매출액은 전체의 1/3 미만이었다. 에너지 거래는 미래 가격을 대상으로 위험을 회피하거나 투기하는 데 이용되는 파생상품 형태로 이뤄졌다. 엔론의 선물 및 헷지 거래는 기존의 주식이나 채권, 외환과 같은 신용상품에 대한 금융자본주의적 접근 방식을 그대로 전기 등 에너지와 각종 상품에 적용한 것이었다. 앞서 말한 3500여 개의 자회사는 매출을 부풀리고 부채를 줄이는 데 회계 조작을 위해 이용됐다. 엔론에 필요했던 것은 규제받지 않은 시장이었다. 공화당 필 그램 상원의원(텍사스)은 에너지 거래를 탈규제하는 법안을 추진해 통과시켰다. 이는 투기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활짝 열어놓았다. 엔론은 1999∼2000년 선거기간 중 240만 달러를 정치자금으로 기부했고, 그 72%가 공화당으로 향했다.
파생상품을 통한 엔론의 에너지 거래는 캘리포니아 전기요금을 대폭 올려놓았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주와 오리건주 경계지역의 전기요금은 단지 엔론이 파산했다는 이유만으로 30% 떨어졌다. 엔론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높은 가격을 설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계 사기극은 비단 엔론이나 아서앤더스만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신경제가 추앙받던 2000년까지 6년 동안 이윤을 부풀린 기업들에 대해 783건의 부실한 회계감사가 이뤄졌고, 이 결과로 투자자와 종업원들은 2000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부실한 회계감사 건수는 두 배나 증가했다.
엔론의 성장 과정은 민주당과 공화당 등 정치권과 끈끈한 유착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한국의 벤처기업들이 정·관계에 대한 로비와 커넥션을 통해 성장하다 몰락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부시 정권은 엔론이 로비에 나섰던 17가지 에너지 정책을 폈다. 엔론 케네스 레이 회장은 에너지 관련 태스크포스를 이끌고 있던 부통령인 딕 체니를 여섯 번이나 방문했다. 사실상 부시 정권의 에너지 정책은 케네스 레이 회장의 컴퓨터 단말기에서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부시 정권이 도입한 에너지 정책에는 에너지 분야에 파생상품을 도입하고 규제를 없애는 것이 포함돼 있다. 에너지 거래기업이 모든 전력 배송망을 확보할 수 있게 한 방안도 엔론의 작품이다. 이는 결국 에너지 가격 조작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주에 걸친 에너지 지주회사가 핵심 발전사업과 관련이 없는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제한하던 공공발전설비지주회사법(PUHCA)이 폐지된 것도 엔론의 로비 때문이었다. 체니는 자신이 이끌던 에너지 정책침의 문서를 공개하지 않으려다 연방법원의 공개 명령을 받았다.
엔론과 펜타곤과의 관계도 끈끈하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지난해 6월 엔론의 자회사 '엔론에너지서비스'의 부회장이던 존 화이트를 육군 참모총장에 앉혔다. 펜타곤에 기업 마인드를 도입해 조직을 슬림화하고 군살을 뺀다는 명분이었다. 화이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옮기기 직전 2500만 달러 어치의 엔론 주식을 팔아치웠다. 화이트는 군기지 발전서비스를 사기업에 판매했다. 그러나 펜타곤은 군살을 빼기는커녕 급증하는 국방예산에서 보듯 피둥피둥 살이 더욱 찌고 있다. 특히 2003 회계연도(2002년 10월∼2003년 9월) 국방예산 가운데 무기 구입비 680억 달러 가운데 1/3 이상이 테러와의 전쟁과는 관련이 없는 냉전시대 무기에 할당됐다. 이 무기들은 2000년 선거기간 중 부시가 줄이거나 없애기로 한 대상들이었다.
회사는 망해도 살아남는 경영진
엔론은 망했지만, 경영진들은 엄청난 부를 챙겼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2년 동안 엔론 경영진은 주식과 스톡옵션을 팔아 10억 달러를 챙겼다. 회사가 망하기 직전인 지난해 11월에도 이 회사의 고위 간부 600여명은 1억 달러의 보너스를 챙기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합법적인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업무상 배임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다. 반면 노동자들은 4500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엔론 경영진이 종업원 보유 주식의 판매를 금지함으로써 노후에 대비해 저축해 왔던 돈들까지 깡그리 날렸다. 종업원을 포함해 주주들이 투자한 600억 달러의 자본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무책임한 경영진은 엔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의 핵심 요건 가운데 하나인 '경영자 시장'은 작동되지 않았다. 기업이 파산하기 전 최고경영진은 다른 자리로 옮기고 건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패한 경영진은 결코 죽지 않았다. 1992년 파산한 기업 '메이시'의 회장이던 에드워드 S. 핑켈스타인은 1997년 여성의류업체 '체리앤드웹'의 회장이 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3년 뒤 파산했다. 지난해 7월 파산한 온라인 식품판매업체인 '웹밴'의 최고경영진이던 조지 샤힌은 12억 달러의 자본 손실을 입힌 뒤 파산 직전 그만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소프트웨어업체 '클로즈드룹 솔루션'의 이사가 됐고, 사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지벨 시스템'의 이사라는 직함도 얻었다.
흔히들 신경제를 '정보경제'라고 불렀다. 경제분석가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면 생산성이 증가하고 성장이 지속된다고 입을 모았다. 겉으로 보기에 정보경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정보의 투명한 공개에 의존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보경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逆)정보경제'였다. 역정보경제는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정보를 숨기고 왜곡하고 거짓말하는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경제다.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시장이 투자자, 소비자, 시민의 합리적 결정을 유도하기 위해선, 완전하고 정확한,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규제를 풀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와 이에 바탕해 성장한 신경제는 그와 정반대되는 역정보경제를 낳은 것이다. 에너지 시장에 대한 탈규제, 1999년 은행의 증권 업무 취급을 금지해 온 글래스스티걸법 폐지 등 경제의 증권화와 금융화는 역정보경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미국 경제의 미래
엔론이 파산하자, 폴 오닐 미국 재무장관은 "엔론과 같은 기업이 망한 것은 시장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엔론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천재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을 호도한 것이다. 엔론과 같은 기업이 커온 것이야말로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역정보경제의 산물임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기초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다. 이 정보가 왜곡되면 시장, 특히 금융시장의 고유한 불안정성은 더욱 커진다.
이런 오닐의 발언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지키려는 발버둥에 가깝다. 엔론이 상징하는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의 총체적 결함을 은폐하려는 시도다. 실제로 부시 정권은 엔론을 구제하지 않은 게 아니다. 금융 자유화와 세계화를 다그쳐 온 클린턴 정권이 뒤늦게 깨닫고 도입하려고 했던 것, 엔론 붕괴 이후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것을 구제하지 않았다. 그것은 역외 조세천국을 규제하는 방안이다. 부시 정권은 이 계획을 허공에 날려보냈다.
이는 미국 경제의 미래를 여전히 '역정보경제'에 의존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와 함께 부시 정권은 9·11테러 이후 '경제의 군사화'와 '군사적 케인스주의'를 불황 탈출의 돌파구로 삼고 있다. 부시 정권은 2003 회계연도(2002년 10월∼2003년 9월) 적자예산안을 짰다. 적자 규모는 800억 달러 정도다. 전년 회계연도에 비해 국방비를 20년 만에 최대폭인 480억 달러 늘린 3790억 달러로 편성한 게 주요 요인이다. 이중 100억 달러는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 이란, 이라크에 대한 '방위'(?)나 '확전' 차원으로 잡혀져 있다. 사회간접자본, 직업훈련, 환경 등 '사회적 지출'이 대폭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미국 공화당은 경기가 좋든 안 좋든 균형예산은 사회적 지출을 줄여서라도 예산은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교조에 따라 1997년 균형예산법을 제정해 통과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공화당이 '적자' 예산을 짠 것이다. 공화당의 '적자예산'은 일시적인 게 아니다. 이는 현 단계 미국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뜻한다. 공화당은 미국 경제의 활로를 전시 자본주의 체제로 몰아가는 데서 찾고 있다는 얘기다.
군사적 케인스주의
현재 미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은 '강한 달러'와 '가계의 꾸준한 소비지출'이다. 2000년 4분기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의 불황이 이전 불황과 두드러지게 다른 특징은 가계의 소비지출이 급속히 감소하지 않고 꾸준히 유지됐다는 것이다. 2001년 3분기 미국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99.8%로 전분기 100.8%에 비해 1%포인트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이는 설사 미국 경제가 회복된다고 해도 가계의 소비지출이 늘어날 여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강한 달러'는 거대한 무역적자와 차입에 바탕한 가계 소비를 유지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반테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비 조달을 위해서라도 '강한 달러'는 필수적이다.
현재 미국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지 않고 있다. 당연하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소비 지출이 늘어나 구매자가 늘어나지 않는 한 투자를 감행하지 않는다. 부시 정권은 그 공백을 군사지출 증가를 통해 메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시 정권의 적자예산은 '악의 축' 발언으로 상징되는 끊임없는 긴장 조성을 통해 그 유효수요를 창출하겠다는 선언에 해당한다.
지난 2월 초 미국 국민계정 잠정수치들이 발표됐을 때, 대부분의 관심은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이 전분기보다 0.2% 늘어났다는 데 쏠렸다. 이는 전반적으로 1% 축소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예상에도 미국 경제가 불황으로부터 급속히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미국 경제가 "회복 태세를 잘 갖추고 있다"며 "우리가 겪은 그동안의 과정을 돌아보면, 이를 불황이라기보다는 '모조 불황'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대책 없는 낙관론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난해 4분기 물가가 전분기에 비해 0.3% 하락했다는 사실은 거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물가가 떨어진 것은 50년 만에 처음이다. 이는 미국 경제에 디플레이션의 위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4분기 플러스 성장률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비지출이었다. 소비지출은 지난해 3분기 1% 늘어난 것과 비교해 4분기 5.4% 상승했다. 내구소비재에 대한 지출이 38.4% 증가해 가장 큰 폭으로 늘었는데, 특히 일시적인 무이자 할부판매의 결과로 자동차 구입 지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강조한 것처럼, "이 효과가 없었다면 4분기 경제성장은 2.5% 이상 하락했을 것이다."
반면 지난해 4분기 기업들의 투자는 12.8% 감소했다. 3분기 감소폭 8.5%를 훨씬 웃돈 것이다. 자본투자는 현재 4분기 연속 줄어들었고, 반전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설비가동률은 4분기에도 계속 떨어져 현재 1983년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기존 공장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놀고 있는 데다, 물가까지 내리고 있어 금리가 아무리 낮게 떨어진다고 해도 실질금리는 그리 낮아지지 않게 된다. 결국 기업들은 계속 신규투자를 더 꺼릴 수밖에 없다.
특히 내구재 지출의 증가에 따라 가계부채가 늘고 있는 가운데 더욱 우려되는 것은, 가계의 할부 상환 금액(debt service: 장기 차입금의 원리금 상각용 적립금으로 해마다 계상하는 충당금) 수준 역시 기록적으로 높아져 왔다는 것이다. 이는 금리나 실업이 높아질 경우 높은 채무불이행 위험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계부채 '확장'의 정도는 소비자신용 증가에서 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110억 달러 증가한 뒤, 소비자신용은 11월 200억 달러의 기록적인 증가를 나타냈다.
진보적인 재정적자 정책 절실
미국 경제가 지난해 4분기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소비지출의 계속적인 증가를 통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폴 크루그먼은 미국 경제가 W자형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현재 미국 경제는 바닥을 친 것이 아니며, 조금 회복되다 다시 깊은 바닥으로 향할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군비지출이 적절한 유효수요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때문에 미국 경제는 나머지 세계경제를 끌어올리는 성장의 엔진을 계속하기도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설사 월스트리트의 기대대로 이런 낙관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고 해도, 미국 경제는 지속될 수 없는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연간 4천억 달러가 넘는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4% 수준이다. 아마도 미국 경제가 세계경제를 지탱하기에 충분한 속도로 성장한다면, 경상수지 적자는 2003년께 국내총생산의 6%로 커질 것이다. 이 수준에서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미국은 나머지 세계로부터 하루 20억 달러의 자본유입이 필요하다. 더 큰 우려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전 달러는 신뢰의 위기를 맞을 것이고, 이는 금리 상승과 함께 미국 경제를 급속한 불황으로 몰고 갈 것이다.
결국 미국 경제의 최후의 보루는 진보적인 적자재정일 수밖에 없다. 감세의 90%가 부유층으로 향하는 부시의 반동적인 감세가 아니라, 교육·복지·철도·의료 등에 대한 대규모 사회적 지출일 수밖에 없다. 제롬레비연구소 등 비주류인 미국 포스트케인지언 학계에서는 올해부터 앞으로 5년 동안 가계부채가 정상적인 수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6천억 달러의 재정 투입이 있지 않으면, 미국 경제는 높은 실업과 저성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현재 미국 실업보험은 실업자에게 26주만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있다. 9·11테러 이후 부시 정권은 이 실업급여 급부기간을 연장하지 않았다. 2월 첫째 주 실업급여 혜택기간이 만료된 미국 실업자는 8만 명이 넘는다. 오는 6월까지 이 숫자는 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 지배의 하원은 최근 실업급여 급부기간을 13주 연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월스트리트에서는 미국 경제가 올해 2분기부터 본격 회복될 것이라는 대책 없는 낙관론이 대두하고 있다. 정말 상식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정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