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공서비스 노조주의를 말한다

노동사회

다시 공공서비스 노조주의를 말한다

admin 0 4,134 2013.05.08 11:20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공공서비스노조주의로: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평가" 라는 제목으로 지난 여름, 『창작과 비평』에 실린 필자의 글(박태주, 2002)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김승호, 2002; 김상곤, 2002; 오건호, 2002). 뿐만 아니라 공공서비스 노조주의가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일찍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기도 했다(최근의 글로서는 김동춘, 2001; 박영균; 2001; 니어리, 2001. 참고). 먼저 필자가 『창비』에서 밝힌 주장의 대강은 이러하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은 분배우선의 경제적 투쟁에서 벗어나 공익(public interests)을 중요시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형성하여야 한다; 이를 38일간에 걸친 발전노조의 파업에 견주어보았을 때 이는 초기적인 형태나마 공공서비스 노조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공서비스 노조주의가 민간 영역으로 번져갈 경우에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1)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보태었다.[주1. 실제로 예를 들어 존스톤(P. Johnston, 1994)은 공공부문에서의 이러한 노선까지를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투성에 대한 부당한 폄하라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탈계급적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논리적 귀결로서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 기구'에 지나지 않는 노사정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은 사실이나 부분적으로는 글읽기의 문제도 곁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주변화되면서 잊혀져 가고 있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노조의 전투성에 대한 폄하?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이 글에서(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부정한 적이 없다. 전투성이란 노사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를 전제로 한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이 일상적이라면 불가피한 것이다. 더욱이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에서 맹아적인 형태나마 사회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그 밑바닥에는 발전노조원들의 끈질긴 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를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번 파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합원의 38일 간의 흔들림 없는 산개투쟁이었다. 그러나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관점에서 볼 경우 관심을 끄는 것은 발전소 매각철회라는 공공적 요구 및 조합원의 끈질긴 미복귀 투쟁만은 아니다. 발전노조의 투쟁은 민주노총을 축으로 하는 연대파업과 결합하는 한편 보다 중요하게는 사회시민단체와 결합함으로써 발전회사의 매각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연대의 형성'(강조 필자)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저항의 포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필자는 노조의 '기존의 전투성'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전투성이 임금인상이나 고용조건의 개선과 같은 경제적 목표의 달성에 묶여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실질적인 투쟁이 아니라 선언적이거나 수사적인 투쟁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대부분의 투쟁이 기업차원에 머묾으로써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얻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필자는 경제주의에 매몰된 작업장의 전투성(econonmistic workplace militancy)을 비판하는 것이지 전투성 그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논의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도 노조의 전투성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계급중심성의 상실 혹은 탈계급적?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탈계급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은 니어리(M. Neary, 2001)의 글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김상곤(2002)의 비판은 주로 이 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어리는 맑스주의 사회이론을 분석의 기초로 삼아 "인간사회의 진보적 변혁은 노동이 그 자신의 의지로 혹은 다른 제도들과의 연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변혁은 노동의 폐지, 그리고 노동이 구성되는 사회의 폐지에 달려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계급관계의 폐절이라는 계급정치의 장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탈계급적이거나 계급중심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은 사실이다. 이는 노동조합의 목표와 관련된다. 노동조합이 혁명의 도구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건설 - 자본주의의 폐절을 목표로 한다면 공공서비스 노조주의 또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결코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을 노동계급의 집단적인 투쟁을 위한 기구로 보았지만 노동조합은 계급적인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편협한 직업적 이해'에 따라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연대의 표현이자 동시에 산업별·직업별·기업별로 조직됨으로써 분열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노동조합을 혁명의 도구로 바라보는 것도 부정하지만 동시에 '직업적 이해조직'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통합의 실현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것이 '집단적인 전통의 담지자'로서 노동조합이 담당해야할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노사정위원회는 신자유주의 코포라티즘 기구?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노사정위원회가 갖는 위상은 각별하다. 먼저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노사정위원회는 국가가 자본과 노동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조직을 인정하고 교섭한다는 의미에서 시장경쟁시스템과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Traxler(1996)는 경제적 지구화의 압력하에서 그 대안은 공급측면에서의 코포라티즘(supply-corporatism)밖에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을 정도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다원주의 모델의 대안이기도 하다. 이는 노동조합이 하나의 이익단체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독점적으로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그것은 사회적 합의(social pacts)라는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노사정위원회는 노사정간 전국적 전선, 그것도 정치적 전국전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1997∼98년의 노동법 개정투쟁은 당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의 논의가 사회적 관심사가 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만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즉, 노조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친노조적 정당이 부재할뿐더러 합의사항을 이행할 수 있는 산별노조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코포라티즘의 종언을 이야기하던 1980년대의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 서구에서 코포라티즘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해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Waddington(2001)은 사회적 합의는 노사관계가 분권화되는 현상에 대한 대응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노사정이라는 사회적 행위자들 사이에 협의가 일어나는 것은 사회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strategic choice)의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 노동조합은 전략적 행위자이며 이는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도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를 단체교섭만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그럼 노동조합운동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나타난 배경은 무엇인가? 이는 크게 경제환경의 변화(케인즈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등장), 노동자들의 갖는 복수의 정체성, 노조 조직률의 하락 등 노동조합의 약화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활성화 등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을 지배해왔던 정체성은 조합원의 직업적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이었으며 이러한 경제주의를 실현시키는 핵심적인 수단은 단체교섭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와 노사관계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었으며 정치는 기껏해야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체교섭 자체가 점차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거시경제정책이나 법률적 규제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자 이러한 경제적 조합주의는 더 이상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즉 정치적 경제주의(political economism)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노동조합이 한편으로는 사용자와의 단체교섭에 주력하는 것과 동시에 단체교섭에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경제적 법률적 구조에도 관심을 가지는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Hyman, 1999). 

그러나 정치적 경제주의는 케인즈주의의 후퇴와 신자유주의의 대두를 맞이하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과정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권리에 대해 점점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증대되는 경제적인 불평등과 연결되면서 사회적인 통합을 파괴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파괴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빈민이나 불안정고용자 및 그들의 자녀에게 더욱 심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적인 차별(social apartheid)을 가져온다. 오늘날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의 '또다른 가진 자'인 '대규모 민간기업이나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한다면 그 결과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경제주의의 최악의 형태인 분파적 경제주의(sectional economism)를 낳을 뿐이다. 

이는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시대에는 비록 진보적인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진보정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정당은 국민의 리더가 되기보다는 단순히 경제의 관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리들이 그들을 선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우리들은 우리들의 친구가 집권했다고 해서 잠자리에 들 수는 없다". 캐나다의 어느 한 노조활동가가 한 말이다(Caroll et al., 1995). 이러한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정치를 최후의 해결로 보지않는다. 정당정치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국가보다는 시민사회를 우선시하는 것이다(Waterman, 1999). 물론 정당정치를 사회운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정치의 규정성이 높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노동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 환경문제나 여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을 환경운동연합이나 여성 민우회와 같은 환경단체나 여성단체에 맡기지 않고 왜 노동조합이 나서느냐? 노동조합원들을 임금이나 고용조건과 같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노동조합은 과연 환경배출산업을 폐쇄시킴으로써 초래되는 고용의 축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결국 책상물림들의 사치와도 같은 사고의 유희가 아닌가? 나아가 노동조합이 사회문제를 온통 걸머져야한단 말인가? 

이러한 지적에 일일이 답할 지면의 여유가 여기에는 없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답변마저 유보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단순히 노동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시민이자 소비자로 나타난다. 더욱이 여성노동자에게는 여성성이라는 정체성이 덧보태진다. 즉 복수의 정체성(multiple identities)이 오늘날 노동자를 규정짓는 핵심인 것이다. 즉 환경의 문제나 여성의 문제가 더 이상 노동자의 삶과 무관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운동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가 임금이나 고용조건에 관한 단체교섭이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오염배출산업의 퇴출이라는 생태학적인 이해는 궁극적으로는 노동자의 교섭활동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Leisink, 1996). 노동조합 내부에서 성평등을 실현시키는 일이 사회적인 성평등 프로젝트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즉 노동조합은 작업장에서의 경제적인 관심을 뛰어넘어 지역이나 사회전체의 이슈해결에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공장문을 나와 거리로 나설 것, 즉 사회공동체와 연대할 것을 요구한다. 지역공동체의 연대를 넘어 국제차원에서의 연대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세계화되는 경제상황에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운동을 독점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사회운동과 연계를 맺고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노동조합이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사회운동과 연계고리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10% 남짓한데다 그나마 기업별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인 분배위주의 투쟁은 한편으로는 분파적 경제주의를 낳았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노동조합은 더 이상 우리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역사의 창조자로 나타나기는커녕 주변화되고 있으며 때로는 잊혀져 가고있기도 하다. 노동조합이 스스로의 이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연대는 역설적이게도 조직간 정체성이나 문화, 목표 등에서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차이가 없다면 연대의 필요성도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차이는 연대가 다양한 이슈를 포괄하는 운동(multi-issue movement)으로 만든다. 앞서 말한 발전노조의 파업과정에서 나타난 노조와 환경단체의 공동성명이 이를 나타낸다. 즉 양자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민영화의 유보와 전력산업의 친환경적 구조개혁에 동의한 것이다. 

사회적 연대는 조직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연대의 대상으로는 비노조원과 더불어 사회운동단체, 즉 여성, 환경, 평화, 인권, 통일 단체, 나아가 정당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노동조합이 시민사회단체에 대해 계급적 관점을 요구할 경우 연대의 가능성은 대부분 물 건너가 버리고 만다. 시민사회단체는 비록 내부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계급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자면서 계급적 관점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포기하라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의 연대는 노동조합이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제기되는 물음은 어떠한 조건에서 이러한 연대가 일어나며 이 경우 누구의 목소리가 주도적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연대는 항상적이기 보다는 이슈중심적이라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이러한 연대의 형성에서 노동조합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조직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운동이 다른 그룹의 투쟁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쇼비니스틱한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2).[주2. 이러한 점에서 이는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에서 ... 노동조합은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나 계급적인 전망을 제공한다"라고 하며 계급적인 사회연대와 노동조합의 주도성을 주장하는 무디(K. Moody)와는 구별된다.] 즉 반드시 노동조합이 주도성을 행사하여야 한다면 이 역시 연대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사회적 연대는 서로의 이해관계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할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며 그것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보다 중요하게는 워터만(Waterman, 1999)이 말하듯이 네트워크이며 이러한 생각은 무엇보다도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새로운 국제적 지구적 사회운동을 위한 전형적인 조직형태는 조직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에 가깝다. … 그룹들 사이의 일시적 연합과 장기적인 동맹을 포함하는 일국적, 국제적 네트워킹이라는 사고는 수직적이라기 보다는 수평적인 조정(horizontal coordination)에 관련된 것이며 종속, 규율, 충성, 신념이 아니라 공유된 필요와 가치에 의해 한데 묶인 무언가이다. 따라서 조직적/정치적 모델은 점차 네트워킹/통신모델로 대체되고 있다3).[주3. Hyman(1999a)은 이를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기계적인 연대(mechanical solidarity), 즉 위계에 바탕을 둔 경직된 조직체계가 아니라 차별화되고 독립적인 조직들간의 유연한 조정(flexible coordination)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론: 사회통합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조합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는 이념은 노동운동이 공장문을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아니라 '정의의 칼'(sword of justice)이라는 노동조합 고유의 역할이 숨어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사회통합을 위한 수단으로 나타날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즉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이거니와 이슈의 확대를 통해 사회적 이해관계의 대표자로서 사회복지의 향상과 사회적 통합에 노력하여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에게는 사회적 연대의 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변혁운동에 있어서 연대문제가 당면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혁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체 변혁 역량이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특성 때문에 물은 반드시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고 그리고 수많은 물들이 모이기 때문에 결국 바다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 즉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인터넷 사이트에서 노자를 강의하고 있는 신영복(2002) 선생의 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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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