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따라 배우겠다고?

노동사회

미국을 따라 배우겠다고?

admin 0 3,261 2013.05.08 11:38

우리는 미국을 바이블로 했다

내로라 하는 미국기업들이 속속 분식회계 스캔들에 휘말리고 있다. 도대체 이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은 지금으로부터 사오 년 전인 IMF 위기 때로 되돌아간다. 당시 미국의 교시를 받은 IMF는 국내 기업의 투명성 문제를 꼬집어 치명적인 내부 결함으로 단정했다. 투기자본이나 국제금융질서 등 외부조건을 들먹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너희들은 거짓투성이 기업회계로 외국인 투자자를 속였고, 정부-금융기관-기업 간에 뿌리내린 연고주의 먹이사슬로 스스로 나라를 망쳤으니, 남 탓하지 말고 제대로 형님을 본 받으라'는 뜻이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실로 많이 바뀌었다. 종래 일본적인 관행과 제도가 판을 쳤다면, 소위 영미식 제도가 새로운 바이블로 등장했다. 기업의 감시는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자본시장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며, 금융시스템을 은행 중심에서 자본시장 중심으로 전환했고, 기업의 지배구조는 주주이익 극대화에 맞춰 개편됐다. 또한 자본시장에 참여하는 주주들의 정보 욕구를 맞춰야 한다며, 기업회계는 시가주의, 연결주의, 현금 흐름주의를 3대 원칙으로 도입했다. 

그 연장으로 정부는 주식시장 키우기에 더욱 집착하고 있다. 한두 가지 뉴스만으로도 시장이 요동치는 것은 수요 기반이 얕기 때문이라며, 연금제도를 미국식으로 대거 개편해서 주식시장에 대형 붙박이 자금을 끌어들일 태세다. 월급쟁이들의 노후 대책까지 투기장에 몰아넣겠다는 발상이다. 도대체 이 땅의 관료란 작자들은 천하를 놀라게 만든 미국의 '분식회계 만연 → 주식시장 폭락'이란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런 철없는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 황당할 뿐이다. 

어처구니없이 뻔한 조작

미국의 분식회계는 이번에 표적이 된 몇몇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상당수 미국 대기업의 분기별 이익실적은 매번 전망치를 약간 웃도는 쪽으로 나왔다고 한다. 주가관리가 관행으로 되어 있고, 이를 위해 기업실적을 조작하는 분식회계가 도구화 되어 있음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사용된 기법들을 들여다보면, 회계원리 한두 과목을 수강한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잡아낼 만한 극히 뻔한 장난질이 백주에 벌어졌다. 히말라야를 산행하고 나서 에베레스트를 못 봤다고 우길 수 없는데도, 미국의 감독기관, 회계법인, 기업이사회 등 투명성을 감시해야 할 당사자들은 일제히 뻔한 부정을 알면서도 모른 채 했다. 아마도 널리 관행화된 부정행위라 특별히 문제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먼저 발생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미국식 회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현금주의 회계라면 눈에 보이는 현금의 유출입을 근거로 하므로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작지만, 발생주의 회계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비용과 수익을 기간별로 임의 배분하므로, 언제든지 회계 조작이 가능하다. 즉 주가를 의식해서 '순이익 거꾸로 짜 맞추기'가 관행화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매출액에서 비용을 빼 순이익을 계산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순이익 목표부터 미리 정하고 이에 맞춰 매출과 비용을 짜 맞추는 합법적 범죄가 가능한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복사기를 제작·판매하는 제록스는 단기 리스로 대여할 경우 해당 회계 연도에 리스료 수입 밖에 발생하지 않는데도, 이를 마치 일시에 매출된 것으로 조작해서 수익을 크게 부풀렸고, 장거리 통신회사인 월드컴은 네트워크 관리에 드는 유지보수 비용을 장기성 투자지출로 위장 처리함으로써 당해 연도에 마땅히 비용으로 처리할 것을 모두 미래로 떠넘겼다. 엔론은 이익 목표에 압박을 받자 내부거래 방식을 동원해 자사 임원에게 자회사를 비싼 값으로 매각해서 이익이 난 것으로 처리했고, 대신 자사 임원에겐 자회사를 매입할 뒷돈을 빌려줬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었다.

썩은 사과가 문제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회계조작 사건이 밝혀지자, 주가는 즉각 곤두박질 쳤다. 1999년 여름 60달러까지 치솟았던 월드컴 주가는 25센트도 안 되는 휴지조각이 됐고, 제록스 주가 또한 60달러에서 7달러로 수직 하락했다. 마침 2000년 3월 이후 장기간의 거품이 꺼지면서 침체 국면에 빠져든 미국 주식시장으로선 실로 엄청난 악재였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주가의 고공 행진을 믿고 세금 인하 정책을 이미 발동한 터라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주가 하락이 멈추지 않을 경우 자본이득세 수입이 예상을 크게 밑돌게 됨으로써 미국은 다시금 재정적자-무역적자의 동시 진행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에 봉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캐나다 G7 정상회담을 마친 부시는 서둘러 사태 진화에 나섰다. 미국경제의 기초체력(fundamental)엔 전혀 이상이 없으며, 단지 몇몇 부도덕한 경영자가 문제라며 월가를 직접 방문해 투자자를 안심시키려 했다. 몇몇 썩은 사과가 있긴 하지만, 사과 궤짝엔 전혀 이상이 없으니 국민들이여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과연 일부 경영자의 문책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미 사태의 심각성은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다. 먼저 규제당국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 감시에 소극적이거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으로 추측된다. 한 예로 제록스가 수익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회계감사를 맡았던 KPMG의 문건을 통해 일찍이 지적됐음에도 SEC는 아무런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가 불거진 후 SEC 위원장은 은밀히 KPMG 회장과 만나기까지 했다. 공직을 맡은 SEC 현 회장이 KPMG의 수석 법률고문 출신이라니 할 말이 없다. 

엔론 경영진은 회사가 파산신고에 들어가기 전, 일년 기간 중 회사로부터 무려 7억5천만 달러를 챙겼다. 급여, 보너스, 개인 융자로 3억 달러 이상을 받아냈고, 나머지 금액은 스톡옵션을 행사하거나 주식으로 받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회사가 파산 신고를 하고 나서 경영진의 동요를 막을 명목으로 지급하는 이탈방지 보너스를 파산 신청에 앞서 서둘러 5천만 달러 이상 받아냈다. 반면 해직 당한 종업원들에겐 1인당 5,600달러가 지급됐고, 그나마 주가 폭락으로 우리사주가 휴지조각이 됨으로써 이들은 더 큰 손해를 입고 말았다. 회사는 망해도 경영진은 돈 보따리를 챙겨 나가고 종업원은 직장을 잃고 최소한의 금융저축과 노후보장책까지 날리는 실로 야만적인 구도이다. 

왜 체제 문제인가

그러면 단지 몇몇 썩은 사과 때문에 이런 엄청난 사고가 터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고를 잉태한 체제 모순이 무엇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경제는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돌입했고, 이로 인해 자본은 실물경제 활동을 통해 초과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의 타개책으로 자본이 찾아낸 것은 금융의 투기화와 주주이익 극대화였다. 한마디로 기업은 돈 놓고 돈 먹기로 이윤을 추구해 주주 이익에 '멸사봉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륙 십 년대처럼 배당을 통해 이익을 얻기 어렵게 된 주주들은 주가상승 이익을 새로운 이윤의 원천으로 삼았고, 경영자를 포획할 목적으로 스톡옵션이란 제도를 도입했다. 그 대가로 경영자는 노사타협을 저버렸고, 주가관리에 매진했다. 

이후 미국은 80년대 말부터 글로벌 금융시장의 통합을 주창했고, 세계의 자본은 더욱 미국으로 흘러들었다. 이어서 90년대 중반부턴 IT 산업의 경쟁우위를 근거로 신경제론을 내놓고 자본시장의 거품 폭발에 불을 지폈다. 다우존스와 나스닥 주가는 천장부지로 뛰어올랐고, 수조달러에 달하는 기업사냥이 벌어졌다. 매수하는 측은 장부가보다 훨씬 비싼 값을 주고라도 표적기업을 마구 사들였고, 이로써 대차대조표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막대한 영업권 자산(매입가 ― 장부가)이 계상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주식 가격이 워낙 높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매입대금을 마련할 수 있고, 표적기업을 인수한 후엔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이익을 짜내면 자사주 가격은 더욱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50개, 100개씩 기업을 사들인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주가 오름새와 연동해서 경영진은 막대한 스톡옵션을 챙겼다. 

그러나 거품의 향연은 마냥 지속될 수 없었다. 영업권으로 쌓은 가공자산은 수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드시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즉, 유사시 가공자산을 상각해서 비용으로 인식할수록 그만큼 이익은 줄어들고, 경영자의 주가관리엔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이제 남은 수단은 분식회계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감시장치가 발동한 것도 아니다. 회계법인은 컨설팅 수주를 위해 분식을 눈감아 줄 수밖에 없고, 각종 이권에 개입된 사외이사는 쓴 소리를 할 수가 없다. 또한 재계로부터 핵심 인력을 주고받은 규제당국은 대응에 소극적이고,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 받은 정치권은 상도의를 저버릴 수 없다. 연고주의는 우리만의 고유 문화가 아닌 것이다. 

종업원을 통한 내부감시가 필요하다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결함은 결코 먼 산의 불이 아니다. 실물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자 미국자본은 초과이윤을 달성하기 위해 금융의 투기화를 추구했고, 스톡옵션을 도입해 경영자를 주주이익에 굴복시켰다. 이에 경영자는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 금융버블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버블이 파열하자 주가관리의 마지막 수단으로 분식회계에 매달렸다. 그리고 미국식 발생주의 회계는 주관적 판단을 허용하므로 언제든지 합법적 분식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단지 미국발 경제불황에 대비하면 그만일 것인가. 아니다. 미국식 기준(standard)에 맹종해온 그간의 개혁은 깊은 반성을 요구한다. 투기장으로 전락한 자본시장에 실물의 금융을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되고, 주주이익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경영자에겐 다시금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종업원을 비롯한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참가할 수 있도록 기업의 지배구조를 재정비해야 한다. 

특히 재벌과 사주의 도덕적 해이가 만성화된 우리나라로선 기업감시 시스템의 보완이 시급하며, 새로운 감시 축으로서 내부자, 특히 종업원의 발언(voice) 기능을 살릴 필요가 있다. 종업원은 주주와 달리 기업이 부실하다고 떠날 수 있는 이탈(exit) 옵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 부실로 인해 기업이 도산할 경우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것은 종업원이다. 주주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요즘처럼 일자리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종업원은 자신의 미래와 가족의 생계까지도 위협받고 만다. 따라서 종업원은 기업의 계속성에 누구보다 강한 헌신성을 갖기 마련이다. 

또한 종업원은 내부 부정을 누구보다 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정보·입지의 우위성을 갖고 있다. 이런 특성을 살려 종업원의 발언 기능을 강화한다면 주주의 이탈기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행 시스템에 비해 기업은 부실·부정으로부터 자체 치유력을 높일 수 있고, 소액주주들은 소수의 전횡으로부터 투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운동은 하나의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서 감사위원회의 추천권을 얻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