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조세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진보세력은 물론 보수세력도 제기해왔다. 진보세력은 조세제도가 부유층에 유리해 소득 재분배와 사회 형평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세력은 재산권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주장한다. 누구 주장이 맞을까?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 중에 지니 계수라는 것이 있다. 지니 계수는 1이면 극단적인 불평등, 0이면 극단적인 평등인 바, 2001년 세금을 부과하기 전의 도시가계 소득의 지니계수는 0.355인데 세금을 부과한 후는 0.347으로, 세금을 부과해도 소득불평등도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진보세력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적게 내는 게 좋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세금을 적게 내면 좋다고 생각한다. 소형차를 굴리는데도 1년에 수십 만 원의 세금을 내야한다고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질법하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람들은 세금을 얼마나 낼까.
한국의 국내총생산 중 조세 비중은 1999년 현재 23.6%다. 1년에 버는 돈의 1/4 정도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도 가입한 선진국들의 클럽인 OECD 30개나라 가운데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29위다. OECD 평균인 37.3%에 턱없이 모자라고, 가장 불평등한 나라라는 미국보다 낮다.
아래 표는 김대중 정부가 좇아가고 싶어 안달인 미국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도 세금을 더 내야하고, 유럽식 복지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2배 이상 세금을 내야함을 잘 보여준다. 세금을 적게 내면 개인이야 좋지만, 사회는 그 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에….
얼마 전 의료보험 통합이 문제 되었을 때 노동조합은, 소득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자영업자는 세금을 덜 내고, 노동자들은 소득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세금을 더 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고, 다른 편으론 틀리다. 물론, 자영업자들의 경우 간이과세제도를 통하여 부가가치세에서 특혜를 얻어 왔고, 세금계산서를 작성하지 않아 매출액을 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계나 재무 장부를 고의로 속여 정확한 소득 파악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덜 낸다는 불만이 일자, 근로소득세에 대하여도 소득 공제가 확대되어 일정액 이하의 소득을 올리는 노동자도 세금을 거의 내지 않게 되었다. 일례로 4인 가족의 가장으로 연 3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노동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00만원 이하의 소득세를 부담한다.
외국의 예를 보면, 제조업 평균노동자(4인 가족) 총임금 중 소득세의 비율은, 1997년의 경우 스웨덴 28.5%, 프랑스3.7%, 미국 10.7%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0.9%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보험료와 같은 사회보장 기여금까지 포함하면 스웨덴 34.5%, 프랑스 21.4%, 미국 18.4%에 이르나 한국은 3.9%에 불과하다(오건호, 「한국사회조세구조의 특징과 개혁의 기본방향 : 총직접세의 상승과 '사회임금'의 정착을 위하여」, 『한국 조세제도의 문제점과 개혁방향』, 민주노동당·민주노총·참여연대 공동 워크숍 자료집).
이는 자영업자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도 세금을 많이 내야 함을 뜻한다.
조세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
조세는 정치와 무관한 영역이라 생각하기 쉽다. 우리 정치는 아직 정책 대결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기성 정치권은 끝없는 상대방 헐뜯기와 부패 문제로 소란이 끊일 날이 없다. 사회복지제도나 조세제도 개혁 같은 중대사는 한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이러한 상황은 진보정치를 표방하는 세력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좌파/우파 논쟁은 많지만, 실질적인 정책 경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경험에서 보자면 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세 문제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다. 누가 어느 만큼의 세금을 부담하는가는 계급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리거나 올릴 때도 어느 계층이 혜택을 보는가에 따라 각 계급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의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정치라면,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세율을 1% 올리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일 뿐만 아니라, 선거에서도 주요 쟁점이 된다. 알다시피 부르주아 혁명의 발단은 세금문제였다. 지금이야 소득세가 당연한 제도로 여겨지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소득세라는 제도 하나를 만드는 데도 엄청난 사회 갈등과 홍역을 치러야 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도 연방소득세 도입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쟁이 있었고, 연방소득세를 규정한 법률이 연방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기도 했으나, 공평 과세를 주장하는 그룹의 승리로 1913년 헌법이 개정되어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2001년 하반기 우리나라 국회는 여야 합의로 법인세율과 소득세율을 인하했다. 소득세율의 경우 최저세율은 10%에서 9%로, 최고세율은 40%에서 36%로 각각 인하되었다. 저소득층도 혜택을 본 것 같지만, 실제 1천만 원의 과세표준을 갖는 자는 부담세액이 1백만 원에서 9십만 원으로 줄어들어 10만 원 줄었지만, 1억 원의 과세표준을 갖는 자는 부담세액이 2,700만원에서 2,430만원으로 270만원 줄었다. 누가 더 이익을 봤는가? 물론 부자들이다.
1천만 원의 소득자가 세금 10만원을 더 내는 대신, 1억 원 소득자로 하여금 270만원 세금을 더 내게 하여 이를 사회복지 재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저소득층에 유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득층에 유리한 세법이 통과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같은 가진 자의 정당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고, 진보정당이 의석 하나 없기 때문이며, 노동조합의 정책과 투쟁 역량이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율 올리면 재산 해외도피 일어나는가?
보수 세력은 세율을 올리면, 고소득층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자본을 해외로 도피시킬 것이고, 이 때문에 오히려 세수가 감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70년대까지 유럽국가들은 최고 70%에 달하는 고율의 누진소득세를 징수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상당수 나라들이 최고 소득세율을 인하하여, 2000년도 현재 중앙정부 최고소득세율, 지방정부 최고소득세율 합산한 수치가 프랑스 54%, 독일 51%, 스웨덴 56.4%, 미국 46%에 달한다. 참고로 한국은 39.4%다. 즉, 자본의 이동이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나라인 미국에서도 최고소득세율은 한국보다 훨씬 높다. 외화거래가 자유화되고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어 세계적으로 소득세율이 인하된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히 그 위험은 과대 평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높은 세율 때문에 자본이 해외로 이동한다면 높은 세금을 상쇄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고수익을 해외에서 올려야 하는데, 자본이 해외로 간다고 반드시 그런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세율이 비교적 높은 북유럽 국가에서 자본의 해외도피가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세금이 높더라도, 고율의 세금 덕분에 국가가 대규모 연구개발 및 교육투자를 쉽게 할 수 있어 높은 수준의 노동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업 환경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고소득자들의 경우에도 폭넓은 사회보장제도 때문에 삶의 질이 높기 때문에 굳이 해외로 이주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공평 과세의 장애물?
현재의 조세제도를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제안이 이루어져 왔다. △ 고소득자에게 높은 세금을 내도록 하기 위해 일정액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자에게 부과하는 부유세를 신설하자는 안, △ 연 4천만원 이상만 합산하는 금융소득종합과세의 범위가 너무 좁아 이를 넓히자는 안, △ 주식양도소득에 대해서 과세하자는 안 등이다.
물론, 이러한 안에 자산소유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大)자산가들이 소(小)자산가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보호하려 한다는 점이다. 주식양도소득세의 경우, 현재 3/100 이상이나 100억 원 이상의 상장주식 소유자의 주식양도소득만 과세하나, 만약 이를 원칙적으로 과세하려 한다면 대주주들은 물론 소액주주들의 '불안감'도 부추길 것이다. 주식양도소득을 과세하더라도 소액주주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거나 감액할 조치는 수반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자산가들이 소액주주들을 이용하여 "주식양도소득과세가 대중의 재산 형성을 저해하고, 주식시장의 활성화를 저해한다"며 여론 조작을 할 것이다.
과거 토지초과이득세가 입법되었을 때도,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 부담액이 크지 않은 소토지 소유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이 법이 희대의 악법인양 선전하였고, 그러한 여론의 동향이 헌법재판소가 토지초과이득세법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여지도 있다.
현재 노동자들도 광범위하게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 공평 과세의 핵심 과제인 주식양도소득세에 대하여 노동자들이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여 대주주들의 선동에 넘어갈 경우, 주식양도소득세의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복지 사회는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사회 임금' 투쟁으로 나아가야
세금 문제가 사회의 핵심 의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계급 정치의 미성숙 때문이다. 세금 문제가 일상적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생산계층과 불로소득계층이 충돌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과 대중조직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미약한 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노조 상급단체와 시민단체, 진보정당 등 한국 사회 진보의 대변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동 보조를 맞추어 나가고 있다.
이제야말로 노동운동이 조세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노조운동은 기업별 울타리에 갇혀 자기 사업장 임금 몇% 인상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한 사회임금 확보투쟁에 나서야 한다. 물론 이것은 노조운동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진보정당의 발전과 강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