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승리입니다. "당은 뭡니까? 당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거 아닙니까?" 조합원 총회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 중심성 훼손을 우려한 문제제기가 많이 들려왔다. "결과를 놓고 볼 때 민주노동당의 승리입니다." 시민단체 간부가 지체 없이 밝히는 선거결과에 대한 한마디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출처: 진보정치 ]
민주노총이 주도한 선거 국면
민주노총 울산본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6만5천 조합원 총회를 통한 지방선거 후보자를 선출했다. "첫째, 민주진보진영의 후보 난립을 차단하고 민주진보진영의 대단결을 실현한다. 둘째, 노동자와 시민의 정치적 관심을 집중시켜 본선 경쟁력을 극대화한다. 셋째, 현장 내 노동자 정치세력화 흐름을 강화하여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민주노동당을 현장에 뿌리내리게 한다. 넷째, 대중 활동을 통해 검증된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노동자와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높인다. 다섯째,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상향식 의사 결정으로 선거풍토를 개혁하고 정당민주주의를 촉진한다."
형식은 조합원 총회지만, 내용은 민주진보진영의 예비선거 선거인단 투표였다. 조합원 총회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잘 치러졌다. 노동조합운동 역사에서, 그리고 진보정당운동 역사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조합원 총회 형식의 예비선거는 세간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민주노총을 딛고 민주노동당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 6·13 지방선거다. 울산에서 선거 결과는 4년 전 성과와 비슷하지만, 적어도 2년 전 4·13 국회의원 총선거의 상처는 치유했다. 이는 많은 노동자가 진보정당운동에 희망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울산 전체의 30%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다. 조합원총회 전에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10%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사실 예비선거 과정이나 본선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이 선거국면을 주도했다. '당은 뭐냐?'는 문제 제기는 타당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 한다'는 방침을 잘 이행했다. 발생할 수 있는 잡음을 최소화시켰고, 모든 성과가 당으로 귀결되도록 노력했다.
'한나라당 지지하면 왜 안되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왜 안되나. 우리에게도 정치활동의 자유를 달라.' '임투 시기에 왜 노조간부들이 선거한다고 밖으로만 나도나.'
선거기간 동안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조합원과 가족들이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했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은 소식지를 통해 '한나라당 운동을 하는 조합원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노동조합의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에게 정치활동의 자유를 달라'고 조합원과 가족들이 기자회견까지 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지역의 쟁점이 되었고 법적 공방까지 하게 되었다. '왜 민주노동당만을 지지해야 하는가'가 이들의 주장이었다. 늘 있어온 얘기지만 '임투나 제대로 하지 노동조합이 무슨 선거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거주지에서는 '노동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들이 번져나갔다.
우리가 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현장 안에서 소수에 머물렀던 목소리와 행동이 예년에 비해 과감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 고리를 쥐고 한나라당이 현장을 공략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회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정규직 사내하청노동자와 정규직노동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득표 활동을 했다.
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정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을 앗아갔다면, 6·13 지방선거는 보수든 진보든 계급 내부의 갈등을 조장해서 분열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자들은 조합원 총회에서 뽑힌 우리 후보를 지지했고, 당선활동을 했다. '우리가 뽑은 후보가 시장이 되고, 구청장이 되고, 시구의원이 되면 노동자 처지가 지금보다는 좀 안 나아지겠냐'는 소박한 바램이었다.
비정규·하청 노동자들의 냉소
"눈길도 안줍니다. 악수도 피해요. 유인물도 안 받아 갑니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사내하청 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들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별개의 사람들로 보고 있더라고요."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차별과 소외는 무엇인지? 이들에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어떤 존재인지?
이들이 선거기간 내내 보여줬던 태도는 냉소적인 적대감이었다. 이들에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외쳐댔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비정규직 차별철폐,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구호는 뭐로 다가갔을까? 이들은 민주노총을 정말 배부른 노동자를 지켜주는 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배부른 노동자의 사치쯤으로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선거기간 내내 말이 없었다. 침묵으로 외면했다. 적어도 이들은 노동자다. 울산의 30만 노동자 중 20만에 육박하는 노동자들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체다. 침묵으로 웅변했던 이들의 외침은 무엇이었을까?
어느덧 거만해진 대공장 노동자들의 더 많은 임금, 더 좋은 근로조건, 더 힘있는 정치·사회적 권리 획득만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쯤으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노동계급 내부의 차별을 철폐하지 않고서,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기본권을 확대시키는 노력 없이, 또 이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계급차별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투쟁하게 하지 않고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절반의 성공이 아니라 늘 절반의 패배일 뿐이다.
[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송철호 민주노동당 울산시장후보(사진 가운데 사람) ▷ 출처: 진보정치 ]
절반의 승리를 넘어
"앞으로 십 년 뒤 저 시청의 주인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울산의 노동자는 술자리에서든 집회장에서든 십 년 뒤엔 노동자가 울산의 주인이 될 거라는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집권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썩어서도 아니고 정당이 맘에 안 들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세력이 노동자의 편이 아니어서였다. 파업하면 공권력 투입하고 노동자를 잡아갔다. 늘 자본가의 편에서 작동하는 게 권력이고, 법이고,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 년 넘게 꿈꿔 왔던 집권의 꿈이 6·13 지방선거에서 현실이 되는 듯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시민단체들까지 연대해서 싸웠다. 이번엔 다들 될 거라고 들떠 있었다. 예상은 빗나갔고, 꿈은 깨졌다. 사실 1998년 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울산시를 노동자가 운영하는 것은 4년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되돌아본 15년의 민주노조운동과 줄기차게 시도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큰 구멍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순간 민주노조운동과 함께 하지 못하고 소외된 많은 노동자들의 이유 있는 침묵을 보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역시도 정규직노동자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았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아무런 희망이 되지 못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어떻게 완전한 승리를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늘 절반의 패배를 안고 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