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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2003. 1. 21(화)
·곳: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회: 김태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발제: 김수진 이화여대교수, 정치외교학
·토론: 박준식 한림대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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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쪼부터 박준식 교수, 김태현 부소장, 김수진 교수 ]
발제자: 김수진
오 늘 저의 발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 16대 대통령 선거의 특징은 무엇인가, 두 번째로 새로 출범하게 되는 노무현정권의 성격과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정권하에서 노동운동의 대응 기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3김 정치 청산과 정치개혁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3김 정치의 종식 여부였습니다. 노무현의 승리로 3김 종식과 함께 범국민적인 개혁과제가 제기되었고 정치개혁이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회창 후보의 패인은 정치개혁의 국민적 열망을 외면한 채 의회다수당임에도 불구하고 네거티브(negative)적인 전략만을 사용하여 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3김 정치의 부정적 현상은 지역주의, 사당정치, 권력남용, 부정부패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같은 부정적 유산은 정치적 노동운동과 이에 대한 지지세력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온 최대 걸림돌이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이같은 부정적 걸림돌이 제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6 대 대선의 두 번째 특징은 탈냉전의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중생 사망 사건을 계기로 반미정서는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지역의 투표 결과를 보면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이 대단히 높습니다. 이전까지 반공의식의 아성이었던 이들 지역에서의 투표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탈냉전의 정치적 효과가 투표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동두천, 의정부 등 접경지역의 주민들조차 이제 더 이상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입장에서는 대선 후반부에 터진 북핵문제가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큰 변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보혁대결 구도에서 보수필승' 신화가 붕괴되는 조짐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분단, 한국전쟁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이 견고하게 떠받쳐 왔던 보수독점적 정치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이번 선거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주의, 사당정치의 퇴조와 함께 정당들 간의 이념, 정책, 노선간의 차별성 강화의 계기가 일단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켜 줄 수 있는 제도개혁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민주노동당의 명암
민 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선거는 명암(明暗)이 엇갈리는 선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요소를 보자면 장상환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도 어느 토론회에서 이야기했듯이 "제도정치권에서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민주노동당이 진보세력의 정치적 대표체로서 공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과지만 권영길 후보의 득표가 1997년 30만표(1.2%)에서 96만표(3.9%)로 세 배 이상 증가한 것에서도 이 점은 확인됩니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선전하는데는 TV 토론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TV 토론 참여는 선거 자체의 승패를 떠나서 민주노동당의 정책노선을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으며 그 효과는 단순히 이번 투표결과가 아닌 장기적인 것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민 주노동당의 정책과 공약을 보면 물론 국민경제, 국제정세 전반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진보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전술적으로는 타당했다고 생각됩니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선거는 권력 획득이 아닌 핵심 지지세력인 노동자와 서민의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이런 전술은 올바른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다른 한편 이번 대선 결과는 민주노동당에서 극복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제기합니다. 먼저 지역주의 투표경향은 아직도 민주노동당의 세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광주, 전남, 전북, 부산, 제주, 대구, 서울 등의 지역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인 3.9% 이하의 득표 지역입니다. 두 번째로 지방선거 8.1% 득표에 비해서는 현저히 약세인 득표율을 보였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보이는 사표심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미국 녹색당 후보였던 랄프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하여 부시가 당선되었다는 주장은 이번 선거에서도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을 찍어서는 안된다는 사표심리와 연결되어 선거 당일 민주노동당의 표를 크게 잠식하였습니다. 이는 대통령제 하에서 진보정당이 수권정당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향후 2004년 총선이후 개헌문제가 본격 제기될 것인데 이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방침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는 노사모와 민주노동당의 활동방식 및 조직확대 과정입니다. 민주노동당의 당원은 약 3만5천명 수준인데 이는 창당에서 1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한 수입니다. 반면 노사모 회원은 조직 창립 후 8개월만에 8만5천의 규모를 갖고 있습니다. 대중정당에 사람들이 결집되는 원인에 대한 연구가 많은데 이에 따르면, 계급대립이 약화된 현대에 있어 대중 정당으로의 결집 요인으로 "정서와 마음"이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중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은 합리성과 냉철한 의식은 뛰어나지만 정서와 감성으로 대중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노사모의 경우 일반대중들의 정서와 감정을 잘 고려하고 선거과정에서 창의성과 민첩성에서 우위를 보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정치개혁이 최대 의제
다 음으로 노무현 정부의 성격과 전망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노무현 정권은 역대 정부 중 가장 취약한 정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치적인 입지가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이럼 점에서 노 당선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지형의 근본적 재편을 통한 정치적 기반 확립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노 당선자는 1월18일에 있었던 KBS 국민토론회에서 "물이 새고 있는 배를 타고 항해를 계속 할 수 없다"며 정당 개혁의 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향후 1년 간 '정치개혁'이 최대 의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개혁에는 기득권의 손상이 수반됩니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지지 없이 노무현 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정치개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 당선자는 2004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는 정당에 총리의 실질적인 임명권을 주는 프랑스식 이원집정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의 전제는 '중대선거구제 및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편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 대선거구제 도입에는 노무현 정부의 정략적인 구상이 엿보입니다. 즉,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도 있지만 2004년 총선에서의 압승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노무현 정권의 정치개혁은 "정도와 정략"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고 예상됩니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개혁은 이 두 가지 필요성 사이에서 진동할 개연성이 대단히 큽니다. 자칫하면 모든 개혁이 무산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총선 참패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노선의 이념정책적 기조는 과거 독일기민당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토니 블레어식 '제3의 길'을 결합시켜 놓은 스타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시장자유주의보다 진전된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요소가 강하게 결합된 노선입니다. 분배를 강조하지만 분명히 성장에 기반을 둔 분배를 지향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시장 유연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비정규직 양산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해고는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합니다.
다음으로 노 정부의 노동정책은 한마디로 개입주의적 노사관으로 이해됩니다. 사회적 파트너십 형성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노력을 강조합니다. 이 결과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위상 강화를 제기합니다. 이것은 결국 조직노동의 협력을 어떻게 얻어내느냐가 성패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 당선자가 너무도 쉽게 조직노동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이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인식이 나중에 큰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 정부의 대북, 대외정책을 보면 기본적으로 DJ정부의 정책노선을 계승해 갈 것으로 보입니다.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노무현 당선은 원치 않은 선거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한미관계에서 부시 행정부의 정책방향 설정이 정책 성패의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있어 한국측 요구를 전면 수용해서 대북 관계가 개선되는 것이 노정부 입장에서는 최선이고, 주한미군 전면 철수 혹은 휴전선 배치 미군 후방 이동은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거구 개편과 비례대표 비율 확대 필요
오 늘 발제의 마지막 부분은 노동운동의 대응입니다. 노동 부문에 대해서는 토론자에게 맡기고 저는 정치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치 부문에서는 무엇보다도 '정치개혁의 의제와 방향 확립'에 대한 관심이 시급합니다. 여기에는 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 국회법 등의 개정이 요구됩니다. 특히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2004년 4월 총선에 대비한 선거법 개정입니다. 선거구는 선거 실시 1년 전에 확정되어야 하므로 2003년 4월 이내로 확정하여야 합니다. 노 당선자는 중선거구제를 이야기하지만 확정된 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참여연대에서 의정감시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데 시민단체의 안은 '소선거구제 유지와 비례대표 50%' 유지입니다. 현역 국회의원의 반발이 예상되므로 국회의원 수를 지금보다 약 200석 늘리더라도 비례대표 50% 비율은 꼭 관철하고자 합니다.
만약 이같은 방향으로 선거구제가 확정된다면 민주노동당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때에 따라서는 독일의 녹색당처럼 정국의 캐스팅보트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은 선거구제 개편과 비례대표 비율 확대에 대비한 후보군 확보가 대단히 중요하게 제기됩니다.
토론자: 박준식
노동조합운동과 민주화: 떨어지는 연결 고리
20 세기의 후반부터 30여 년 동안 줄기차게 발전해 온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화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체에 민중성과 계급성을 그 속에 포함하는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정치, 법·제도, 경제, 작업장,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불가분의 연결 고리를 맺어 왔고, 이를 통해 마르지 않는 운동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와 더불어 진행된 노동운동의 과정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조직, 정체성, 문화, 제도 등을 건설하고, 이를 한국 사회 속에 뿌리내려 우리 사회의 불가결한 행위자로 제도화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제도화는 노동운동이 체제의 외부에서 내부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노동운동은 더 이상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비제도적 사회운동'이 아닌 제도권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제도적 사회운동'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체제의 일부분이 되어 가는 9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연결 고리는 점점 더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양자의 간극이 커지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조합이 다수 노동계급과 민중이 아닌 소수 노동자들의 '이익단체'로 변질되는 체제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10% 내외에 맴도는 상황에서 소수의 조직 노동자들의 이익은 강화되는 반면, 조직화되지 못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늘어가는 모순 속에서 제도적 노동조합운동이 그 본질에서 다수 노동자들의 사회적 이익을 대변하기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죠.
현재의 상태가 지속되면 노동조합운동과 국민 대중 사이의 심리·사회적 '거리감'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운동이 전체 민중과 근로 대중을 대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 조직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머물면서 작업장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확보한 제한된 작업장의 권리마저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못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노동조합운동은 더 이상 전체 시민·사회 운동의 중심부에서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대중의 마음에서도 사회운동이 아닌 '이익집단운동'으로 그 이미지가 변질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미 정규직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조직 노동운동의 경제적 기득권 확장 전략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들의 운동은 이제 기득권 세력의 운동과 구분되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죠.
노 동조합운동의 주체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돌파구를 도모하고 있지만, 병목과 같은 현실을 빠른 시일 내에 돌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난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활약이 국민 대중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 현실 정치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지지 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의 영역에서 확보된 권리와 민주화의 에너지가 정치를 통해 그 물꼬를 찾고, 국민 대중의 변화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열망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 그 가능성은 아직 '잠재력'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이 처한 사회·정치·조직적 딜레마의 핵심 부분으로 판단됩니다.
노동운동의 정체성: 사회적 시민권의 확장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노동운동을 통해 우리가 성취할 수 있었던 '정체성'의 성격에 대해 반추해 본 다음 앞으로 우리 노동운동이 어떠한 '자기 정체성'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7 년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노동운동을 통해 한국의 노동운동은 분명, 작업장 중심의 '조합적 정체성'을 제한된 수준에서 구성하는 데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소수의 대기업 작업장에 국한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러한 권리마저 구조조정 기간을 거치면서 상당한 부분 훼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작업장의 시민권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 시민권의 영역으로 줄기차게 확장시키고, 이를 제도적으로 안정화시킬 수 없었던 것에서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세기 민주화 기간 동안 노동운동은 여러 차례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노동운동의 정치적 입지를 찾기 위한 노력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제도와 정치의 영역에서 노동운동의 사회적 정체성은 확장될 수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이 그들의 사회적 권리를 김대중 정권의 기간 동안에도 제대로 확장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저항에 기본 원인이 있었겠지만, 명확한 비전과 전략적 마인드를 지니지 않았던 노동운동 진영 역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노 무현 정권의 등장은 노동의 정치·사회적 시민권을 확장하고, 이를 제도화할 수 있는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들의 요구와 권리를 무시할 수 없지만, 또한 그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에 의해 마련되는 유동적 노동 정치의 공간이 과거보다 훨씬 넓게 열릴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운동 진영은 이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노동운동 진영이 노무현 정권과 더불어 계속 열리는 민주화의 가변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노동운동의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고, 노동 대중의 사회적 권리를 제도화하며, 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은 조합적 정체성과 이익의 영역을 과감히 넘어서 노동의 권리와 정체성을 사회와 정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것, 즉 '사회적 시민권' 운동을 도모하는 것에 전략적 전망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사회적 시민권의 영역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은 더 이상 조직 노동자들만의 기득권 보호 운동이 아니라, 현재 그들이 확보한 물질적·제도적 이익과 지위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전체 사회의 성원들과 함께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 운동의 관점과 지향성을 통해 민주화 시대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소수의 조직화 된 대기업 노동자들의 운동에 국한되는 한 국민 대중이 동의하는 사회 발전 전망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합니다. 노동자들의 조합적 이익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리고 노동 대중 전체의 사회적 권리를 확장할 수 있다면, 때때로 그들의 단기적 이익을 과감히 포기하는 전략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략은 '단기적', '개별적' 합리성을 대체하는 '장기적', '집합적', '초월적' 합리성의 관점을 견지하고, 이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를 도모하기 위해 노동운동은 자체의 전략과 조직의 혁신을 지속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노동운동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장하면서 국민 대중과 더불어 사회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며, 민주화의 영역을 정치에서 경제와 사회로 확장시켜 나아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초월적 합리성을 견지할 수 있는 자체의 조직 혁신을 가속화시켜야 합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초월적 합리성의 구체적 형태는 곧 산업별 노동조합의 확고한 제도화와 노동운동의 통일이며, 더 나아가 민주화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그 과정을 감시하며, 제도 개혁을 주도하는 노동운동을 의미합니다.
참여와 타협의 가능성
노무현 정권의 탄생으로 노동운동 진영은 커다란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통해 탄생한 노무현 정부가 노동운동 진영의 요구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 가늠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노동운동이 노무현 정부에 어느 정도 수준에서 참여하면서, 사회적 타협의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으며, 상당한 부분 가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 진영은 가능한 모든 정부 기능과 정책 과정의 참여 영역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지향하는 것과 더불어 국민 참여를 지향하는 정권에 대해 더욱 높은 수준에서의 참여를 요구하는 참여적 노동운동의 지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참여를 통해 노동운동은 개별 노조운동 수준에서 이루어낼 수 없었던 정책과 제도의 제반 부문에서 그들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로는 어느 때 보다 크게 열려 있습니다.
다른 한편 노동운동은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과 자율성을 지키면서, 사회 진보와 발전을 위한 '사회적 대 타협'의 공간을 열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노사정의 사회적 타협은 노동시장이나 노사관계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정치 제도, 경제 체제, 그리고 사회 구조 등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 구성 방식을 염두에 두는 '역사적 대타협'의 구도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사회적 타협의 구도 속에는 '고용 유연성', '산별노조', '선거 제도', '노동 시장 제도', '재벌 개혁'과 같은 사회 구성의 핵심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노동운동은 지난 세기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한 노동 대중의 사회·정치적 시민권을 확장시키고, 이를 제도화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략은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탄압당해 온 약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한국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주체로 나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노동운동이 약자들의 운동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만들어가는 과정, 즉 계급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의 핵심 영역을 책임지는 사회적 주체로 그 역할을 자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