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인기 모바일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의 게임 상 업적인 ‘노동조합 파괴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마을을 건설하는 장인들이 모인 ‘장인의 집(union‧유니온)’을 일정 수 이상 파괴할 때 ‘노동조합 파괴자(union buster‧유니온 버스터)’라는 칭호와 보상을 얻는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
유니온을 ‘장인의 집’으로, 유니온 버스터는 ‘노동조합 파괴자’로 번역한 것은 노동조합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노동단체의 문제의식에는 십분 동의한다. 게임 속에는 노동조합이란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거나, 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무력하게 파괴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마을 건설에 필수적인 유니온을 애초부터 '노동조합'으로 번역하지 않은 점에 문제의 초점을 옮기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 현재 한국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처한 현실은 가혹하다. IMF의 구제금융 이후 불어닥친 ‘노동 유연화’의 바람은 우리나라의 노동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었다.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현실의 ‘노동조합 파괴자’들은 제도와 담론, 심지어 물리력을 동원해 노동조합을 와해시킨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재벌과 자본의 폭력을 뒤집어쓰고 있다.
『노동여지도: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박점규, 알마, 2015)는 노동이 서린 땅과 그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의 여정은 ‘삼성의 도시’ 수원을 시작으로 인천․평택․광주․안산․창원 등을 거쳐 ‘책의 도시’ 파주에서 마무리된다.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저자가 방문한 도시에 얽힌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 활동 중인 단체를 소개한 후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보고 겪은 시간과 사람들을 술회하는 방식이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창립대회가 열린 도시였으나, 현재는 삼성의 도시가 된 수원에서는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고(故)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고(故) 최종범 씨가 어린 딸을 두고 목숨을 끊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서막을 올린 울산은 ‘현대 왕국’이 되어 정규직과 하청업체 직원 간 거주 공간, 승용차 그리고 삶의 영역 전반마저 양분되어 있다. 1986년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던 부산 부두에서는 이제 정규직 밑에 하청노동자, 하청노동자 밑에 이주노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어디를 가도 삼성과 현대차, 대기업이 장악하지 않은 도시가 없었”다고 토로하듯, 노동여지도에서 보이는 노동의 토양은 대기업에 잠식되었다. 비정규직 문제와 사내하청 문제, 조직력과 동력이 사라져가는 노동조합, 자발적인 굴종을 선택한 노동자들…. 대기업이 노동의 토양을 점거하고 있는 것을 목도했을 이들의 한숨과 분노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노동여지도』에서는 희망을 발굴한다. 평택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함께 해고되고 함께 굴뚝에” 올랐다. 아산의 유성기업 노동조합은 ‘노조 파괴자’들의 ‘민주노조 살해’ 시도를 막아냈다. 청주에서는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노동자 자주관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운짱(운전수)’들이 운전하는 버스가 달린다. 군산에는 성과급 대신 후배들의 정규직 일자리를 만들어낸 자부심에 웃는 노동자들이 있다. 연대하고 투쟁하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 책의 제목이『재벌여지도』가 아니라『노동여지도』일 수 있는 이유다.
이처럼『노동여지도』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 시대 노동자들의 민낯이다. 대체적으로 절망스럽고 한숨과 진땀이 푹푹 나올 정도로 고되지만, 웃으며 연대하고 함께 밥을 먹고 땀 흘려 일하는 생명력 역시 분명히 공존한다. 저자는 뚝심 있게 이러한 노동자들의 민낯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연대와 희망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조심스럽게 이 땅의 ‘장그래’들에게 손을 내민다.
“2015년, 오늘 그린 이 땅의 노동여지도는 전국이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장그래와 함께 그려갈 10년 뒤의 노동여지도는 ‘비 온 뒤 맑음’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저자가『노동여지도』를 그리며 반복해서 보여준 대안과 희망이 압축적으로 보인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손을 잡는 ‘연대’다. 『노동여지도』를 덮으며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이 오기를, 척박해진 땅이 변하기를 희망한다. 비 온 뒤 맑을 날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