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늙어가고 있다. 2000년 65살 고령인구 비율이 7.3%를 기록해 ‘고령화 사회’의 일반적 기준인 7%를 넘어선 데 이어, ‘고령 사회’의 기준인 14%를 향해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026년에는 고령인구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는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것이다. 고령인구 비율이 7%에서 20%로 증가하는 데 걸린 기간을 국가별로 비교해보면 프랑스는 156년, 영국 92년, 미국 86년, 독일 80년, 일본이 36년이 소요된 반면 우리나라는 불과 26년에 불과하다.
이렇게 고령사회가 되면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반면, 부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급속히 증가한다. 부모 부양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들의 사고를 감안하고, 선진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사회 안전망까지 고려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2026년 우리 노동자들은 조부모, 부모, 자녀, 이렇게 세 세대를 먹여 살려야 할지 모른다. ‘성장의 신화’가 지속되기는커녕 ‘세대간 갈등’을 넘어 ‘세대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음울한 시나리오도 나온다. 이런 추세를 어떻게 봐야 할까?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고민하는 것조차 미뤄둘 수는 없다.
노동자가 아이를 안 낳는 진짜 이유
이런 고령사회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길어진 수명과 출산율 감소를 꼽는 게 일반적이다.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수명이 계속 길어져 현재 남녀 평균 연령은 76세에 달한다. 어느 새 환갑을 기념하는 것은 쑥스럽게 돼 버렸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도 65세를 기준으로 은퇴나 노동력 상실 여부를 가늠한다. 출산율 감소는 좀더 극적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임 기간(15~49세) 동안 낳는 자녀수는 1960년대 평균 6.0명에서 2001년에는 평균 1.3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002년에는 출산율이 사상 최저이자 세계 최저인 1.17명으로 집계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런 수치에 겁을 집어먹은 탓인지 최근 정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눈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이 나온다. 셋째 아이를 낳을 경우 입원비 감면 차원을 넘어 출산·양육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안도 그 중 하나이다. 길어지는 수명을 어쩔 수 없으니, 아이라도 많이 낳아서 고령사회의 충격을 완화해 보겠다는 논리다. 정부 정책 입안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대책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판단이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단순히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집약돼 ‘아이 안 낳는 사회’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주거 문제와 교육 문제를 꼽을 수 있겠다. 내 집 마련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워 부부가 돈 버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 둘째, 셋째를 낳는 것은 큰 결심이 따르지 않고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감수해야 할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감안하면, 또 그 교육을 통해 아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복권에 당첨되는 것만큼 어려운 현실에서 선뜻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여기에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중장기적인 경제적 안정을 꾀하는 게 극도로 불안한 노동자의 현실도 겹친다. 여성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더 심해서, 아이를 낳을 경우 그나마 불안정한 일자리마저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주거, 교육, 노동 문제가 집약돼 나타난 결과가 바로 ‘저출산 사회’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출산 장려 정책은 실효성이 없는 게 당연하다.
출산 장려가 해법인가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지만 과연 이런 식의 출산 장려 정책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좁은 땅에 5천만이든 6천만이든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논리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한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장의 밑바탕에 노동자의 헌신이 깔려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동자의 기여를 평가하는데 인색한 주류 경제학자들도 노동인구의 증가와 그들의 저축 또 이를 적극적으로 기업 투자에 연결시킨 정부의 금융 정책이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데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 없다. 심지어 미국의 한 경제학자는 “저임금을 감수한 한국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야말로 한국 경제 성장의 비밀”이라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고령사회는 이런 노동자들이 늙고, 다음 세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점에서 이런 ‘경제성장신화의 붕괴’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한 주간지가 전 세계 111개국을 대상으로 ‘2005년에 가장 살기좋은 나라’를 조사한 결과, 아일랜드가 1위를 차지했다. 아일랜드는 최근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성공한 ‘강소국’으로 평가받으면서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울 점들을 찾고자 노력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나는 다른 것보다 우리나라와 거의 같은 면적인 아일랜드에 불과 4백만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편적인 자료에 의존한 것이지만 아일랜드가 유럽의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채 10년 남짓한 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아시아의 후진국에서 신흥 선진국 소리를 듣게 된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30년에 불과하다. 새삼 아일랜드 얘기를 꺼낸 것은 이제 우리도 지난 30~40년간 지속돼 왔던 경제 성장의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될 때가 아닌가라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서 ‘제조업 무용론’과 같은 무책임한 얘기를 끄집어내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도 다음 세대에 우리나라가 가져야 할 산업구조와 경제체제는 어떤 것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고, 그런 고민에는 고령사회 더 나아가 인구가 지금 수준보다 감소하는 것까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인구를 사실상 우리나라의 생태 수용 능력이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도 깔려 있다. 이미 좁은 한반도가 수용하기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많다. 그 대가를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치르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더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최근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읽은 미국의 한 기자가 쓴 고령사회에 대한 음울한 보고서의 끝 부분에는 ‘고령사회에 대비하는 개인별 지침’이라는 것이 나와 있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고령사회는 결코 당신의 건강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건강이야말로 고령사회에 대비하는 가장 유용한 재산이다”라는 부분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의 환경은 건강한 사람도 병들게 하는 구조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이 늙으면 늙어갈수록 ‘환경의 역습’으로 인한 각종 질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 전체적으로 고령사회에 대비하는 지침이 될 수 있겠다. 생태 수용 능력에 맞게끔 인구가 감소하는 것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사회의 틀을 바꾸자
사회는 늙고 있는데 인구 감소까지 감수하라니, 너무 대책 없는 얘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나 기업에서 내놓는 대안이라는 게 고작 아이를 더 낳고, 경제력이 있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실버마켓’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연금은 믿을 수 없으니 민간연금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것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도대체 현실적인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같이 실효성도 없고, 결국 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대책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의 틀을 바꾸는 작업일 것이다. 일단 주거 문제, 교육 문제, 노동 문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긴박하게 나서야 한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고령사회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회를 대비하는 선결과제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안전망’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것은 ‘실버마켓’에 대한 대응보다 고령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훨씬 현실적이다. 실제로 공공의료체계가 잘 짜인 캐나다의 경우에는 병원 내 공공의료서비스 인력의 상당 부분을 연금으로 생활하는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로 충당하고 있고, 그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 더 짜임새 있는 체계를 가진 복지국가가 될수록 육아, 교육, 사회복지, 보건의료, 환경 등 공공서비스 분야의 수요가 늘어날 테고 평생에 걸쳐 축적된 노인의 경험과 지혜는 젊은 세대보다 그런 분야에 훨씬 더 적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지적했듯이 더 이상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는데 급급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생태 수용 능력이 감당할 만한 적정 수준의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젊은 세대가 꼭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부족한 젊은 세대의 숫자는 앞으로 더욱더 교류가 활발해질 북한이나 동아시아의 젊은이들로 충당하면 된다. 우리나라 역시 여러 가지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모자이크 문화’를 더 이상 기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것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우리 노동자 일반이 갖는 차별과 편견을 없애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세대간 전쟁’을 막기 위해서
국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의 한 작가는 「황혼의 반란」이란 단편에서 있을 법한 ‘세대간 전쟁’을 실감나게 보여준 적이 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고려장’시키는 프랑스의 가까운 미래를 묘사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 노인 반란군의 지도자는 20세 미만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토벌군에게 붙잡히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노동자는 고령사회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는 이미 다음 세대에게 부양을 구걸하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지금 노동조합은 고령사회에 대한 우리 나름의 대안을 만드는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2004년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같이 한번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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