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난 이후 감동까지 느낄 수 있다면 더 좋다. 때문에 연출가는 어떻게 하면 극장을 찾아오는 관객이 웃고, 울고, 재미있어 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잘 아는 연출가는 극의 얼개를 구성하는 초기단계부터 흥행요소를 곳곳에 삽입하려 애를 쓴다. 반면, 그런 연극에서는 애초에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사라지기 쉽다. 그런데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한씨연대기>는 이러한 상식을 깨뜨리고 있다.
지난 1월8일 연극<한씨연대기>(Years Mr. Han)가 막이 올랐다. <한씨연대기>는 한국 전쟁 전후의 상황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 지식인이 역사와 개인의 의지 사이에서 겪게 되는 시련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연극의 주된 관객층은 20대 여성이거나 대학생들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에게 분단 현실을 다룬 이 작품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분단 현실에 두동강 난 개인의 삶
어떤 이는 연극<한씨연대기>의 재미를, “코미디가 자아내는 계산된 웃음과 성격이 다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가슴 저림과 흐뭇함,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애정에서 배어 나오는 진지한 감동에서 오는 재미”라고 평가했다. 과연 그럴까?
<한씨연대기> 내용은 이렇다. 김일성대학교 의학부 교수 한영덕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인텔리라는 이유로 인민병원 특별 병동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영덕은 동료 교수 서학준이 남한으로 탈출하자 도피방조와 당성 부족(당의 명령 위반,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의 죄목으로 고발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처형장에서 확인사살을 하지 않은 인민군의 실수로 한영덕은 기적처럼 살아난다. 그 뒤 한영덕은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가던 도중, 늙은 노모의 병환으로 부인과 아들을 북에 둔 채 홀로 월남한다. 남한에서 한영덕은 생계를 위해 무면허 의사 박가와 동업을 시작하고, 다방마담 윤미경과 재혼을 하여 서울에 정착한다. 그러나 박가와의 동업 과정에서 불법 낙태수술을 거부하고 병원을 그만 둔다. 그 후 불법영업이 적발되자, 무면허 의사 박가는 한영덕이 불법영업을 고발한 것으로 오해하고 과거를 숨기고 부산 시립병원에 취직한 한영덕을 공안당국에 간첩혐의로 고발한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한영덕은 다행히 군의관이었던 친구 서학준의 도움으로 간첩혐의에 관해서 무죄 처리되고, 의료법 위반죄로 1년형만을 선고받는다. 한영덕은 감옥에서 나오게 되지만 암울했던 기억에서 탈피하고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장의사 무리 속에서 염사(염을 하는 사람) 노릇을 하다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브레히트 효과와 배우들의 풋풋한 연기
<한씨연대기>는 극초반, 한국전쟁 전후 세계사적 맥락(포츠담, 얄타회담 등)을 관객들에게 이야기한다. 자칫 잘못하면 지루한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될 수도 있는 이 내용을 관객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점이 연출가 김민석에게 ‘브레히트의 한국적 수용’이란 좋은 평가를 받게 했다. 기존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 때 연출가들은 스토리 중심의 전개방식을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관객은 이 과정에서 연출가의 의도대로 이끌려가면서 극 자체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관객은 연극에서 소외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관객은 극을 평가하고 소화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한다. 그런데 브레히트의 기법은 이러한 관객 대상화의 문제를 탈피하고 있다.
브레히트 기법의 효과는 관객들이 극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낯선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극의 전개과정에서 연출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요한 사건이나 주제를 등장 인물들의 대사처리 방식이 아닌 무대 소품을 사용하여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스크린을 이용하거나 현수막 혹은 피켓 등을 중요한 소품으로 이용해서 연출가의 의도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한씨연대기>는 이러한 브레히트 서사극의 다양한 연출기법을 통해 역사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연출가의 의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극양식일 수 있지만, 소극장 공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배우들의 ‘역할 바꾸기’(1인 다역)는 단지 다섯 배우들만의 노력으로도 완성도 높은 극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한씨연대기>에서 한영덕 역의 강신일과 서학준 역의 이대진 이 두 배우의 연기력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피난민 신세가 된 풀뿌리 인생들의 투박하면서 진솔한 대화를 연기하는 모습은 정말 일품이다.
웃음과 재미 그리고 눈물
<한씨연대기>는 한국 사회의 분단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존엄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상실되어 가는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때문에 <한씨연대기>는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서사적 기법과 객관적 서술로 아름답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이 연극의 주요 관객층인 20대 젊은이들도 이 연극을 보고 작가의 감수성과 사회의식이 행복하게 결합된 작품으로 느낄 수 있을까? 연극 공연이 있던 날 나는 관객들에게서 웃음과 재미, 감동의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지만 눈물은 볼 수 없었다.
1985년에 이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연극적 상황과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1991년과 2004년 다시 연출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난 시절의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여간 이 작품은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삶 속에 투영하여 어두운 과거를 잘 포착한 작품임엔 틀림없다.
나는 연극열전의 다음 작품으로 ‘극단 76단’의 <관객모독>을 선택했다. 이 작품들에서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 <한씨연대기>는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상연작 중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을 모아 진행되는 <연극열전>(2004.1~12, 총 15개 작품)의 첫 관극으로 오는 2월29일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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