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과 제3당 건설운동

노동사회

미국 대선과 제3당 건설운동

admin 0 4,225 2013.05.12 05:10
 

jsyoon_01.jpg2004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는 지난 2000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투표일 직전까지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선거였다.

이번 선거만큼 미국의 대선이 온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적도 없었다.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지는 전적으로 미국 유권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었지만,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부시가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바란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노골적인 지지발언이 있었고 존 하워드 호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은근한 부시 지지 의사표명이 이어졌다. 다른 한 편에서는 영국의 일간 『가디언』이 케리 지지 캠페인을 벌였는가 하면 전세계적인 부시 낙선운동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 나라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의 문제가 각국의 이해관계와 지구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대선에서 사분오열하는 미국 진보진영

최근 들어 미국정치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층이 가장 첨예한 양분구도를 형성해왔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치러진 세 번의 하원의원 선거와 한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1∼2%에 불과했고, 양당의 등록된 당원 수도 거의 동일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승자독식을 가능하게 하는 미국 선거제도는 '단순다수 대표제(first-past-the-post system)'가 사표(wasted votes)를 꺼려하는 유권자들을 움직여 양당제를 고착화시킨다는 '뒤베르제의 법칙'을 점점 더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녹색당의 랠프 네이더 후보가 2백90만표(2.74%)를 획득한 지난 2000년 대선은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제3당 운동의 희망을 발견한 계기였다. 네이더의 득표율은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유진 뎁스 사회당 후보가 옥중 출마한 1920년 대선에서 91만여 표(3.4%)를 얻은 이래 미국의 진보진영이 얻은 최고의 득표율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제3당 운동은 1948년과 1968년 두 차례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인 바 있다. 1948년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농무성, 상무성 장관을 역임하고 부통령까지 지낸 헨리 월러스가, 민주당이 지명한 대통령 후보인 해리 트루먼의 대외정책에 반기를 들고 진보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했다. 노동당과 공산당 등의 지지를 받은 월러스 후보는, 그러나 2.4% 득표에 그쳤다.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한참이던 1967년 미국의 좌파진영을 중심으로 창당된 '평화와 자유당'은 이듬해 선거에서 흑표범당의 창립자이자 저명한 흑인운동 지도자인 엘드리지 클리버를 후보로 내세우며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평화와 자유당'은 3만7천표를 거두는 데 그치고 지역정당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 후 한동안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국의 제3당 운동은 지난 2000년 대선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여줬다. 처음으로 출마한 1996년 대선에서 0.71%의 저조한 득표에 그쳤던 녹색당의 네이더 후보가 2000년 대선에서 2.74%를 얻는 선전을 보여준 것이다. 선거 이후 미국의 진보진영은 녹색당의 성과를 이어나가는 한편,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문제점을 보여준 미국의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대선의 성과는 이어지지 못했다. 양당간 팽팽한 접전이 펼쳐진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국내 진보진영이 중심축을 잃고 사분오열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로 출마했던 네이더는 이번에 자신의 지명도에 기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무명의 데이비드 콥을 출마시킨 녹색당 내에서는 케리 지지, 네이더 지지, 콥 지지 등 세 갈래의 선거운동이 펼쳐졌다. 지난 선거에서 녹색당 네이더 후보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부시의 재선을 막자며 무소속의 네이더 후보도, 녹색당의 콥 후보도 아닌 민주당의 케리 후보에 투표했다.

'명망가' 네이더의 몰락

2000년 대선 당시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훼방꾼"(spoiler)이라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았던 랠프 네이더가 올해 대선에 다시 출마할 것인지 여부는 오래 전부터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지난해 민주당 예비주자들이 속속 출마를 선언할 때도 네이더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며 여러 모로 저울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녹색당 내에서 그를 추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을 때도 그는 출마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출마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2003년 말을 넘긴 올해 2월에서야 그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녹색당이 전당대회를 너무 늦게 개최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녹색당이 네이더에게 대선후보를 확정지을 전당대회 개최일정을 상의하러 왔을 때 그가 녹색당이 제시한 3가지 일정 가운데 가장 늦은 6월말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네이더의 해명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2000년에도 녹색당은 6월말에 전당대회를 열어 그를 대선후보로 추대한 전례가 있었다.

민주당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출마여부에 대해 아무런 의사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지난해 7월 "민주당이 데니스 쿠시니치와 같은 진정한 개혁주의자(progressive)를 지명한다면 녹색당이 선거에 나설 필요성은 감소될 것"이라며 민주당 당원들에게 예비선거에서 당내 좌파인 쿠시니치 후보를 찍을 것을 권고하고 나섰다. 또 무소속 출마의사를 밝힌 후에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케리 후보와 만난 후 그에 대해 "대통령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존 에드워즈 후보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네이더는 무소속 출마를 결정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녹색당에 독자후보를 출마시키지 말고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녹색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녹색당 당내경선에 출마한 피터 카메조 후보를 전격적으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는 '깜짝이벤트'를 펼치며 막판까지 녹색당의 후보 추대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네이더는 녹색당 당원들뿐 아니라 부시에 대해 불만을 품은 공화당원들, 한때 돌풍을 일으켰다 지금은 사멸해 가는 개혁당의 잔류 당원들(이들은 로스 페로, 패트릭 뷰캐넌 등 과거 대선에 출마한 억만장자 후보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흑인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다가 뷰캐넌 지지로 돌아선 기회주의적 인물들을 규합하는 데 힘을 쏟았다.

네이더가 무소속 출마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녹색당을 훨씬 능가하는 자신의 지명도 때문이었다. '소비자 운동의 대부'로 불려온 명망가인데다 두 번의 출마로 상당한 지명도를 갖춘 그로서는 더 이상 녹색당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는 녹색당 활동가 출신도 아니었고 녹색당 지도부의 역할도 수행한 적도 없었다. 그에게 녹색당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카드'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네이더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점차 사그라졌다.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1% 내외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가 2000년 대선 때 득표를 능가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미국의 제3당 운동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 선거에서 네이더를 지지한 저명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에는 케리 후보 지지로 돌아섰다. 그 가운데는 영화배우 팀 로빈스·수잔 서랜든 부부를 비롯해 비판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빈곤의 경제』의 저자인 바바라 에렌라이히, 컨트리 가수 보니 레이트,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짐 하이타워 등이 포함돼 있다.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 좌파 역사학자 하워드 진도 이 대열에 섰다.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 이들은 4년 전 네이더를 지지했던 다른 70여명의 각계 인사들과 함께 10개 '격전주'(swing state)에서 발행되는 독립매체에 케리 지지를 호소하는 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의 타깃은 물론, '여전히' 네이더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광고에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 노엄 촘스키의 이름도 올라있었다. 촘스키는 "격전주에서 네이더에 투표하는 것은 부시에게 투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케리 지지를 호소해왔다.

네이더를 지지했던 이들이 이처럼 케리 지지로 돌아선 것은 무엇보다 부시의 재선을 막는 것이 2004년 대선을 맞이하는 미국 진보진영의 사활적 과제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케리 후보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락을 결정지을 격전주에서는 케리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네이더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후 독자후보 선출이냐, 네이더 지지냐를 놓고 당내 논란이 거듭된 녹색당은 결국 6월말 전당대회에서 무명의 변호사 데이비드 콥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콥 후보와 당내 경선에서 맞붙었던 피터 카메조 후보가 네이더와 짝을 이뤄 나가고, 1996년과 2000년 대선에서 네이더와 함께 짝을 이뤘던 위노나 라두크가 케리 후보를 인준하는 등 대선을 앞두고 당내에서 혼란이 거듭됐다. 부시와 케리는 차치하고라도 네이더와도 지명도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콥 후보는 상당수의 당원들이 네이더를 지지하거나, 케리를 지지하거나 아니면 지역선거에 집중하는 바람에 더욱 힘겨운 선거운동을 펼쳐야 했다.

이로써 2000년 대선의 탄력을 이어나가지 못한 미국의 제3당 운동은 역사 속에서 명멸해간 제3당 운동과 마찬가지로 '반짝하는 성공'에 머무른 채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선거결과만 놓고 봐서는 그렇다. 하지만 명망가 후보 없이 고군분투한 녹색당이 미국내 좌파진영과 손을 잡고 진정한 진보정당으로 거듭날 계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선거결과와 관계없이 심각하게 훼손된 미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는 진보진영의 활기찬 움직임은 2000년대 초반의 제3당 운동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판 비판적 지지의 망령과 싸워나가는 이들의 활약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