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2월에 나온 서태지의 7집은 발매를 시작한지 5일 만에 34만장이 팔렸고 비공식 집계로는 64만장이 팔려 음반업계의 장기불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본명이 정현철인 서태지는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9년 헤비메틀 그룹 ‘시나위’에 들어가 베이시스트로 음악계에 데뷔했고 이 과정에서 음악을 위해 학교를 포기하는 용기를 보였다.
연주자로 활동하던 그는 1991년에 스포츠만화 주인공 같은 독특한 예명을 지은 후 댄서 두 사람을 영입해 만든 첫 앨범으로 기적 같은 성공을 일궈낸다.
그의 첫 앨범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분노와 백인 주류사회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담은 게토의 거리음악 ‘랩’을 한국의 십대와 이십대 초반이 느끼던 갑갑하고 억압된 정서에 맞게 변용한 것으로 말 그대로 대중음악계에 ‘혁명’을 몰고 왔다. 가수 조영남은 자신이 60년대에 처음 서구(팝)적인 노래로 성공하던 시절의 인기를 “내가 옛날에 태지 끗발하고 같은 끗발로 날렸다”고 표현을 하기도 했다.
끗발 날렸던 ‘서태지’
이런 정현철의 선택에는 ‘락’으로는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하기가 힘들고 댄스음악이라면 십대를 상대로 흥행에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1992년 1집 앨범부터 1995년까지 계속해서 앨범을 내면서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컴백홈> 등의 노래를 통해 젊은층의 절대적인 인기와 지지를 누렸기 때문에 그는 ‘10대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기대했던 일본 진출이 생각만큼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댄스음악과 반항적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차용한 무수한 댄스팀(이들은 도저히 가수로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1996년 1월19일, 갑작스런 은퇴선언으로 다시 한번 그는 대중가요계를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에 그의 행보가 자신이 일궈낸 기적과 전설을 퇴색시키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점이다.
한 밴드는 <은퇴선언>이라는 곡으로 그의 은퇴가 ‘재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풍자적인 노래를 했고 그의 팬들은 그를 옹호하며 그런 곡을 만든 밴드에 대해 비판을 계속 했지만 결국 그는 전설로 남는 명예보다 경제적 음반판매 수익이라는 실익이 있는 잦은 ‘재기’의 길을 택했다. 그가 다시 음악계로 돌아오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처음 데뷔하면서 락커에서 댄스가수로 세상과 타협을 했었다는 사실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무리하게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계약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음반이라는 성격이 강한 한 앨범을 테이크1, 테이크2, 테이크3 … 하는 식으로 내는 대중가요 가수로는 다소 불성실한 모습도 보였고 결국 강한 비트의 락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락커’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설정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의 팬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문제는 대중이 그의 락 음악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열광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음악’은 없고, ‘서빠’만 남아
음악이 아닌 신비화 된 개인에 대한 이런 열광은 시간이 갈수록 한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팬은 숫자가 한정된 가운데 점차 줄고 있고, 21세기의 새로운 세대는 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의 입국이 주던 요란함의 정도가 갈수록 약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시대도 막이 내리고 있는 듯하다.
이제 그는 음악계를 주도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는 인물이 되기보다는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는 것이 하나의 단순한 ‘연례적인 이벤트’로 변한 한물간 가수가 되고 있다. 특히, 그의 지난번 6집 발매 때만 해도 그의 공연과 새로운 음반은 대중들의 큰 관심거리였고 그는 ‘신비주의’ 마케팅을 통해 언론을 마음껏 조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입국하면서 입은 옷만으로도 언론은 하나의 기사를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7집 앨범을 낸 후 자신에 대한 인기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 정현철은 이제 홍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장사꾼 같은 모습이 됐다.
여기저기 TV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부터 예정이 된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락을 동경했지만 첫 앨범을 내면서 대중과 타협을 했고 이제 다시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음악으로 돌아왔다고 하겠지만 그는 이미 음악이 아닌 그의 이미지나 외형에 열광하는 팬들로 둘러 싸여서 음악이 아닌 그의 모습과 행동에만 관심을 보이는 팬 속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본명 정현철로 ‘서태지’라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예명을 지녔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에는 성공을 했지만 집권에는 실패한 영웅 같은 모습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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