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운동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도 기업경영을 하는 사용자들에게도 모두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구제금융 이후 기업과 노사관계를 둘러싼 환경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노사관계를 기업 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사용자의 지배구조와 자본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대면하고 있는 사용자의 책임범위와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기업 및 경제활동이 재벌과 정부 일변도로 진행되어 오다 IMF구제금융을 전후해 해외자본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시장경제가 부분적으로 활성화되고 이른바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규제의 공백상태'가 발생한데에 기인한다. 여러 시민단체가 부분적으로 이러한 공백을 메워 왔지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이다. 보다 본격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화되고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새롭게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기업에겐 네 가지 책임이 있다
이 글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위하여 노동조합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노동운동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성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기업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다. 이윤추구가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기업은 이윤추구와 함께 사회에서 기대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 입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이 분야의 원로학자인 캐롤(Carrol)은 경제적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책임을 첫 번째로 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법률을 준수해야 하는 책임, 윤리적 책임, 그리고 자선적 책임 등을 더하여 네 가지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주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주주중심의 자본주의가 핵심으로 작용하는 미국에서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주주에게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줄 수 있도록 이윤추구활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상대적으로 이해관계자 중심의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유럽국가들의 경우에는 비교적 오래 전부터 주주 외에 종업원이나 채권기관, 소비자 등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IMF구제금융 이후 물밀 듯이 해외금융자본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시장원리에 입각한 구조조정을 비롯하여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강요되어 왔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틀 속에서 한국경제의 변화는 시장윤리에 기반한, 이른바 '구조조정 모델'에 입각하여 진행되어 왔다. 구조조정의 논리는 탈규제, 탈집중화, 노동의 유연화, 소득경감, 긴축재정 정책을 동반하며 기업의 경제행위에 대한 제약과 장애의 제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구조조정 논리의 핵심은 자원의 할당과 경제적 결과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노동시장도 다른 상품시장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노동의 유연성이 경쟁적 시장에서 이상형태로 취급되며 이를 저해하는 제도와 행위는 유연화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러한 구조조정의 논리는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어왔던 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축소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기업활동은 시장원리에만 적합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양태로 전개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조정 모델의 폐해와 비용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적 조정모델'이 대두되었다. 사회적 조정모델은 기업활동과 경제의 사회적 측면을 중시하고 시장에서 생성된 독점자본 혹은 재벌들에 대한 제도적 간섭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비롯한 개인의 가치는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그 자체를 정당한 목적으로 간주한다. 사회적 조정 모델의 이론적 기초는 제도주의이론에 있으며 시장원리 대신에 제도 및 개인의 합리성이 강조된다.
사회적 조정모델에 입각하여 살펴본다면 기업 활동은 사회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감시받고 규제받는 조정과정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규제와 제어가 효과적으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봤을 때, 이제는 노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의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소수의 목소리를 내며 사회적 조정논리를 전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기업 안의 건강한 감시자 노동조합
노동조합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구호나 현수막에서는 '기업의 주인'이라고까지 언급되는 노동자의 대표기관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로서, 혹은 주인으로서 노동조합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실천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기업경영을 감시하거나 의사결정에 참가하는 것은 더 이상 '개량주의적'이거나 '타협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아니 이를 하지 않으면 거대 권력체인 기업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변화된 주객관적인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의 역사와 활동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노동조합활동 방식이 과거와 달라져야함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기업경영을 감시하는 메커니즘은 경영참여에 의해 노조 단독으로 할 수도 있고, 감시의 어려움, 비교판정의 문제 때문에 외부 단체와 연계하여 진행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업경영의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에 노동조합 단독은 사실 쉽지 않다. 외부의 전문성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는 기업의 산출물을 직접 생산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면서 기업의 이해관계자이기도 하다. 즉, 산출물을 생산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 노동의 대가에 대해서는 객체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노동조합운동의 외연을 기업의 사회책임 실천 감시운동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외연을 확대하자는 논의는 역으로 노동운동의 한계를 짚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노동운동의 한계란 노동운동만으로는 풀 수 없는 너무나 큰 사회적 모순과 자본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노동조합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국민적 정서가 과거와 다른 것도 사실이다.
사실상 국민적 정서는 대기업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경제를 일으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기업들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거나 사업에 진출하며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소식은 드물고 대형파업이 일어났다거나, 불법도급을 한다거나 외국에 공장을 만든다는 소식만 많이 듣게 된다. 일부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있고, 이 회사의 노동조합은 과욕을 부리고 있다는 정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대기업의 노동조합이 이러한 비판적 사회분위기를 인식해서인지 비정규직 차별철폐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하청기업 지원 등을 위한 사회발전공헌기금을 만들고, 공장의 해외 이전에 제동을 거는 등 새로운 요구를 하고 있다. 이제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이러한 노력들이 구체적인 사회적 책임의 영역으로 방향을 잡아 실천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둘째로 노조에게는 각각의 전문성을 가진 외부단체와 연대를 통하여 사회적 책임 실천 및 기업감시의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노조의 전문성에 한계가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네트워크가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조의 기업감시 메커니즘은 감시의 기준, 감시방법, 감시자의 역할 등 다양한 전문성이 결합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생각컨대 기업의 성과는 결과물로만 파악할 수 없으며 결과물이 도출되는 과정에 대한 감시와 사회적 규제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노동조합은 기업내부에서 건전한 시민의 역할을 하며 기업정보의 공개를 촉구해야 한다. 투명한 기업, 투명한 노동조합을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내부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무엇을 누가 어떻게 수행하는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실천을 위해서 노동조합이 해야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된다.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영역 혹은 기준을 '무엇으로(What)' 설정할 것인가, 사회적 책임실천과 감시를 '어떤 방법(How)'으로 수행하는가, '누가(Who)'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가의 세 가지 문제이다.
첫째, 기업의 사회적 책임영역은 노사관계부터 지배구조를 비롯하여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산업이나 기업이 특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특수성을 반영한 지표가 개발되어야 한다. 예컨대 건설업종은 환경이나 산재에 특화된 사회책임영역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보고서를 최초로 법제화한 프랑스 Bilan Social의 지표는 ①고용 ②임금 ③산업안전보건 ④기타근로조건 ⑤교육훈련 ⑥노사관계 ⑦기타기업 관련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가 발표한 지속가능성 보고가이드라인은 다음 [표]와 같이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성과를 포괄하는 사회보고 시스템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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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의 지속가능지표의 구분
경제적 성과 :
고객(순매출, 시장의 국가별 내역), 공급자(모든 재화, 자재 및 외부구입서비스 비용, 계약된 기간 내에 지불된 계약 비율), 종업원(국가 또는 지역별 임금과 복리후생비 총액), 자본제공자(모든 채무의 채권자별 내역, 기말 보유이익의 증가/감소), 공공부문(국가별 세액총액, 국가별 또는 지역별로 받은 교부금, 지역사회, 시민사회 등에 대한 기부금) 등
환경적 성과:
재료, 에너지, 물, 생물다양성, 배기, 폐수, 폐기물, 공급자, 제품과 서비스 준수, 수송전반 등에 대한 각각의 세부지표
사회적 성과 :
노동현실과 온당한 작업(고용, 노사관계, 산업안전보건, 교육훈련, 고용평등) 인권(전략과 관리, 차별대책, 노조결성의 자유, 아동노동, 강제노동, 고충처리규정, 안전보장, 토착주민 권리) 사회(지역사회, 뇌물수수와 부패, 정치적 기여, 공정경쟁 및 독과점방지) 제조물 책임(고객의 안전보건, 제품과 서비스광고, 프라이버시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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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과거에는 주로 시민단체가 언론을 활용하여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의 실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회성 시도는 한계가 분명한 것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사회적 책임 실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기업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간에는 사실 외부의 시민단체들이 애걸 조로 정보공개를 구걸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노동조합이 개입되면 노동운동의 일환으로서 정보공개운동을 비롯하여 '투명한 기업만들기'에 앞장서면서 지속적으로 기업정보의 공개 요구를 통한 감시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정보공개가 이루어지고 사회보고서의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투명한 기업으로 나아간다면 노동조합은 동반자로서 경영참가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그야말로 유럽이나 북구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조합 운동'이 아닌 '노동조합의 사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누가 총대를 매고 기업감시와 기업의 사회적 실천을 촉구하는가의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시민단체 내에서도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개격파식으로 사업이 이루어져 왔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및 각 유관단체의 협력 및 연대는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일만은 아니다. 사업전개 방식이 이제는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 필요
시민운동에서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 관점은 계급적 관점이 아니라 시민사회적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여야 노동조합이 여성, 환경, 교육, 의료, 주거, 인권 등 총체적으로 사회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은 노동자도 시민의 일부이기에 노동운동이 당연히 시민운동의 일부로써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노동운동이 가지는 계급적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노동운동을 시민운동의 한 부분으로 위치 지우고자 한다.
한편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시민운동이 원칙적으로 탈계급적 이해에서 출발한 것으로 시민운동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그에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시민운동을 자본주의 모순이 사회적으로 확대된 결과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즉, 노동과 자본사이의 모순이 기존의 노사관계 영역을 넘어서 전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 결과가 시민운동을 필연적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관점은 서로 얽혀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떠한 조합이나 단체를 보더라도 더불어 사업하기에 힘들 정도로 큰 입장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서로가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불필요한 논쟁 때문이거나 공동사업의 경험부재 등이 그 이유인 듯하다. 시민운동은 노동운동에게 계급적, 이기적 또는 급진, 분파적이라는 혐의를 씌우고, 노동운동은 시민운동에게 쁘띠부르주아적, 개량주의적이라는 혐의를 두고 있다.
노동운동은 노동의 중심성만을 주장하지 말고 시민운동은 노동운동이 제기하는 계급성에 일차원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운동이 갖는 독자적 성격이나 고유 영역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 문제해결 위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는 신뢰의 문제로서 양 운동이 공동으로 풀 수 있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이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상호가 공동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찾아내고 이에 대한 역할분담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기업감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 일회적인 사업이 아닌 지속적인 연대가 가능한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환경운동은 결과에 대한 통제밖에 할 수 없으나 노동조합은 제품원료의 해악성을 검토할 수도 있고, 제조과정에서 환경적 건전성을 담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업별, 기업별로 수많은 이슈들이 제기되면서 시민단체의 결과통제와 연구, 노동조합의 내부통제와 정보제공 압력 등이 장기적으로 결합하면. 효과적인 기업감시와 노조의 역량강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