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노동사회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admin 0 4,274 2013.05.12 05:27

 


book%20%282%29_0.jpg이총각, 최순영, 박순희, 이철순, 정향자. 모두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나 어느새 쉰 줄에 접어든 중년 여성들이다. 2004년 현재, 이들의 이름 뒤에는 무슨무슨 지도위원, 이사, (부)대표니 하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들에게 그런 꼬리표, 직함을 맡긴 곳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전태일기념사업회, 한국자활후견인협회 등 대한민국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굵직한 조직들이다. 그러므로 그 직함이 갖는, 혹은 주는 무게는 대단할 터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진정으로 깊은 울림을 갖는 호칭은 따로 있다. “언니이…!” 이십여년 전 동일방직에서, YH무역에서, 원풍모방에서, 대동화학과 유림통상에서, 전남제사에서, 스물도 안 된 어린 ‘공순이’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당당하고 넓고 깊은 이들을 동경하며, 반짝이는 눈망울로 조심스럽게 꺼내놓았을 그 섬세한 떨림 말이다. 그것이 삶 깊숙이 각인되었기에 이들은 30년 가까이 한눈 팔지 않고 험난한 운동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공들은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을까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최순영 전 YH무역 노조위원장, 박순희 전 원풍모방 노조부위원장, 이철순 전 한국여성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정향자 전 전남제사 노조위원장의 삶을 그들의 목소리로 담아 모아놓은 책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 속에서 이 책이 ‘찾아낸’ 것은 단지 한국 노동운동에서는 보기 드문 중년여성 운동가들의 개인적인 연대기만이 아니다. 

이 책이 진정으로 찾아낸 “숨겨진 역사”는 바로 70년대와 80년대 초반, 암흑에 가까웠던 시기에 섬유공장의 한줌 ‘공순이’들이 어떻게 민주노조운동의 빛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김경숙의 죽음으로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의 기폭제 역할을 한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 깡패들에게 똥물세례를 받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속에서 나체 시위를 하면서도 “부끄러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너희의 몫”이라고 외쳤던 동일방직 노조사수 투쟁 등. 그 살벌한 현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도대체 어떻게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공장에 들어왔을 때 언니들이 인간으로서 무척 잘해줬어요. 그래서 정말 이게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언니들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참석했어요.” 동일방직 사수투쟁에 참여한 어느 양성공의 말이란다. 결국 삶의 조건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같았던 ‘언니’가 따뜻하게 보듬으며 보여준 당당한 삶과 자매애적 믿음이 그 살벌한 투쟁 속에서도 떨리는 손을 서로에게 내맡길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1970년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스무살 난 ‘여자애들’에게 그들이 다니는 공장은, 돈을 벌어 시집을 가든 학교를 가든 간에, 어떻게든 떠나고 싶은 곳이었을 게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언니’와 노동운동은 항상 움츠러들기만 했던 그들에게는 ‘숨겨진’ 것이었던, 당당함 속의 성장을 경험하도록 해줬다. 

과거 일부 ‘학출’ 운동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 경험을 ‘경제주의’니 하는 이념적 잣대로 측량하고 비판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책에 담겨있는 이 ‘언니’들과 투쟁에 참여했던 다른 이들의 이후 삶이,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구체적인 활동이 그것을 증언한다. (박수경 짓고, 아름다운사람들 냄. 1만5천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