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중순 성수동지역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무료건강검진과 유기용제 특수검진이 성수건강복지센터에서 이틀간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건강검진은 ‘성수동 식구들’의 주관아래 ‘인도주의의사협의회’의 지원으로 개최되었다.
이날 검진을 받은 70여명 노동자들은 10월29일 검진결과를 직접 설명 받게 된다. 성수동지역 영세사업장 노동환경 실태조사 결과와 함께 노동부에 제출된다. 아울러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의 대안을 촉구하는 근거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수동에 터를 잡고 소외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사회적 합의를 찾기 위해 발로 뛰는 ‘성수동 식구들’을 찾아가 봤다.
소박하게 시작된 모임이 ‘성수동 식구들’로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서울본부, 서울지역일반노동조합, 성동건강복지센터, 서울경인지역인쇄노동조합이 모여 만든 ‘성수동 식구들’의 역사는 2002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수동 지역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보고자 성수동의 지역노조와 성동건강복지센터, 노동건강연대가 주축이 되어 모임을 가지게 되었고, ‘성수동 사업 2003’을 추진하면서, ‘성수동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성수동 식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성수동 지역은 서울에서는 드문 준공업지역으로 제화, 금속, 인쇄 업종의 1,350여 중소영세사업장들이 밀집해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형태도 모르고 있는 데다, 공장 내에 복지시설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장시간 반복노동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아픈 곳도 많지만 공장의 지불능력이나 사장과의 인간적 관계 때문에 직장의료보험 가입, 건강검진, 산재보험 등은 기대조차 안 하는 실정이다. 서울지역중소기업일반노조 제화지부에서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복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1순위로 정기건강검진이라는 답이 나왔을 정도로 성수동지역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열악한 상황이다.
무료건강검진과 ‘포지티브’ 실태조사
‘성수동식구들’은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건강검진’과 일본 ‘포지티브(POSITIVE ; Particpation Oriented Safety Improvement by Trade Union Initiative)’ 프로그램을 활용한 실태조사와 작업환경 개선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무료 건강검진은 ‘인도주의의사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혈압, 청력, 혈액, 소변 등 9가지 기본검사와 접착제, 잉크, 시너 등을 많이 사용하는 작업특수성으로 인한 유기용제 특수검진이 이뤄진다. 지난해에는 저소득주민을 포함해 166명이 검진을 받았고, 올해는 67명의 노동자들이 건강검진을 받았다.
포지티브사업이란 실행체크리스트를 토대로 노동자가 스스로 작업환경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고 그룹토론을 통해 개선해 나가는 사업으로, 일본 도쿄 노동안전위생센터의 토야마 나오키씨가 파키스탄, 베트남, 몽골 등에서 실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다.
지난해 성수동 지역 제화사업장을 방문해 실태조사를 진행했던 스즈키 아키라(노동건강연대 성수동 팀장)씨는 “하루 대부분을 작업장에서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이 직접참여하지 못해 원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아쉬움은 있습니다. 현장에 대한 접근조차 어렵던 상황에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고, 토론을 통해 개선점을 찾아내 사업장에 통보해주는 등 성과는 있었지만 후속적인 확인작업을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라며 지난해 사업에 대한 소회를 말한다.
올해 포지티브 실태조사 사업장은 민주노총서울지역본부가 선정되었다. 이직률이 높은 영세사업장 특성으로 인해 현장조직화가 힘들어 선정대상을 찾지 못하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건강권에 눈을 돌린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정세로 인해 시일이 연기되고 있지만, 노동운동의 첨병들이 작업하는 공간의 환경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뭇 기대가 된다.
정부의 노력 절실하다
“1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직장건강보험이 의무화 되어있고, 영세사업주도 고용보험 가입이 가능하게 되어있는 등 제도자체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현장에서 제대로 시행이 안 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지역 근로감독관이 제대로 일만 해줘도 많이 개선되겠지요. 정부의 실천의지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요”
민주노총 서울본부 오병전 조직부장은 제도의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정부의 의지부족을 지적했다. 아울러 노동자가 법제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직장건강보험 미가입 문제 등을 제기하고 해결이 이뤄지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이 기간동안 고용이 불안해져 못하는 사례가 많음을 안타까워한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는 “한국산업안전공단이 중소기업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 산업재해를 줄이고 ‘3D업종’의 구인난을 해소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클린사업’이라는 게 있습니다. 취지는 무척 좋은 사업이지만 영세사업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신청을 권장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업내용 역시 형식적인 면이 많고, 노동자의 의견을 직접듣기보다는 마치 사업주를 위한 사업을 펼치는 듯 합니다”라며 마찬가지로 정부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문제에 나서야 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디지만 한 걸음씩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건강권 등을 사회적 화두로 키워내야죠. 개인이 부담하고 있는 건강보험을 직장의료보험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역의료기관과 연대해서 문제를 풀고 싶지만 아직은 욕심일 테고, 더디 가더라도 꾸준한 활동과 사업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할겁니다.” 서울경인지역인쇄노조 문종찬 위원장의 말은 ‘성수동 사업’이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벌이고 있는 사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성수동 사업은 지역을 기반으로 노동자의 의식을 일깨워, 노동자 스스로 노동환경 개선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업입니다. 정규직노조가 조직 못하는 사업들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하고 홍보해 나갈 겁니다. 노조가 없으면 현장 접근조차 힘든 상황이라 지역노조와의 네트워크 형성도 중요합니다.” 스즈키씨 역시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스스로 작업환경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음을 믿고 있다.
취재수첩을 덮는 기자에게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는 “지역노조와 영세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지난 9월에 있었던 ‘민주노총 산업안전보고대회’에서 사례발표를 하면서 대기업노조 간부들조차 영세노동자들의 조직방식이나 활동에 대해 마치 다른 나라 얘기를 듣는 듯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데 꿈같은 얘기겠죠?”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부옇게 먼지가 자욱한 작업장 창문으로 때가 잔뜩 낀 낡은 환풍기가 힘없이 돌아가고, 엉덩이 겨우 걸칠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접착제 통에 코를 묻고 하루 열두시간 노동을 해야하는 노동자들. 점심식사 후 일하던 의자가 아니면 어느 한 곳 엉덩이 붙일 여유조차 없고, 일을 마치면 변변히 씻을 공간도 없어, 숙소로 돌아가 바로 곯아떨어지는 일상들. 마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보았던 영상들이 떠올라 막막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곁에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해 일하는 ‘성수동 식구들’이 있기에 더디게라도 진일보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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