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를 가릴 순간이다

노동사회

'보수'와 '진보'를 가릴 순간이다

admin 0 3,429 2013.05.12 06:05

hongsh_01.jpg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의회권력을 장악한 수구세력의 도발이었다. 대통령 탄핵 의결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국회 법사위의 두 의원은 이 땅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구세력의 정체를 정확하게 가르쳐준다. 한 의원은 친일진상규명법을 적극 반대하여 결국 누더기가 되게 했던 장본인이고, 다른 한 의원은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인물로서 이른바 '부산 초원 복집 사건'의 장본인이다. 

일제부역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분단 상황을 타고 '보수'와 '민족'을 참칭하면서 극우반공주의와 지역주의를 결합하여 지배의 성채를 공고히 해왔다. 이번 탄핵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차떼기 등 비리가 드러나고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수구세력이 국면 전환을 모색하여 도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수구신문 '조중동'의 왜곡된 여론에 놀아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탄핵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세기 동안 오만하고 뻔뻔하게 지배하고 군림할 수 있었던 만큼 그들의 사전에 '반성적 성찰'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일병 구하기'로 끝나선 안 돼 

우리는 흔히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제부역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것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진실은 바로 그들이 나라를 경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실상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표현해야 할 정도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일제 밑에서 일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 민족을 배반했던 세력이 새 나라의 지배층이 되어 국가를 경영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민주공화국은 그 출발부터 철저하게 배반당했던 것이다. 사회 공공성은 설자리가 없었고 반공의식, 친미사대의식, 질서의식만 강화시켰을 뿐 자유, 평등, 인권, 연대와 같은 민주공화국의 틀 속에서 보듬어야 할 가치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번 탄핵사건은 오랜 동안 나라의 공적 부문을 장악해온 사익추구집단의 도발이었다는 점에서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역사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개혁 지체도 탄핵에 상황적 빌미를 제공했다는 책임을 벗기 어렵다. 월드컵과 붉은 악마, 미선이와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이 부른 촛불시위, 그리고 인터넷 보급에 의한 쌍방향 소통 등 시민사회의 발전이 노무현정권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지만, 참여정부는 시민사회의 잠재력과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수행하기는커녕 그 역량을 오히려 소진시키는 편이었다. 수구세력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수구세력의 요구를 수용해왔다. 노동정책, 사회정책 그리고 대미관계에서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보수화, 우경화했다. 반면,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긍정적 명분을 내세웠지만 친노와 반노의 구분에는 엄격한 동시에 뺄셈정치를 함으로써 민주당 분당 사태를 불러왔고, 수적으로 탄핵을 가능하게 했다.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대통령 탄핵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구세력의 도발에 대한 국민의 분노라는 점에서 촛불시위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탄핵주도세력과 참여정부 사이에 정책상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기이한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탄핵 정국이 정책상 경쟁이나 갈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정치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즉, 이번 탄핵을 통하여 수구세력이 스스로 수구세력임을 선언함으로써 수구와 보수의 결별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앞에서 자유주의 보수세력이 수구세력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 보수세력은 실제로 이라크파병,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새만금, 부안 사태 등에서 수구세력과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특히 불균형한 노사간 힘의 관계 위에서 '2만불 시대'를 운운하는 점은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한 참여정부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갖춰 마땅한 사회공공성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사회보장도 취약한 땅에 신자유주의가 밀려오면서 수구와 결별하여 제자리를 잡기 시작한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입지 자체가 워낙 좁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촛불시위로 표현된 국민적 항의가 총선을 통해 '노무현 일병 구하기'로만 귀결되어선 안 되며 진보정당의 육성 강화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가는 순간

이번 총선은 지역주의의 약화와 더불어 수구정당이 지역주의 정당이거나 지역주의 정당이었다는 점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양면성을 보여줄 것이다. 즉 충청 지역의 '덩달아 지역주의'에 기반한 자민련은 '충청행정수도'로 지역주의가 더욱 약해지면서 역사에서 차차 사라지게 될 것이고,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태로 한 민주당은 '한민 연합' 탄핵 주도로 그 저항적 성격을 스스로 방기함에 따라 급격한 약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며, 영남의 공격적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한나라당은 그 강고한 지역주의와 그동안 획득한 물적 토대에 힘입어 계속 의회세력의 강력한 일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영남 지역당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벗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수구세력이 지역주의의 약화와 함께 역사의 장에서 점차 사라지는 만큼 집권 자유주의 보수 세력을 견제하는 진보야당은 거듭 성장할 것이다. 물꼬가 튼 만큼 이제 우리는 강한 희망과 함께 우리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수구세력의 약화는 오랜 동안 진보세력의 발목을 잡아왔던 '비판적 지지'의 굴레를 벗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개혁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보수세력에게 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면에서 비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컨대 열린우리당은 이미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아닌 수정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추종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옛 것이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새 것은 아직 그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않다. 그것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진보정당의 힘에 달려 있다. 역사적으로 '자유'와 '민주'의 '연합'당이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는 시점에 '노동'이 국회에 진입하는 것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국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노동자, 농민과 서민의 권익을 대변할 목소리가 국회에서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다. 실로 반세기 이상을 기다려왔다. 사익추구집단이 그들이 틀어쥔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을 관리, 통제하고 전일적인 의식화를 관철시킴으로써 노동자, 농민, 서민이 당연히 가져야 되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식을 갖는 대신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만든 반세기였다. 

가령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은 노동자, 농민과 서민에겐 존재의 당연한 요구이건만,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음에도 노동자, 농민, 서민은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위해 정치적 선택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심화되고 물신이 지배하면서 인간성이 물질에 의해 평가되고 압도되는 사회에서 노동자, 농민과 서민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한 세력들에 의해 객체화, 대상화된 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에서 생존을 위해 소외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남이 마련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 환경을 남이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한다. 민생정치를 외면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거짓 정치를 되돌리기 위해, 거짓 자유와 거짓 민주, 거짓 보수에 의해 질식당하고 억압당해 온 '노동'을 되살리기 위해, 노동자, 농민과 서민은 진보정당에 힘을 실어야 한다. 이 땅에서 자유와 평등과 민주, 그리고 보수까지 제자리를 잡게 할 것은 바로 진보인 것이다. 우리는 이번 4·15 총선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서민이 '노동'을 선택하는가 그리하여 진보정치세력의 국회 교두보를 얼마나 마련하는가를 가르는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