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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소 교육실 주최로 노동조합의 교육 활동가 20명을 대상으로 9월14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참여교육 전문강사과정' 중의 한 강의를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학교 교육과 달라야 하는 성인교육, 특히 여러 성인학습 이론에 대한 설명과 함께 노동교육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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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은 참여교육 전문강사 과정입니다. 오신 분들은 모두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오신 걸로 압니다. 과정 중에 교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여기서 '교육'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간 짧은 글짓기를 30초 동안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적으셨으면 한번 불러보시죠.
"교육은 평생교육이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교육은 시대의 자화상이다"
"교육은 부족을 채워주는 것이다"
"교육은 지식을 습득해서 이성적인 인간을 만든다"
"자기를 돌아보게 한다"
"필요한 노동이다"
학교교육과 다른 노동교육
역시 노동조합 간부들이 모인 강의라서 다른 곳에서 해본 것과는 다르네요. 19∼20세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들은 '교육=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글짓기 내용 중에는 "다시 교육을 받으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라는 극단적인 표현도 나옵니다. 40세 정도 된 학습자들은 "나를 되찾게 하는, 나를 도와주는"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짧은 글짓기에서도 드러나듯이 교육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교육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가 난감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동교육은 학교교육과 다르지요. 이처럼 교육은 참 다의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사회, 역사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드문데,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이란 말을 사회와 연결시킨다면 역시 학교 교육이 떠오르지요.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그 영향력이 무섭지요.
요즘 교육 패러다임이 변화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패러다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망' 이란 뜻이지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뀐다고 하면서 참여교육이 인기를 끕니다. 그럼 왜 교육 패러다임이 바뀌는 걸까요? 이것은 학교교육과도 밀접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학교교육과 다른 모종의 영역에서 교육에 대한 요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학교교육을 살펴봅시다. '학교'하면 떠오르는 말이 무엇입니까? 체벌, 시험, 성적, 나머지 공부, 주입식, 숙제, 방학…. 학교에서 교육자라고 하면 선생님이지요. 학교에서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학교교육의 특징은 교육과정에 있습니다. 요즘은 다양하게 교과서가 나오지만, 그 전에는 교과서조차도 국정교과서 달랑 한 개밖에 없었지요. 시간표도 같습니다.
한국을 하늘 위에서 바라본다면, 전국의 모든 중학교 2학년의 4교시 수업은 같은 과목, 같은 범위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희한한 과정을 보게 될 겁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을 다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도 못하지요. 또 교육장도 법으로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공식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학교교육의 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위해서 학교 건물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것과 비슷한데 뭘까요? 바로 군대, 또 병원 중에서도 정신병원과 비슷합니다. 종합기관이라고, 일단 교문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모든 생활을 다 하지요. 학교는 교육만 하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학교 건물은 어떤가요? 우선 교문을 생각해 봅시다. 큰 문과 작은 문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학교 등교시간에는 큰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큰 문이 닫히고, 쪽문에 규율부들이 서지요. 지각한 학생들은 쪽문으로 들어가면서 이름이 적힙니다. 교실을 생각해보면, 모든 학교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복도에서 볼 수 있는 창문이지요.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쨌든, 복도에서 들여다보면서 감시와 규율을 하는 통제 시스템 역시 학교교육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업시간이 아니라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배웁니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수업 중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 즉, 학습자 되기와 같은 것을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배운 것들이지요.
성인교육의 시초는 노동교육
초등학교 1학년 교과과정을 보면 글씨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지만, 이때 확실하게 배우는 내용은 줄서기, 앞으로 나란히, 40분 동안 자리에 앉아서 떠들지 않기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암암리에 사회가 원하는 것, 수동적 입장에서 학습을 받는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느끼는 서먹서먹함도 바로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학교교육의 효과가 배어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학교교육은 '정형화', '감시와 통제', '수동적인 학습자'라는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명목적인 이상적 교육이 실현되기는 어려운 구조이지요.
우리는 학교를 아주 먼 옛날부터 있던 조직으로 보지만, 지금과 같은 학교의 역사는 150년 이상 되지 않았습니다. 우메네 사토루의 『세계교육사』라는 책을 보면, 처음 학교교육은 노동계급의 자녀를 모아놓은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사는 한명인데 학생이 천명이 넘으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아이들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좀 큰 아이들을 뽑아서 교육을 하고, 그 아이들이 반장이 되어서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추게 됩니다. 지금 교실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니 학교교육은 개인의 창의, 발전과는 멀 수밖에 없는 타고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때문에 학교교육과는 다른 교육에 대한 요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표현되는 '성인학습'입니다. 성인학습에는 노동교육, 평생교육 등이 포함되어 있는 거지요. 즉, 성인학습은 학교교육과 다릅니다. 성인교육에서는 학습자를 능동적으로 봅니다.
"성인교육과 노동교육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성인교육의 시초는 노동교육입니다. 성인교육은 영국의 노동자계급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들도 뭔가 공부하고 싶다", "많이 배워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노동자들이 모여서 학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옥스포드 대학에서 대학개방운동을 시작했지요. 그 대학의 스튜어트 교수가 대학확장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학습을 하던 노동자들이 강의를 진행할 교수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12시간씩 노동을 하고도 3∼4시간씩 모여 학습하던 이런 노동자들의 요구를 모아서 맨스브리지라는 사람이 1902년 '노동자교육협회'를 만듭니다. 바로 이 흐름이 성인교육의 효시지요. 이런 역사적 과정의 핵심은 학습자의 능동적인 자세, "와서 교육해 달라", "강의해 달라" 와 같은 데 있고, 학습자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새로운 교육방법,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학습자를 능동적으로 만들기
이제까지 학교교육과 성인교육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두 교육에서 핵심적 차이는 학습자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가 바로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인학습, 노동교육이 학교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요. 물론 강의도 나쁜 교육방법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열망이 큰 준비된 학습자에게는 가장 좋은 교육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습자가 이야기하고, 행위하는 것을 포함하는 토론이나 실습 등의 교육방법에 비해 실질적으로 학습자에게 남게 되는 효과는 매우 작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교육은 학습자들이 수동적 학습자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참여교육의 핵심은 '학습자를 능동적으로 만든다'라는 근본적인 철학입니다. 학습자를 어떻게 건드리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이지요. 흔히 학교 교육 같은 주입식 교육을 "도관의 패러다임"이라고 합니다. 파이프(도관)에 물을 부으면 파이프 끝에서 물이 그대로 나오지요. 학교 교육에서는 학습자를 그 물을 받는 항아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라, 받지 못하면 그건 항아리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지요. 반면 참여식 교육은 "대장장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학습자는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고, 여기에 교육자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성인 학습자는 자기 주도가 없으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학습자가 스스로 맘대로 변화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교육자는 학습자에게 개입을 하는데, 다만, 학교교육과 같은 자세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교육을 단순히 '교육기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림으로 글을 가르치다
성인 학습의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프레이리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프레이리는 제3세계의 변혁적 학자이면서 사회운동가입니다. 70년대 초반에 교육을 통해 사회에 엄청난 변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프레이리가 활동한 브라질에서는 빈민이며 문맹(비문해자)인 사람이 70∼80%정도였습니다. 문자는 세계를 알게 되는 통로라고 생각한 그는 "가나다"를 가르치지 말고 "학습자가 세계를 읽도록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명가량으로 연구팀을 구성해서, 빈민지역 주민 및 지역 자체에 대한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쓰는 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바로 학습자 중심적 시각입니다. 연구팀은 조사해 온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면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단어를 찾아냈지요. 그게 '파베라(favela)'라는 단어였습니다. 우리의 '벌집'과 같은 단어이지요. 바로 빈민들이 빈민촌을 부를 때 쓰는 그들만의 은어였습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슬라이드를 만들었습니다. 첫번째 슬라이드에 'Favela' 라는 단어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읽지 못하겠지요.
그 다음 슬라이드에서 마을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Favela' 라는 단어와 마을의 사진을 겹쳐 보여주며, 그 단어가 빈민촌을 뜻함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6개월 동안 교육을 하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토론을 조직하고, 그 토론을 통해서 지역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프레이리는 문해교육 지역마다 '해방의식'을 심게 됩니다. 빈민들이 자기주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으니, 지역문제를 정치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지요.
프레이리의 교육에는 성인학습의 모든 이론이 다 적용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결합시켜낸 것이지요. 글씨를 쓰지 않고 그림으로만 교안을 작성할 정도로 프레이리의 교육은 학습자 중심의 교육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이 결국 사회변혁의 핵심고리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학습자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참여교육방법은 여러 가지로 변형이 가능합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적 상상력', 이러저러한 학습자에게 어떤 방법으로 무슨 내용의 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입니다. 내가 얼마나 현장을 잘 읽어내고 있는가, 내가 읽어낸 현장에 교육적 상상력으로 참여교육을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부르크 제5차 성인 교육회의 결의문에 나온 성인 학습을 노동교육으로 바꾸어 이해하셔도 됩니다.
노동교육은 학습자 개인에게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수단이며, 그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도구로서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데 있어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18세가 넘어도 배울게 많다
학습자 분석 중 성인의 생애 주기 연구 결과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25살에 "내가 나이가 많이 들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는 18세 이후 성인 초기는 놀랍게도 43세 전후까지 이어집니다. 면접 결과,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치관, 직업 등이 바뀌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기인 55세∼60세까지 자리를 잡고,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하고, 그 이후 후기는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는 통합성 높은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18세 이전의 교육에 대해선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안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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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생애 | ||
| 성인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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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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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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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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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생활 | ||
| 성인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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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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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라
성인학습 이론 중에 메찌로우의 관점전환 교육이론이 있습니다. 그냥 소시민으로 살던 사람이 노동조합 활동가가 됩니다. 그 변환 과정에 관점을 바꾸는 뭔가가 있지요. 메찌로우는 이런 식의 '관점을 바꾸는 교육'에 주목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으면 과거의 경험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됩니다. 동일한 경험이었으나 이것이 다른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거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한 노동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그때는 참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가난이 싫고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활동가가 되면 과거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때는 참 어렵게 살았다. 그때의 가난했던 경험이 지금 내 투쟁의 원동력이다." 이렇듯 세상을 보는 눈이 소시민에서 활동가의 눈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세상의 의미, 관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게 바로 메찌로우가 이야기한 관점전환 교육에 대한 것입니다.
[그림2] 노동자의 일상활동의 영역
노동자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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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식 | |
여성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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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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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성인학습 이론 중에 구성주의 이론이 있습니다. 파리가 보는 눈과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르겠지요? 파리가 보는 것을 사람이 이해하기란 어렵지요. 의미의 차원에서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은 다른 사람과 자동적으로 같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같은 것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의 동질감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교육자와 학습자 사이의 거리가 멀면 이런 동질감은 생기지 않습니다. 교육자가 자신의 수준에서 내려와서 학습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학습자의 관점에서 한 단계만 앞선 거리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 조합원의 수준은 이러저러한데, 이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고민을 교육 활동가인 여러분들이 해야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학습자의 어떤 부분을 건드릴 것인지, 여러 교육방법이 우리 현장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하고 그 과정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성인의 일상생활 측면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노동자인 동시에 부모이고, 지역주민이며, 탁구회의 회장일 수 있지요. 이런 생활에 근거하여 이런 저런 항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보면, 여러 생활의 수준은 동질적인 의식수준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 의식은 높으면서 여성, 청소년, 정치에 대한 의식이 낮은 노조활동가들도 있을 수 있지요. 이런 각각의 영역의 차이나는 의식들을 같은 레벨로 올리는 것도 역시 교육의 영역입니다. 일상적으로 자기 삶, 자기 정체성을 갖추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겠지요. 물론, 이런 교육이 일회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일상적인 성장을 위해 조합원을 자극하는 일상적 결합속에서만 의식의 균질적 성장은 가능합니다. 교육 장면에서만의 결합이 아니라 일상에서 교육적 관점에서 개입해 들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은 학습 대상을 깊이 연구하고 짚어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학습자들보다 잘 모른다. 학습자의 생활과 설움을 알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학습자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 그래서 내가 학습자 입장에서 내려가야 학습자가 내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라는 생각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학습자를 자신있게 추동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현장에서 교육 활동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교육을 하시면서 기록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는 역사를 만드는 주체인데, 그 기록이 많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현장에서 하시는 교육 하나 하나를 다 기록으로 남겨서 그것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