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주의 이론에서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는가(2)

노동사회

조합주의 이론에서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는가(2)

admin 0 3,386 2013.05.12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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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의 노사관계 전문지(British Journal of Industrial Relations, December 2003)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지난 호(통권91호)에 이어 글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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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회적 파트너십의 내부 정치

아일랜드

첫 번째 사회적 파트너십 합의안인 ‘국가회복프로그램(PNR)’은 가장 정치적으로 논쟁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합의가 가장 어려웠다. 사용자의 경우, 중앙화되고 탈집중화된 교섭이 혼재되어 있어서 임금의 완화를 보장할 수 없었던 1970년대의 비효과적 협상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그들은 정부의 결정에 의해 전국적 합의안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 테이블로 내몰려야 했다.

피안나페일(Fianna Fail)당 정부는 소수 정부였다. 의회 내 다수이자 반대파였던 피네게일(Fine Gael)당은 정부의 정책이 자신의 정책노선에 부합하기만 하면 지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역풍을 피하기 위해 삼자주의적 협상을 확보하는 것이 정부로서는 중요했다. 아일랜드노총(ICTU) 지도자들은 국가회복프로그램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정부가 경제 위기를 맞아 영국 대처의 사례를 따라 노조의 특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아일랜드노총은 피안나페일당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진보민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의 등장과, 선거과정에서 이들이 보인 놀라운 성과(1987년 선거당시 11.8%)를 아일랜드가 영국의 경로를 실제로 따를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러운 징표로 간주했다.

공공부문 노조들은 정부가 현재의 지출 수준을 내릴 경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교섭체제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또한, 아일랜드노총의 지도자들은 1980년부터 87년까지의 탈집중화된 교섭 국면에서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높은 인플레이션과 재정장벽 등이 종합된 결과로 인해, 그들이 높은 수준의 명목임금인상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낮은 임금총액으로 귀결된 바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 지도자들은 총임금액과 조세정책을 동시에 협상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환영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노총에 가입된 다양한 노조들의 입장은 보다 복잡했다. 대부분의 민간부문 숙련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숙련직노조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교섭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국가회복프로그램에 대해 반대했다. 당시 2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유통업 노동자를 대표하는 최대노조인 상업사무노조(IDATU) 역시 해당 합의안에 반대했다. 이 노조는 국가가 주관하는 대규모 직업창출계획이 필요하고, 기업에 대한 세금을 늘리며, 해외 채권자에 대한 이윤지불을 거부하는 것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을 제안했다.

일반 노조 중에서 각각 14만명과 6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운송일반노조(ITGWU)와 연합노조(FWUI)는 합의안을 지지했다. 세 번째로 큰 일반노조이자 영국에 본부를 둔 운수통합노조(ATGWU, 조합원 23,000명)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공공부문 노조들 또한 일반적으로 합의안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공공서비스노조(LGPSU)의 실무위원회는 조합원들에게 거부할 것을 제안했다. 이 노조는 국가회복프로그램이 공공부문 직종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하며, 공공부문 감축에 대해 노조가 승인하는 것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공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의 약 60%는 결국 국가회복프로그램의 합의안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아일랜드노총의 의결과정은 일련의 절차적 단계를 따른다. 전국적 대화에 참여하기 전에 아일랜드노총은 모든 산하노조가 참여하는 회의를 소집한다. 이들 산하노조는 이 때는 조합원투표를 실시하지 않는다. 대신 각 노조의 실무진이 결정안을 작성하며, 이후 이른바 ‘특별 대표자회의(Special Delegate Conference)’에서 투표가 이루어진다. 투표의 결과는 작은 노조들에게 유리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노조는 협상의 개시를 공식 승인하는데 거의 문제가 없지만(공식 승인이 종종 부인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협상 결과에 대한 최종 승인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협상이 종결되었을 때, 노총 소속 노조들은 개정이나 반대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다. 어떤 노조는 실무 위원회의 투표결과에 기초하여 결정하기도 하지만, 큰 노조들은 조합원 투표를 통해 결정을 한다. 조합원투표를 실시하는 노조의 숫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아일랜드노총은 산하조직에서 조합원투표가 이루어지도록 권고한 바 있다. 투표가 실시될 경우,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찬성이나 반대 등 특정한 방향으로 투표하도록 추천안을 보낼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서 추천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노총의 선거방식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투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달리 말해서 투표자의 50% 이상이 선택한 결정 사항에 따라 해당 노조의 대표자들은 전국 단위의 회의에서 자신의 조직에서 결정된 사항 그대로 투표한다. 미국 대선과 유사하게 이러한 규칙은 조합원 다수가 지지한 정책이 아닌 보다 적은 노동자가 지지한 정책을 아일랜드노총이 민주적으로 추진하도록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찬성이 한계에 도달하고, 반대는 약간 더 큰 한계에 도달한 경우 그러하다. 다양한 노조선거의 자료가 이용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경우는 1987년에 발생했다. 미국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런 가능성이 노조회의 내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에 대해 정당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노조는 명목상 중앙조직에서 탈퇴하지 않으며, 원할 경우 그들의 독자적인 임금정책을 추진한다.

국가회복프로그램에 대한 1987년 특별회의에 참여한 56개 노조의 다수는 합의안을 반대했다. 최대노조인 운송일반노조(ITGWU)는 단일 투표안을 결정하기 위해 조합원 투표를 단행했다. 투표결과는 매우 근소했으나 찬성이었다. 노조의 핵심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은 97,000표가 투표되었으며, 표차는 400표에 불과했다고 회상한다. 『아일랜드타임스』는 운송일반노조 투표로 인해 매우 작은 다수가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쓰고 있다. 48명의 대표단을 가진 운송일반노조의 투표는 결정적이었다. 결국 국가회복프로그램은 181대 114로 승인되었다. 두 번째로 큰 노조였던 연합노조(FWUI) 역시 찬성표를 던졌으며, 이는 3개의 주요 교사노조 가운데 둘을 포함한 공공부문 노조의 대다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운송일반노조(ITGWU)의 멤버들이 반대표를 행사했다면 국가회복프로그램은 절대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지 못한 그룹은 장외보다는 노조 안에서 내부투쟁을 개시하기로 했다. 1989년에 인플레이션율이 전국 합의안에 명시된 2.5% 증가치를 넘어섰을 때, 영국에 본부를 가진 숙련화이트칼라노조(MSF)와 운수통합노조(ATGWU)는 연맹이 파트너십으로부터 탈퇴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아일랜드노총 특별회의를 요청했다. 국가회복프로그램의 갱신을 위한 대화가 이미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투표는 사실상 전국단위 교섭이 지속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탈퇴제안은 181표가 반대하고 141표가 찬성함에 따라 거부되었다. 다시 한번, 일반노조인 서비스·공업·전문·기술업종노조(SITPU)와 공공부문 노조의 찬성표가 결정적이었다.

다른 파트너십 합의안에 대한 승인은 국가회복프로그램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경제가 제 궤도로 진입함에 따라, 낮은 인플레이션과 조세인하는 대부분의 범주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되었다. 1991년 2월 경제와 사회진보를 위한 프로그램(PESP)은 224대 109로 비준되었다. 1994년 3월 경쟁력과 노동 프로그램(PCW) 역시 256대 76으로 비준되었다. 경쟁력과 노동 프로그램(PCW)에 반대한 노조는 단지 여덟 개에 불과했다.

경제가 1996년까지 활성화됨에 따라 파트너십2000(P2000) 합의안에 대한 비준은 기대되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렵게 진행되었다. 아일랜드노총의 투표는 217대 134로 찬성이었다. 매우 놀랍게도, 파트너십에 대해 가장 충실한 반대파였던 숙련화이트칼라노조(MSF)가 찬성표를 던졌다. 처음으로 이 노조는 조합원투표를 결정했다. 노조 실무위원회에서 합의안을 반대하라고 제안한 추천안에도 불구하고, 평조합원의 60%가 찬성표를 던졌다. 조합원들은 협정에 삽입된 상당한 조세경감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파트너십2000(P2000) 합의안으로 노조 비준과정은 더 넓은 정치적 게임의 일부가 되었다. 최대노조인 서비스·공업·전문·기술업종노조(SIPTU)가 자체 투표를 진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파트너십2000(P2000)은 위험에 빠졌고, 이때 정부는 17개 투표권을 가진 한 개의 교사노조와 막판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노조 조합원인 3,000명의 초등학교 교사를 진급시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결국 서비스·공업·전문·기술업종노조(SIPTU)는 합의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노조 내부투표의 결과는 65,000표가 찬성, 55,000표가 반대로 매우 치열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치열한 결과는 합의안의 내용이나, 그 과정과 별 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합의안은 크리스마스를 지나 종결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노조지도자들은 협정에 포함된 조항이 1월 말에 책정되는 1996년 예산에 영향을 주기 원했기 때문에 비준과정을 서둘러야 했으나, 단지 3주를 투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달리 말해서, 노조지도자들은 합의안의 내용을 그들의 조합원들에게 설명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특히 서비스·공업·전문·기술업종노조(SIPTU) 안에서 강했던 파트너십2000에 반대하는 캠페인 세력의 막강한 조직력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비스·공업·전문·기술업종노조(SIPTU)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웠다. 그들은 노조의 교섭 의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과 밀도 있는 협의 과정을 거친 후, ‘2000~2002 변형과 형평을 위한 프로그램(PPF)'에 대한 협상에 들어갔다. 비준 시각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선거 캠페인에 가장 공을 들였는데, 기본적인 홍보 및 자문 회의 기간으로 3~4주를 썼으며, 투표를 조직하는 데 3~4주 이상을 할애했다. 자문과정은 직장위원들(shop stewards)에 대한 설득능력에 전적으로 달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체 노동자의 70%가 찬성표를 행사했고 이는 노조가 기록한 최고 수치였다. ??2000~2002 변형과 형평을 위한 프로그램(PPF)??은 251대 112로 아일랜드노총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합의과정의 내부정치는 아일랜드의 사례와 놀라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노조도 민주적 절차를 사용했는데, 특히 내적 갈등을 줄이고 자신의 조직원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국적 단위의 노동자 투표를 실시했다. 이러한 절차가 수반되지 않는 경우(예를 들어 1992년과 2002년처럼), 전국단위 합의안은 즉각적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1992년 삼자주의적 합의(아일랜드의 1987년 합의처럼)는 비상 협정이었다. 이탈리아의 거시경제와 금융 상황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경제위기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수반하였다. 1992년에 밀라노 법정은 소위 ‘마니뿔리떼’라 불리는 정치 부패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이 조사는 빠르게 확대되어, 결국 전후 이탈리아의 2대 주요 정당이었던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의 해체로 이어졌다. 1992년 합의안은 임금물가연동제를 폐지함으로써 리라의 명목환율지수가 앞으로 더 쉽게 방어될 것이라는 신호를 국제 금융시장에 보내고자 했다(이탈리아의 인플레이션율은 유럽통화제도 내의 다른 국가들에서 나타난 인플레이션율과 매우 가깝게 연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금융위기를 예방하는 데는 불충분했다. 리라에 대한 통화평가가 안정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우려는 1992년 9월의 은행인출 파동으로 현실화되었다. 리라는 평가절하 되었으며, 유럽통화제도 내에서 잠정적으로 퇴출당했다.

이탈리아의 사용자들은 1992년 합의안을 쉽게 수용했지만, 이 합의로 인해 노조, 특히 이탈리아노동총동맹(CGIL)에서는 주요한 위기가 촉발하였다. 1992년 가을 수많은 시위가 협약을 반대하여 발생하였다. 북부의 다양한 공장 위원회는 이른바 ‘아우토콘보카티(autoconvocati)’라는 운동 즉, ‘자율소집(self-summoned)운동’을 개시하여 임금물가연동제 및 공장단위 교섭의 폐지에 항의하였다. 이러한 시위에는 전투적 금속노동자 노조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좀더 온건한 노조조직들로 생각되어 오던 화학 및 섬유 노동자들의 참여가 특히 두드러졌다.

시위대는 그들의 불만을 자신들이 반대한 바 있는 합의안의 내용보다는 의사결정 과정에 쏟아내었다. 합의안은 관련 노동자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 그룹들에 의해 전체 노동대중의 의지를 대표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협약체결의 시기(즉, 대부분의 제조업 공장에서 여름휴가 개시 전날인 7월31일 체결) 역시 많은 노동자들에게 공격적인 것으로, 그리고 다양한 반대를 미리 막기 위해 정교하게 계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92년과는 다르게, 1993년 7월의 합의안은 노동자들 사이의 의무 투표에 의해 진행되었다(이는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바로 일년 전에 발생했던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기억하고 있던 전국조직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조합원들의 견해를 종합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교섭상대에게 요구하여 이를 얻어냈다. 사실상 정부, 사용자 그리고 노조 지도자간 임시 합의안이 1993년 7월3일에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합의안은 7월23일 되서야 서명되었다. 20일간의 조정기간 동안 노조는 주요 공장과 사무실에서 대략 30,000개의 회합을 개최했다. 대략 150만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그들 가운데 68%가 협약에 찬성했다. 그러나 조합원들 사이의 토론과정에서 많은 반대표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자동차 공장들, 밀라노 근처의 알파 아레세, 튜린의 미라피오리, 브레시야의 OM 이베코 등은 협약에 반대했는데, 가끔은 몰표가 나오기도 했다.

1993년 협약은 북동부 이탈리아의 대규모 제조업 공장에서의 반대와 즉각적인 저항이 개혁의 시도를 억눌렀던 이전과는 달리 커다란 반대에 부닥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합의안에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1993년 협약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노조민주주의와 임금 자제의 특정한 결합으로 인해 동원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합의안은 ‘아우토콘보카티’ 운동 및 다른 반대 분파에 의해 이전에 제기된 ‘방법론적’ 비판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대응이었다. 첫째, 작업장 대표의 정기적 선출을 제도화했다. 둘째,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의무적 자문을 명시했다. 반대파들은 합의 내용에 불만이 있었지만, 그들의 에너지를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조직하기보다는 선거과정에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결국 몇몇 그룹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회합에서 합의안에 우호적인 노조지도자들만 발언이 허락되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협의의 결과 즉, 이탈리아 노동자들 다수에 의한 1993년 7월의 합의안에 대한 명백한 승인에 대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1995년 연금개혁의 승인 과정은 1993년의 경우와 매우 유사했다. 연금개혁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임금물가연동제가 그랬던 것처럼 인기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 노조는 정부와의 막후협상을 시도조차하지 않았고, 대신 이탈리아에서 역사상 최대규모의 노동자 자문(consultation)과정에 개입하였다. 정부와의 임시합의에 도달한 후, 이탈리아 노조들은 42,000개의 작업장 회합과 의무투표를 조직했다. 그리고 450만명의 노동자 및 연금수령자가 투표에 참여하여 전체의 64%가 개혁에 찬성하였다. 연금수령자는 협약의 찬성에 몰표를 던졌다(91%). 그보다는 낮은 비율이긴 하지만, 활동적 노동자들 역시 개혁안을 찬성했다(58%).

다시 한번, 반대의 최대영역은 북동부 제조업 공장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지역인 롬바르디주에서 대다수의 적극적 노동자들은 제안된 개혁에 반대했다. 피에몬테주에서는 모든 주요 산업영역의 노동자들(금속노동자, 화학노동자 및 섬유노동자)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 역시 협약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특히 피에몬테주와 롬바르디주의 금속산업부문에서 500명 이상의 피용자를 가진 다수의 공장들은 연금협약에 대해(가끔은 몰표에 가깝게) 반대했다. 그러나 동일한 지역에서 소규모사업장(50인 이하 사업장)에 고용된 금속노동자들은 합의안에 찬성했다. 전체투표는 연금개혁에 대한 참여가 과거에 그랬듯이 노조관료들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 노동자의 명백한 다수에 의해 지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공공부문 노동자들처럼 특정부문의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는 제조업노동자들보다 더 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자 자문 과정으로 인해 노조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의 선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1995년 연금개혁의 일반적 구조와 분배적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노조대표들에게 의존했으며, 다양한 회합을 통해 연금개혁이 제시된 특정한 방식(가결이냐, 부결이냐)에 따라 그들의 의견을 형성했다. 매우 유사한 구조적 조건에 처한 공장들은 문제가 형성되는 특정한 방식에 따라, 연금협약을 승인하거나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공장대표들은 전국단위 혹은 지역단위 지도자들보다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

‘1996년 노동협약’과 ‘1998년 크리스마스 협약’은 1992, 1993, 1995년 협정처럼 동일한 분배적 결과를 낳지 않았다. 그것들은 좀더 장기적 전망의 합의안이었다. 첫째, 유연화된 고용에 대한 새로운 유형론을 도입했다. 둘째, 1993년에 도입된 단체교섭의 구조를 확고히 했다. 3개 노총(CGIL, CISL, UIL)의 최고지도자 사이의 합의로 인해 산하 노조의 합의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3개 노총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법성에 대한 추궁을 피하기 위해 노동자 협의 과정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연금개혁에 대한 총투표는 1997년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개혁에 영향을 받는 범위가 전체 노동력의 35%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결과는 거의 결정된 것이었다. 투표에 따라 39,000개의 회합이 조직되었다. 이 시기 310만명에 달하는 투표자들의 84%는 합의안을 찬성했다. 흥미롭게도 은행·보험업과 공공부문처럼 화이트칼라가 다수를 차지하는 부문은 해당 합의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1997년의 개혁으로 인해 은퇴 시기가 더욱 늦어졌다.

2002년 합의는 다른 협약들과 달랐다. 이탈리아노총총동맹(CGIL)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국 단위 협약이 가질 수 있는 유익성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저항을 조직했다. 물론 이것이 세 개의 노총이 최초로 분열한 사건은 아니었다. 유사한 사례가 1984년에 발생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노동총동맹(CGIL)의 최고 지도자들은 ‘2002년 이탈리아를 위한 협약’에 대해 노동자 총투표를 요구했고, 그 결과에 따를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1984년에 그랬듯이 이 총투표는 조직되지 못했다. 2002년 노동자 동원은 전후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는 이탈리아 협의체제의 불확실한 미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6. 비조합주의적 협의(concertation)?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일랜드와 이탈리아는 서로 다른 형태의 정책형성, 즉 협의적 과정과 비협의적 과정을 겪어왔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해대표구조는 다소간 동일성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조직적 구조가 서로 다른 정책 과정과 양립 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이 협의의 조직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앙화된 정책에 대해 충분한 내부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핵심적 문제로 남는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양국에서 최고 노조지도자들은 중앙 협상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합의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이 견해는 2001년까지만 해당한다. 이러한 최고수준에서의 우호적 태도는 협의체제가 계속 유지될 것인가와 관련된 핵심사항이었다. 그러나 노조 내의 모든 노동자그룹 혹은 모든 중간 단위 지도자들이 최고수준에서의 긍정적 태도를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협의된 정책결정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1987년 대부분의 아일랜드 노조는 사회적 파트너십에 대해 반대했다. 1989~90년에 아일랜드 노조연합들조차 다시 사회적 파트너십을 끝내려 했다. 1992년, 기층조합원들에 대한 자문(consultation)이 없었던 이탈리아 노총 지도자들의 임금물가연동제 폐지 결정은 격렬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조합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2002년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대한 자문의 실패로 촉발된 노동자들의 시위는 안정적 협의체제를 위한 노조 내부와 노조간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인 내적 갈등이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에서 사회적 파트너십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붕괴되지 않은 이유는 아일랜드 및 이탈리아 노동운동 양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노조지도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산하 단위로부터 격리시키면서 논쟁적인 제안을 부과할 자체능력을 강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대신 민주적 정책형성 과정에 의존하여 기층조합원들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달리 말해서, 노조지도자들은 그들의 산하 단위들에 특정한 해법을 제안할 특권을 유지했으나, 노동자들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집합적인 동시에 심의적인 효과를 가졌다. 노조 내의 강력한 그룹들은 합의안의 내용에 반대한 바 있는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동시에 다수의 의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것은 집합적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도덕적 강제에 대한 이러한 감각은 모든 아일랜드 합의안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던 운수통합노조(ATGWU)의 대표단에 의해 잘 표출되었다. “우리는 매우 충성스런 아일랜드노총의 멤버이며, 나는 그게 두렵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아일랜드노총을 믿는다. 우리는 행해져야 할 것이 내부로부터 결정되어야 함을 느낀다.” 다른 노조 간부들 역시 유사한 견해를 표명했다. 민주적 절차는 노조지도자들에게 노조 회합에서의 설득적 의사소통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사 형성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이는 심의적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탈리아 노조지도자들은 작업장 회합이 대략 20%의 노동자 투표를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사례를 각각 보면 협의와 조합주의 구조간의 이론적 연결에 대해 의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합쳐서 생각해보면, 두 사례는 협의적 정책결정에 대해 대안적인, 기능적으로 등가적이지만 보다 민주적인 경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상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이해대표체계는 서로 상당히 다르다. 이들 두 나라에서 ‘정치적 교환’의 논리 역시 또한 매우 다르다. 아일랜드의 사회적 파트너십은 임금 완화와 조세경감 사이의 고전적인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달리 말해서, 노조의 동의는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물질적 유인을 통해서 구해질 수 있다. 대신 이탈리아의 협약들은 그것들이 노동자들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할 수 있는 여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시적 양보교섭에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쪽 사례에서 동일한 인과적 메커니즘이 작동했으며, 이는 조직 내적 그리고 조직간 조정을 가능케 하는 민주적 과정이었다.

이 논문이 지적할 수 없었던 문제의식은 조직적 전제가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다. 즉, 어떤 이유들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협의적 합의체제는 위계적 그리고 내적으로 비민주적인 노조 구조에서 가장 잘 작동했는데 반해, 최근의 경우 더욱 열려있고 참여적인 제도와 잘 맞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처럼 새로운 협의적 합의체제가 노동자들에 대한 물질적 유인과 관련이 없을수록, 입법 절차에 의존하거나 혹은 산하 단위노조에게 희생이 정당하며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노조지도자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 더욱 중요해졌다. 과거의 경우, 그러한 희생이 다른 영역에서(예를 들어 더욱 많은 복지 급여들) 보상되며, 노조지도자들이 절차의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단순히 조직원들에게 물질적 재화를 조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7. 결론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경험에 비추어, 이 글에서 협의(concertation)는 이해대표체계의 비조합주의적 구조와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독점적이고, 집중화되었으며, 내적으로 비민주적 결사체는 협의체제가 발생하고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에서조차 협의체제의 재생산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분화된 노조 구조도 협의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통해 대안적이고 좀더 민주적인 조정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짧게 말해, 과정으로서의 조합주의는 살아있고 탁월한 반면, 구조로서의 조합주의는 죽었을지 모른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가 구조로서의 조합주의적 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의 협의적 정책들이 최근 발생했던 유일한 국가는 아니다. 미래의 연구는 다른 국가들에서 타협을 통한 정책결정으로 이어지는 내부적 과정이 아일랜드 및 이탈리아의 과정과 유사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례들에서 조직적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탈집중화된 노동운동이 중앙화된 정책결정 제도들을 통해 상호 조정될 수 있는 메커니즘의 하나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협의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지만,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사례 사이의 몇몇 유사성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정부는 공히 약했다. 1987년 아일랜드 정부는 소수정부였다.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정부는 ‘기술관료적’ 성격을 가졌으며, 또한 그들을 지지하는 다수의 의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정부가 수행해 냈던 광범위한 업무들, 예를 들어, 재정 조절, 반인플레이션 정책, 경제 및 고용성장의 재개 등은 엄청난 것들이었다. 양국 정부는 이들 정책이 대중적으로 보다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조의 합의와 지지에 의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노조의 참여결정은 양국에 유포되었던 경제적 위기상황이라는 배경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국가를 제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서 발본적인 무언가가 행해져야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양국에서 활발하게 논쟁된 적이 있으며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바 있는 노동시장 탈규제에 기초한 조절적 해결책 및 노조 특권에 대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양국 노동운동은 잠재적으로 인기 없는 정책들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갖는 것에 동의했다. 이로 인해 노동운동은 직접적으로 모든 주요한 거시 정책들의 형성에 개입하게 되었다.

조직된 사용자들을 핵심으로 간주하는 많은 최근의 문헌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경우 협의적 제도의 형성에서 조직된 사용자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1987년 아일랜드의 사용자들은 교섭의 재중앙화를 반대했다. 그들은 탈집중화된 교섭이 임금 완화에 대해 좀더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주당 노동시간을 39시간으로 한 시간 줄이는 것, 혹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의 증가와 같은 노조의 특수한 요구들은 거부했다. 정부는 그들이 협상테이블에 남아서 협상안에 서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이탈리아 사용자들 역시 협의제도에 대해 특별한 열정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들은 1993년에 도입되어 1998년에 확정된 단체교섭의 이중 구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연금개혁의 경우, 사용자들은 타협과정에서 조기에 철수했으며, 최종합의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결국 합의안은 정부와 노조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사용자의 협의적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태도는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아일랜드의 협의체제가 임금 완화와 이윤을 극대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임이 명확해질 때에만, 아일랜드의 사용자들은 애초의 회의적 태도를 바꿨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지난 몇 년간의 아일랜드보다 훨씬 더 열악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용자들은 훨씬 더 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며 노동시장에 대한 최근의 국가주도 탈규제 정책은 그들이 선호하는 정책이 되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노동과 국가가 중심적인 행위자이기는 했지만,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사회협약 역사에서 노조가 자신의 힘을 산업부문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이동하고, 그리하여 광범위하게 재분배적인 목적을 추구할 수 있었던 1930년대의 역사적 타협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물론, 기업들에 의해 직접 기획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새로운 협약들의 체계적 결과는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조합주의가 가지는 재분배적 특징을 가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부분은 1987년과 2000년 사이 71%에서 56.9%로 떨어졌다. 새로운 사회적 협약에서 노조의 역할은 국가경쟁력을 증진시키는데 동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서 노조는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접근권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정책의 분배적 결과를 견제할 수 있었으며 사회의 가장 약한 부문에 대한 부정적 효과를 제한할 수 있었다. 주어진 체계적 긴장을 고려할 때, 이것이 현재 노동이 할 수 있었던 최상의 것인가의 문제는 이 논문이 다룰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노조와 좌파의 미래가 그것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문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