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혁신(innovation)’을 말하고 있다. 『혁신으로 가는 항해』, 『창의와 혁신의 핵심 전략』과 같이 혁신을 전면에 내세운 책들이 등장한 데 이어, 최근에는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 “혁신 과제를 추진하는데 집중해 나가겠다”며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이해찬 총리에게 넘길 뜻을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정국 때 가진 ‘긴 휴가’ 중에도 사람들을 만나 혁신에 대한 의견을 듣고, 공부도 꽤 했다고 하니 뭔가 나오긴 나올 모양이다.
그런데 이 혁신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혁신이란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꼭 10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해냈다는 ‘세계화’라는 말과 비슷하다. 당시 그 의미도 불분명했던 그의 ‘세계화 선언’이 3년 뒤 ‘외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혁신하자!?”, 무엇을 위해서인지 밝혀라
우선 “혁신을 하자”라는 얘기는 아주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를 보좌하는 관료들이 강조하는 ‘국가 혁신 체제(National Innovation System)’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만 들으면 마치 ‘국가를 혁신하기 위한 체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국가를 혁신하기 위한 체제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 다양한 혁신 체제들이 존재할 뿐이다.
쉽게 얘기해서 국가마다 또 시기마다 서로 다른 혁신 체제들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즉 과거 박정희 정권에는 ‘국가 주도의 발전국가’라는 그 나름의 혁신 체제가 존재했고,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는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라는 혁신 체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에게는 ‘흑묘백묘(黑猫白猫: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로 상징되는 나름의 혁신 체제가 존재했다. 물론 노무현 정권에게도 우왕좌왕하기는 하지만 딴에는 혁신 체제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혁신을 하자”라는 얘기는 그 목적이나 효과를 또렷하게 하지 않는 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 정권이 강조하는 혁신 구호 뒤에는 아주 구체적인 목적과 효과가 숨어 있을 법도 하다.
사실 혁신은 그 태생부터가 아주 돈 냄새가 풀풀 나는 개념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온 ‘자본주의의 역동성’, ‘기업 활동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영학 교과서에 혁신이란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나, 경영학자들이 얘기하는 혁신이 ‘생산부터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의 변화를 꾀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여기서 혁신의 목적과 효과는 ‘더 많은 돈벌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국가 혁신 체제라는 용어도 1980년대 서구 학자들이 일본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노무현 대통령이 “혁신을 하자”고 외쳤을 때, 그 앞에 숨은 빈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바로 ‘기업과 시장이 좀더 많은 권한을 갖도록’, ‘기업이 돈을 더 잘 벌 수 있도록’,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와 같은 말이 그 빈 괄호 안에 채워질 말들일 것이다. 그럴듯한 말로 치장했지만, 결국 기업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은 다시 한번 반복하는 얘기에 불과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업들의 이해를 가장 잘 대변하는 보수 언론과 항상 으르렁대면서도 결국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노동자는 혁신의 부속품인가
여기서 반문이 나올 법하다. 그렇다면 ‘변화’를 어떻게 추동할 것인가? 혁신을 말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달라진 세상에 맞춰 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기본적으로 맞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낡은 가치관과 대응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과연 현재 노무현 정권과 기업이 가리키는 방향이 우리가 가야 할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인가라는 점이다. 대다수 노동자ㆍ서민은 일개 장기판의 ‘졸’처럼 시장이 또는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 정도로만 취급되고 있는 현실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다른 길’을 말하는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하다. 노동조합이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최근의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여기서는 자동차 산업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해보자.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연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것은 노동조합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결정은 노동운동 전체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렇게 큰 영향력을 지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조차도 급변하는 자동차 산업의 현실에 맞는 답을 찾고 산업의 미래를 친노동자적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제대로 노력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몇 년 전까지 30여개에 이르렀던 세계의 자동차 메이커는 GM, 포드, 도요타, 다임러 크라이슬러, 폴크스바겐, 르노 닛산, 현대로 통합ㆍ재편됐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경을 초월한 합병 바람이 자동차 업계에 거세게 불었고, 이것은 앞으로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겪은 패배감과 무력감은 우리도 익히 봐온 사실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여전히 이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초국적 자동차 기업들의 ‘몸집 불리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지,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대에 이르는 자동차 과잉생산은 어떻게 볼 건인지 등에 대해서 노동조합 나름의 입장과 대응 방향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안에너지 자동차’ 요구, 노조가 주도할 수 있다면
한편 세계의 초국적 자동차 기업들은 여러 가지 대안에너지 자동차의 개발에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석유 시대가 지금처럼 계속될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기업의 사활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환경 위기를 인류가 자동차 문명을 유지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대안에너지 자동차 개발에 대한 노동조합의 미지근한 태도는 더욱더 아쉽다. 물론 새로운 자동차 연구ㆍ개발은 기존 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여러 가지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노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노동자가 먼저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회사에 ‘변화’와 ‘혁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일상적인 경제 투쟁과 병행해 자동차 산업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정책 활동을 기획해 연구기관과 함께 보고서를 내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미래 환경에 대한 엄밀한 분석에 기반을 둔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의 지지를 엎는다면 경영진도 마냥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안에너지 자동차 개발 역시 마찬가지다. 연구개발 단계부터 직접 생산에 참여할 노동자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다면 좀더 인간적인 작업장에서 질도 뛰어난 자동차가 생산될 가능성도 커진다. 미래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품질에 달려 있다는 지적을 감안한다면, 이 역시 노동조합이 기업과 사회에 대해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돈 냄새나는 혁신, 사람 냄새나는 혁신
‘기업가 정신(Enterprenurship)’은 혁신과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세를 말한다. 주로 기업가가 혁신과 변화를 이끌어 경제 성장을 추동한다는 판단이 전제된 이 말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기업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처지가 반영돼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기업가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최근 국내외 언론들은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었다”며 공통적으로 “기업가 정신의 부재”를 그 한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새삼 대통령부터 기업들까지 한 목소리로 기업가 정신의 핵심인 혁신을 외치는 것도 바로 있어야 할 그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난데없이 죽은 정주영과 이병철이 드라마에 등장해, 전 국민에게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등장할 때다. 노동자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그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30여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서구에서 연 주역들이 바로 누구였는가? 만신창이가 된 서구 사회를 재건하고 복지국가의 틀을 만들었던 것은 나치에 부역한 기업가들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던 노동자와 그들의 정당이었다. 지금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면, 한 50년 후에는 ‘기업가 정신’보다는 ‘노동자 정신’이 변화를 상징하는 말이 돼 있지 않을까? 혁신이라는 말에 ‘돈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묻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