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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문화인류학(36집 2호)에 실렸던 논문 일부분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파업의 배경과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과 문화적인 갈등에 대한 해석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논문전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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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1996년 3월 27일 상급자로부터 신발 원자재가 낭비되고 있다는 꾸중을 받은 한국인 현장기술자 ‘미스 백’은(이름이 백장미) 열다섯명의 베트남 여성노동자와 두명의 한국인 기술자를 한 줄로 세워 놓고 훈계하며 신발로 얼굴과 머리를 때렸다. 이 사건은 (호치민시의 외곽의) 구찌(Cu Chi)에 위치한 (나이키 하청업체인) 한 다국적 기업에서 일어났다(Sigon Times Daily, 1996년 8월 1일).
위의 인용문은 1996년 봄에 발생하여 같은 해 여름까지 현지 언론에 의해 ‘백장미’사건으로 명명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일화의 일부분이다. 이 사건은 필자가 97년 여름 박사논문을 위한 예비조사를 행하던 시기에도 현지 다국적 기업의 경영인과 노동자는 물론이고 호치민 시민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었다. 이 상징적 사건은 베트남 현지언론, 서구언론과 민간단체(NGO), 베트남 국민들이 ‘도이머이(Doi Moi, 개혁정책)'이후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자본, 특히 한국자본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본격적인 현지조사 기간(1998년 9월~2000년 2월)동안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자본의 노동착취적 성격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베트남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매니저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 유달리 선정적인 보도를 하는 현지언론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생산현장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필자는 한국인 매니저와 베트남노동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실체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현지조사 초기 몇개월 동안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치민시 인근의 약 30여 개의 공장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한국매니저들의 진술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현지진출 초기에 여러 가지 요인들로 (예를 들어, 문화적 갈등,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잔존, 투자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인해 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이후 현지노동자를 다루는 방법을 체득하여 안정된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와 같은 진술에 접하면서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들이 초기에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의 성격이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문은 한국인 매니저들의 진술과 해석에만 의존해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했다. 한국인 매니저들의 설명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문화적 맥락, 정치과정, 베트남 노동자의 시각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호치민시에 위치한 한 다국적 기업(이하 SIL) -베트남 국영기업(이하 MAY)과 한국 사기업(이하 SI)의 합자기업-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의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대답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2. 파업은 왜 일어났는가?
1) 13월의 월급
SIL이 한국의 모기업으로부터 중고기계를 들여와서 설치를 끝내고 생산을 시작한 것은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난 1993년 봄이었다. 선진기술과 경영기법을 배운다는 합자기업 설립목적에 맞추어 대주주인 SI가 경영을 장악했으며 40여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현장감독과 기계관리를 책임졌다. 반면 베트남 측 파트너인 MAY는 250여명의 노동자를 전근시켜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일부 간부로 하여금 경영을 감시토록 했다. 이러한 구성으로 인해 회사의 모든 영역에서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지도 감독하는 민족 사이의 위계가 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작은 갈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양측의 감정이 쌓여갔지만 기본적으로는 생산의 안정성을 위협할 만한 커다란 문제없이 공장이 잘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트남노동자들의 불만이 위험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9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잠재적인 폭발력을 지니고 있던 이들의 불만에 불을 당긴 것은 ‘13월의 월급(thang luong thang muoi ba)’이라고도 불리던 ‘음력설(Tet)’ 보너스였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하에서 베트남의 국영기업체 노동자들은 음력설을 즈음하여 회사와 (회사가 이윤의 약 15%가량을 국가에 헌납한 후에) 국가로부터 이윤 재분배의 형태로 보너스를 받았다. 13월의 월급은 실제 액수와는 별개로 노동자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되찾아 간다는 사회주의적 소유와 분배 양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회사가 베푸는 보상의 형태로서 보너스와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외국경영진은 여러 이유를 내세우면서 이 보너스의 지급을 거부했다.
베트남노동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음력설 보너스’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외국경영진이 내세운 생소한 분배논리만이 아니었다. 거의 유일한 대규모 명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음력설이 다가오면서 노동자들은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가족, 친족, 친지들에게 선물을 해야 했고, 조상숭배도 해야 했고, 아이들에게 ‘리시 (Li Xi, 일종의 세뱃돈)’도 주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음력설을 즈음하여 보통 월급의 2~3배 가량의 돈을 지출하였으며 타지역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은 3~10일의 휴가를 받아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수년 동안 저축을 했다. 음력설 보너스를 주지 않겠다는 외국경영진의 결정은 베트남 노동자들의 사회적 유대와 그들이 문화적으로 유의미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물론 한국경영진도 설 보너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베트남의 설과 거의 흡사한 음력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경영진은 베트남노동자들의 음력설 보너스 요구가 전혀 다른 논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의식했다. 표면적으로는 회사가 아직 적자상태이며 음력설 보너스를 지출해야 한다는 회사규정이 없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베트남노동자들의 월급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회사가 보너스를 줄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경영진에 따르면, 무엇보다 “공산주의 분배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경영진은 설 보너스를 둘러싼 현지노동자와의 충돌을 단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주의적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와의 ‘기(氣)싸움’으로 여겼던 것이다.
한국경영진의 단호한 입장은 파업으로 이어졌다. 방적공장의 현지기술자들이 기계를 끄면서 시작된 파업은 ‘임시노동조합’의 간부와 일반노동자들이 동조하면서 공장전체를 하루동안 완전히 마비시켰다. 이 파업은 비록 이틀만에 잠정적인 합의를 만들어내며 끝났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청년(Thanh Nien)」이나 「부녀(Phu Nhu)」와 같은 현지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 추후 BBC 태국지국의 집중적인 취재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경영진은 모기업 회장의 지시를 베트남 측 파트너는 당과 정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협상에 난항이 있었다. 하지만 전례 없는 파업을 빠르게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양측 파트너와 지역노동조합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파업은 예상 밖으로 싱거운 결말을 맞았다. 무엇보다 파업을 주도했던 숙련노동자들과 임시노동조합 간부들이 사태의 악화를 바라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전에 일했던 MAY에서 소위 핵심에 위치했던 노동자들이었다. MAY에도 사회주의국가의 공장체제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핵심(core)과 주변(periphery)노동자로의 이분화(bifurcation)가 존재했다(Burawoy and Lukacs 1992; Jovitt 1992; Norlund 1995). 이들 핵심노동자들은 대부분 출신성분(thanh phan xa hoi), 연줄, 기술 등을 바탕으로 당, 노동조합, 회사간부로서 활동하면서 특혜를 누려왔거나 장래에 특혜를 누릴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핵심노동자들은 일반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일보직전까지 쌓였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파업에 앞장섰던 데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자본주의 공장체제 아래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것이 자신들이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경영진과 현장매니저들은 베트남 측 파트너의 간섭을 피하고 공장 내에 관리가 용이한 새로운 핵심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들의 (특히 공산당원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이에 대응하여 핵심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자신들이 일반노동자에 대한 실질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 무엇보다 만족했다. 당과 베트남 측 모기업이 원하는 안정적 합작기업 운영에 거슬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할 의도는 예시당초 없었다.
협상에 참여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했다는 판단을 하게 됨에 따라 파업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쉽게 마무리되었다. 한국 경영진은 한 달의 월급을 설 보너스로 지급하는 대신 추후에는 13월의 월급의 관행 대신 회사와 노조의 협상에 의해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전 사회주의공장의 핵심노동자들은 임시노동조합을 법에 따라 조속하게 정식노동조합으로 변환시킨다는 것과 현장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할 위원회의 구성에 합의함으로써 영향력을 회복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베트남 측 파트너, 당, 정부 등은 자국노동자와 외국투자기업 양자의 원망을 사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중재가 되었다는 점을 중시했다. 대조적으로 일반(혹은 주변)노동자들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명백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가진 불만의 실체가 제대로 전달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핵심노동자들의 지도력 없이 이러한 불만을 조직적으로 표현해 본 경험도 힘이 없었다.
2) 공장체제의 변환과 불만의 누적: 노동강도의 강화와 자율성의 상실
일반노동자들이 파업의 결말에 상당히 실망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들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업을 일으킨 것은 음력설 보너스를 받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공장체제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공장체제에서 일하면서 경험해야 했던 여러 가지 고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새로 설립되는 자본주의적 합자기업에 전근을 자원할지를 고민할 무렵 MAY의 노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외국자본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고용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고, 현장관리가 혹독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이들이 전근을 결심한 것은 자본주의적 공장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신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많이 달랐다.
우선, SIL이 초기에 지급한 법정최저임금(월 45달러)은 MAY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오히려 작았다. 이들이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회사의 약속대로 임금이 매년 7~10% 정도 상승하면 몇 년 후 MAY에 남은 옛 동료들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미래형 사실뿐이었다. 이런 현실 때문에 회사가 이익을 내면 그 일부가 MAY에서처럼 연말에 자신들에게 분배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기대야 했다. 게다가 SIL에 설치된 기계가 상대적으로 덜 낡은 중고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노동과정, 기계의 종류, 요구되는 기술 등에서 이전 사회주의 공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자기개발을 목표로 전근을 결심했던 노동자들은 큰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들이 경험한 양 공장체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적 공장의 일이 훨씬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노동강도가 훨씬 높았다. 이전 사회주의적 공장에서는 기계부품이 부족하고 원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이따금씩 발생하여 휴식을 취할 기회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에 맞추어 같은 반원들끼리 일의 속도와 분량을 조정할 여지가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특징의 하나인 결핍경제(shortage economy)”(Burawoy and Lukacs 1992: 18)가 노동강도를 낮추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MAY가 남부에서 가장 큰 섬유업체의 하나였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지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았지만 사회주의 베트남 전반에 퍼져있는 결핍된 생산여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반면 SIL은 기계보수와 부품공급에 훨씬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으며 생산이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한국인 현장매니저들은 생산과정과 생산물에 대해 훨씬 높은 기대를 가지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자연히 실제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노동강도가 강화되었다.
둘째로,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었던 재량권이 현격하게 줄어들어 감에 따라 일이 훨씬 강제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MAY에서 일할 때에는 소위 “몰아치기 생산(storming production)”(Jovitt 1992)이 많아 일이 매우 불규칙했으며 이에 따라 각 노동조직의 자율성과 단합이 중시되었다. 특히 팀원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일이 적을 때는 일감을 적절하게 분배하고 일이 많을 때는 단합하여 한꺼번에 생산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조장이나 반장은 불규칙한 생산목표를 원활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동료 노동자들의 동의와 신뢰를 얻어야만 했다.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 MAY에서는 같은 생산 하부조직에 속한 노동자들끼리 차를 마신 뒤 일을 시작했으며 그 날의 생산목표와 역할분담 등에 대해서 서로 협의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에 비해 SIL의 한국인 현장매니저들은 생산과정을 감독하면서 노동자들과 일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목표량을 지시하거나 불량품에 대해 질책하는 경우에만 대화가 이루어졌다. 일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언어의 장벽도 높았다. 이런 환경의 변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의 “관료적 유형(bureaucratic pattern)”(Burawoy 1985; Gouldner 1954)이 동의보다는 강압에 기반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소위 브레이버만(Braverman 1974)이 말한 “계획과 실행의 분리” 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셋째로, SIL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보상받기보다는 징벌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MAY에서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장체제의 독특한 제도적인 장치들 때문에 노동자를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전의 공장에서는 ‘보뚜(Bo Tu)'라고 불리는 사위일체 - 공산당, 경영진, 노동조합, 청년동맹 또는 여성동맹-의 원칙 하에 노동자의 권익에 관련된 문제가 다루어졌다. 경영진이나 생산현장의 간부가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는 다른 조직과 지루한 협의를 거쳐야 했다. 물론 보뚜의 중심에 있거나 연줄이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 사이에는 권익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징벌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다. SIL에는 이러한 보호장치가 없었음은 물론 법에 명확히 저촉되지 않는 한 외국매니저의 강압적인 행위들에 대해 호소할 제도적인 장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MAY에서는 생산의 성과급제도 특히 생산량 측정에 따른 성과급(piecework)이 존재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은 일이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다고 느낄 여지가 있었다. 반면 SIL의 경영진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생산량 경쟁이 불량품을 양산할 위험이 있으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 중요한 것은 철저한 생산관리라고 믿었다. 계획경제 하에서 MAY의 생산목표가 질보다는 양에 중점을 둔 반면 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이 다국적 공장은 양 못지 않게 질을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SIL은 A에서 D까지 4등급으로 노동자의 일을 평가해 매월 보너스를 차등지급했다. 문제는 아무 차질 없이 지시에 따라 생산을 마쳤을 때는 A를 받지만 불량품을 생산하거나 매니저에게 불만을 표시했을 경우 등급이 낮아진다는 점이었다. 잘하는 경우 더 받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경우 덜 받는 보너스 제도가 보상보다는 징계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새 공장체제에서는 보호와 보상이 줄어들고 징계와 감시가 강화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3. 결론
다국적 공장에서 외국경영진이나 매니저들이 현지노동자와 일으키는 갈등의 성격을 한두 가지 요인으로 축약해 일반화하기 힘들 것이다. 이 공장의 사례에서도 경제적인 요인, 노동강도와 통제 양상의 변화, 문화적인 차이, 민족적 정체성과 같은 많은 요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양자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결국 파업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다. 문제는 이 요인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위에서 제시한 민족지적 사례가 이 관계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 일 것이다.
이 다국적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던 이유는 표면적으로 13월의 월급으로 불리던 음력설 보너스 때문이었다. 음력설이 베트남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파업의 문화적 성격을 경시하면서 정치경제적인 원인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것은 단순한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파업의 문화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확대해석 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것 같다. 파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베트남 노동자들이 경험해야 했던 제반 변화들을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공장의 베트남노동자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좌절의 내용과 이를 정치적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인 것 같다. 이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적 공장체제에서 양성되었으며 자본주의적 공장체제로 전근한 뒤 노동강도와 노동통제의 강화에 적응해야 했다. 이들은 한편으로 갑자기 주어진 노동조건의 악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를 몰랐다. 유일한 탈출구는 한국인 매니저들의 민족성에 대한 부정적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거나 때때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강도 높게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 전개된 전례 없는 파업은 여러 가지 좌절감을 견디면서 가졌던 이런 기대가 환상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발생한 집단적 반응이었다.
파업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이들이 단결력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좌절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좌절을 조직화할 수 있는 지도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공장체제 하에서 핵심노동자로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기술적 우위와 베트남 측 모기업에 가진 연줄을 자산으로 일반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한 파업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이들이 파업을 이끌고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행한 것은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외국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지도부의 이런 성격 때문에 파업은 일반노동자의 좌절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파업을 이끈 자체로 주요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은 지도부가 더 이상의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파업의 성격을 경제적인 문제로 국한시킨 뒤 이것이 일부 충족되자 협상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인 투자기업이 초기에 흔히 겪는 노사갈등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정과 노동통제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를 훈육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좌절감의 산물인 것 같다. 특히 국영기업체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베트남노동자와 자본주의적 사기업에서 일하던 외국인 매니저가 합자기업에서 같이 일하면서 갈등을 빚는 것은 양자가 속해있던 공장체제의 차이를 고려할 때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규의 원인을 임금인상 요구나 우연적인 폭력사태 등에 국한시켜 설명하려는 것은 현상추수적(phenomenological)해석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 제시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갈등의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노동환경의 변화와 구체적인 정치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다국적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진정한 맥락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 참고문헌 ]
Braverman, Harry
1974 Labor and Monopoly Capital: The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Burawoy, Michael
1985 The Politics of Production: Factory Regimes Under Capitalism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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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awoy, Michale and Janos Lukacs
1992 The Radiant Past: Ideology and Reality in Hungary's Road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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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Patterns of Industrial Bureaucracy, New York: The Free Pres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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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vitt, Ken
1992 New World Disorder: The Lennist Extinction, Berkeley: Univ.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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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lund, Irene
1995 “Vietnam Industry in Transition: Changes in the Textile Industry,”
In I. Norlund, C. Gates, and Vu Ca Dam(eds.), Vietnam I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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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on Times Daily, 1996. 8.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