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국민연금의 비밀'이라는 글이 인터넷을 통해 급격히 확산되면서 촉발된 국민연금 논란은, 새삼스럽게 일반인들이 국가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해명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고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에서 '국민연금의 필요성'을 역설해도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들을 잡을 수 없었다.
블랙 박스에 숨은 정책 결정 과정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분노할 기회라도 갖는 경우는 오히려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사람들이 비교적 자기 일로 여기고 그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책이었지만, 이해당사자들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아예 모르는 채 넘어가는 정책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것은 '전력 정책'과 같은 과학기술 영역일 것이다. 우리들은 전기가 끊기면 하루도 제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전력 정책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국가의 의사 결정은 '블랙박스(Black Box)' 속에 숨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비교적 국가의 여러 가지 정책에 시민들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그래서 우리보다 더 국가를 신뢰하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서 국민들이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 사태일 것이다.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캘리포니아 에너지 정책 보좌관을 지낸 우드로 클락은 "지금도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여름만 되면 언제 전기가 끊길 줄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며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가장 관심 있는 주 정부의 정책 중 하나는 '에너지 정책'"이라고 분위기를 전한 적이 있다. 사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정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앞 다퉈 전력시설 민영화를 추진할 때만 해도, 그 결과로 전기가 끊겨 냉장고를 가동 못하는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과학기술 정책을 국가 관료들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나중에 큰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고속철도가 도입되면서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 기존의 열차 노선이 삭제돼 훨씬 많은 교통비를 지출하는 불편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서민들 대다수도 비슷한 처지다. 그들 역시 고속철도가 서울과 부산을 2시간만에 이어주는 '꿈의 교통수단'이라는 홍보를 믿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지, 그게 서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막대한 세금으로 조성된 고속철도를 전보다 훨씬 비싼 요금을 치르면서 이용하고 있다. 앞으로 여러 가지 과학기술이 우리 삶에 더 많이 개입할수록 이런 일은 더 늘어날 게 뻔하다.
세금 내는 거 아까우면 어떻게 쓰는지도 관심가져야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한국 사회의 조세 저항은 상당히 큰 편이다. 솔직히 세금을 내도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는 게 별로 없는 많은 사람들이 세금에 대해 부담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월급에서 한 달에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국민연금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반감은 그것이 왜곡된 형태로 표현된 예이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이렇게 세금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정작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 산업자원부의 에너지 관련 예산은 2조원으로 전체 예산 110조원의 약 2% 수준이다. 여기에 다른 부처의 에너지 관련 예산까지 추가하면 그 규모는 더욱더 커진다. 중소도시 3∼4개의 1년 예산이 국가의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는 데 든다. 과학기술 연구개발비의 규모는 5조6천억원 정도로 그보다 더 많다. 물론 이 돈은 모두 우리가 낸 세금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성격상 처음부터 전적으로 세금에 기반을 두고 이뤄지는 정책들이 좀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납세자들이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일반인들이 정부 정책에 호기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스스로 '학습'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 논란을 겪으면서 사회보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이해력은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국민연금 논란이 한창인 게시판에는 사회복지 전문가 뺨치는 정치한 논리를 펴는 '평범한 시민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제 이후 비슷한 정책이 검토될 경우, 관료들이나 전문가들은 더욱더 일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또 이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그 사회의 '학습 능력'은 향상된다.
일반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관료들과 전문가들에게 당장 귀찮은 일일 테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결코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사회가 점점 민주화될수록 정책의 정당성이 중요시된다. 새만금 간척사업, 핵폐기물처리장, 고속철도 계획 단계에서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쳤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사업이 늘어지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국민연금 논란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터무니없이 '덜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을 무리하게 도입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만약 당시 덜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 도입에 대해서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쳤더라면 지금의 국민연금 논란은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참여 길 여는 합의회의
과학기술 정책을 비롯한 국가 운영에 일반인들의 개입 요구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서구에서는 1980년대부터 다양한 방식의 시민 참여 제도가 도입되었다.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시민 배심원(citizen jury), 시나리오 워크숍(scenario workshop), 시민자문위원회(planning cell), 포커스 그룹(focus group),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합의회의'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기술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적으로 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시민 참여 제도"로 정의된다. 전력기술 정책 등을 결정하기 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그래서 관심도 없었던 평범한 시민들(lay people)의 견해를 듣기 위해 마련된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 제도인 것이다.
1987년 덴마크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된 이래 14개국에서 50회 이상의 합의회의가 개최되었다. 특히 덴마크에서는 매년 1∼2차례 과학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합의회의를 개최해 왔는데, 이를 의회가 직접 주관하기 때문에 합의회의에서 나온 보통 시민들의 의견은 정책 결정 과정에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미친다.
덴마크를 비롯한 각국 합의회의 주제를 살펴보면 실로 다양하다. 대기오염, 승용차 이용의 미래, 전자 주민 카드, 식품과 환경에서 화학 물질의 위험성 평가, 유전자 치료, 유전자 조작 식품, 생명공학을 이용한 해충 통제, 국가 전력 정책, 핵폐기물 처리, 원격 통신과 민주주의의 미래 등등.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 1999년(생명 복제 기술) 두 차례에 걸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주관으로 개최됐으나 언론의 외면으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부나 의회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만약 그 때 합의회의에 참가한 보통 시민들의 결론("생명공학의 발전을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는 생명윤리 원칙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에 정부나 정치인들이 관심을 기울였다면, 한국이 '인간 배아 복제 연구의 천국'이 되는 일 따위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력 정책의 미래에 대한 합의회의'를 주목하라그런데, 올해 10월 개최될 '우리나라 전력 정책의 미래에 대한 합의회의'는 예년과 분위기가 좀 다르다. 지난 두 차례의 합의회의 실무를 도맡아 왔던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에서 주최하는 이번 합의회의는 원자력 발전을 확대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력 정책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직접 평가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6월22일부터 7월11일까지 전국에서 176명의 시민들이 신청을 했고, 최종적으로 18명의 시민패널이 선정됐다.
이들 시민패널은 24일 1차 예비모임을 시작으로 3개월 동안 전문가들에게 전력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를 전달받는다. 시민패널들은 이 정보에 기초해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기본적인 '상식'에 기반을 둔 질문거리를 만들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10월에 열릴 3박4일간의 본회의 때 시민패널들은 전문가들의 답변을 정리, 평가한 후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게 된다. 이 최종 보고서에는 시민패널이 3개월 동안의 합의회의 기간 동안에 얻은 결론과 정책 권고 사항, 향후 더 연구되어야 할 사항 등이 포함된다. 최종 보고서는 합의회의 이후 언론, 정부, 의회 등으로 보내져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합의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뭘까? 법적 권위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나 의회에서도 '눈 딱 감고' 결과를 무시하면 그만이다. 한 줌도 안 되는 비전문가들의 목소리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합의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합의회의에서 시민패널들이 다룬 주제를 사회적 공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전력정책에 대한 합의회의가 없었다면, 그것은 계속 정부, 사업자, 환경단체 그리고 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 부지 예정지 인근 주민들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18명이 3개월에 걸쳐 심사숙고해 내놓은 결과물과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덴마크 등에서 언론이 합의회의 전 과정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일반 국민에게 알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쉽다, 노동조합 참여
이번 전력정책과 관련된 합의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처음부터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이해 당사자 대접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합의회의를 진행할 조정위원회에는 정부, 업자, 환경단체, 언론계 인사들이 포함됐지만 노동조합 인사는 누락됐다. 여기에는 에너지 문제에 관해서는 사용자의 입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노동조합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간 노동조합은 전력 사업 민영화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지만, '민영화 이후'에 대해서는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반면에 최종 선정된 18명의 시민패널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이들은 작업장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이해관계를 확장해 국가 전력 정책에 대한 균형 있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들이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또 국가 정책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쌍심지를 켜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펀치'를 날릴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