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적어도 일부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조주은)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전순옥)
노조 간부가 들어야 할 ‘쓴소리’
얼마 전에 노동학자 전순옥 씨와 여성학자 조주은 씨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최근 노동운동에 대한 쓴소리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진짜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놓아 많이 당황스러웠다. 다 알다시피 전순옥 씨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으로 한국 노동운동 안팎에서 그 성장 과정을 함께 해온 산 증인이다. 여성학자 조주은 씨는 현대자동차 현장활동가였던 남편을 따라 울산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최근 현대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분석한 『현대 가족 이야기』(이가서/2004)라는 책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당대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두 분의 입을 통해 나온 목소리라서 그런지, 그 울림이 더욱 컸다.
사실 현재의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다양한 비판이 있었다. 노동운동을 흠집 내는데 급급한 악의적인 비판도 많았지만, 앞에서 인용한 두 분의 얘기처럼 사실에 근거한, 그래서 더욱더 곤혹스러운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것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여성 노동자의 입을 통할 때처럼 노동운동 내부에서 나오는 강한 ‘자기비판’일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이처럼 ‘억압받는 노동자’가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지 못 하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여러 가지 것들을 동시에 고민하고 실천해야겠지만, 우선 노동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항상 ‘기본’을 제대로 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법이다.
일상생활 바꾸는 노동교육 어디 없을까?
그 동안 노동교육은 주로 노동조합의 사업과 맞물려 조직활동을 강화하고, 앞에서 활동을 이끌 수 있는 활동가를 양성하고, 조합원들의 의식을 고양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 있었다.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동교육의 내용이나 제도적 측면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여전히 현실은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노동교육 방법은 강연을 주로 하고, 다양한 형태의 실습을 중간에 끼워 넣는 식이었다. 최근에는 기존의 방법을 보완하기 위해 기존 강의와 실습에 토론식, 체험식 방법과 같은 참여교육의 방식을 가미해 교육 효과를 높이는 것을 모색하고 있다. 강의를 통해 제공된 여러 가지 교육 내용을 조합원들이 직접 토론을 하거나, 조합원들이 역할연기를 통해 모의교섭, 상담훈련, 회의훈련, 현장방문 등을 하는 것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 글쓰기, 강의ㆍ상담 훈련 등을 직접 실습해 보는 것도 참여교육의 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동교육은 여전히 노동조합의 방침을 알리거나 단기적인 실천에 도움이 되는 데 그치고 있다. 노동자의 의식이나 일생생활을 바꾸는 데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것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앞에서 열거한 토론식, 체험식 방법은 노동운동의 경험에 다양한 성인교육 방법론을 결합해서 나온 결론이다. 그렇다면 최근 청소년 상담 등에 활용되고 있는 연극을 적극적으로 노동교육에 결합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을 통한 교육
우선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이라는 생소한 연극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그의 개인적인 이력을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1931년생인 그는 20대부터 20여년 동안 브라질에서 연극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브라질의 엄혹한 정치 상황 속에서 반독재 운동에 나서면서부터는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40대 때부터 20여년간 남아메리카와 유럽을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체계화한 대안적인 연극 이론이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Theatre of the Oppressed)’이다. 1986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브라질 노동자당(PT)에 입당해 1992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그 후 최근까지 연극 활동과 정치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그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은 19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그 중에서 특히 노동교육과 연관해 ‘토론연극(Forum Theatre)’과 ‘욕망의 무지개(The Rainbow of Desire)’라는 형식에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토론연극’은 보알이 망명지인 페루에서 문맹퇴치 사업에 참여했던 1973년에 만들어졌다. 토론연극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동등한 비중으로 극중 현실에 참여하게 된다. 우선 미리 준비된 10분에서 15분 정도의 공연을 관객 앞에서 보여준다. 이 준비된 공연 속에는 항상 문제 상황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더 나은 해결책이나 대안이 있는 관객은 무대 위로 올라가 연극 속에 끼어 들어 그 대안을 직접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 관객은 자신이 들어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잠깐!”을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럼 관객이 원하는 지점부터 장면을 다시 시작하며, 관객의 개입에 의해 극의 흐름과 결말은 원래의 것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 같은 토론연극이 의도하는 바는 관객이 공연 주체가 되어 자신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경험한 문제들을 연극을 통해 객관화해보고, 그 해결책을 스스로 제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현실의 억압과 문제들을 토론연극을 통해 직접 대면하고 객관화함으로써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음 상처까지 보듬는 ‘욕망의 무지개’
토론연극이 다양한 사회 문제와 같은 ‘외면적 억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욕망의 무지개’는 개인의 내면적인 상처를 가시화시킴으로써 주인공의 문제를 객관화시켜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형태다.
참여자들이 상처를 남기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한 억압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 중에서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 하나를 선택해 관객과 배우들은 주인공이 겪었던 구체적인 사건을 짧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즉흥극을 토대로 주인공은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던 마음 속의 욕망을 끌어내서, 관객과 배우들이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도록 한다. 그러면 각각의 욕망들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준 사람(또는 사회 문제)과 대결하거나, 현실에서 그 욕망을 이끌어내지 못한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인공과 관객들은 주인공이 처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실현 불가능했던 다양한 욕망을 가상으로 구현해봄으로써 주인공의 상처를 치유하고 대안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책 『욕망의 무지개』에는 이러한 극 형식을 실제 활용한 사례들이 담겨있다. 198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페드로라는 한 젊은 음악가는 낮은 임금에 항의하기 위해 레코드 회사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찾아갔다. 불행히도 그 농성은 사측의 편에 선 다른 동료 음악가가 권총을 빼들며 페드로와 동료들을 위협하면서 무산됐다. 이것은 페드로에게 동료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형성했는데, 보알은 이 페드로의 경험을 욕망의 무지개를 통해 재구성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밖에 보알은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이중의 억압을 받는 인도 여성들에게 이 형식을 적용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보알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겪는 가정·청소년 폭력, 여성 차별, 실업과 같은 다양한 사회 문제(외면적 억압)부터 특정한 경험으로부터 마음 깊이 새겨진 두려움, 자신감 결여, 상처 등(내면적 억압)을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연극인들이 노숙자, 소년원 수감자, 교사와 학생들에게 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을 적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우리 안의 차별과 편견을 드러내자
최근에 보알은 브라질의 노동자당 시의회 의원으로서 ‘입법연극(Legislative Theatre)’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 시민들이 직접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참여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이 시도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을 노동교육에 접목시킬 수 있다면,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을 바꾸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갈등의 해법을 찾는데 보알의 ‘토론연극’이나 ‘욕망의 무지개’를 도입해 본다면 어떨까? 또 직장 내 성차별이나 이주노동자, 장애인에 대한 노동자들의 편견을 없애는 데도 이런 보알의 연극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기업주보다 오히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외면하는 동료 정규직 노동자에게 더 큰 원망과 불신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런 갈등 상황을 ‘욕망의 무지개’를 통해 구현한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갖고 있는 갖가지 피해의식과 욕망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연극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속내를 알고 소통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렇게 마음을 연 다음에야 ‘공동의 행동’이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차별과 같은 문제는 토론연극이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성차별이나 또는 성희롱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후, 그 문제가 유야무야 해결되는 현실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런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해결책에 대해 남성, 여성 노동자들의 다양한 개입을 유도한다면, 그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대안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새로운 대안이 안 나온다 하더라도,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공론화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한 때 노동자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목소리에 대한 메아리는 거의 없다. 이런 사정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대다수인 현실에서 더 이상 ‘다른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전망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노동자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노동자,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해방하는 노동자를 기대하는 것은 결국 지금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