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기억은 정확치 않다. 아마도 내 나이 30대 후반이었을 게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갑내기 동료가 있었다. 그는 노동조합이나 정치에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업무에도 시큰둥했었다. 주변 동료들이 힘들어도 자신의 용무시간을 충분히 사용했고, 아는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손님 접대를 위한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식이었다. 무엇보다 그 친구에게 가장 큰 관심사항은 근무를 마치고 난 이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대에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유일하게 그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워낙 깔끔한 멋쟁이인데다 노는 것과 술을 좋아해서 그래도 동료들에게 크게 인심을 잃지 않았지만 밉상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 날도 그는 작업을 마치기 전부터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이미 퇴근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때 누군가 내게 386세대가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열심히 구두를 문지르고, 기지바지의 먼지를 털어 내던 그 친구가 한 마디 했다.
"그거 임마 386, 486, 586하는 컴퓨터 아이가. 컴퓨터 안 써봤나?" "새끼야 그거말고 운동하는 애들 말이야" "아! 고것 386세대, 임마 나도 386세대 아이가, 가들 우리하고 똑같다" "미친 새끼! 너 대학 나왔나? 대학 나온 놈이 이런데서 뺑뺑이 도나?" "대학이 뭐한데 필요 하노. 대학을 나왔기나 말았기나 가들 우리하고 같은 세대니까 나도 386이라고 하는 거 아이가"
학출인 '그들'과 노동자인 '우리'
60년대 태어난 많은 '우리'들은 공고나 상고에 진학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술입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공고들이 우후죽순으로 세워졌고 고급엔지니어를 배출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돈 없고, 빽 없고, 공부도 별로인 대부분의 청년들은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도 그랬거니와, 죽은 이후에도 공고 출신들은 대부분 생산공장의 하급관리자이거나 평생 콘베어를 타는 노동자로 살았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 차장이나 부장쯤 해 먹으려면 못해도 4년제 지방대학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한다. 고졸 출신 중에 더러 가뭄에 콩 나듯 과장, 차장급의 관리직을 꿰어 찬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생명은 길지 않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드리고 과·차장 되는 것에 대한 꿈은 접고 산다. 부장, 이사, 상무가 되는 것은 당연히 대학을 나와야하고, 대학 나오지 못한 인간은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부장, 이사, 상무가 '우리'가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이듯, 학출이라는 신분 자체가 '우리'라는 경계를 넘어서 있다. 지금은 대졸 신입 사원의 신분이 우리의 동지요, 노동자로 인정되고 있지만 그들은 질이 다른 '우리'인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그 동지들은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고급 관리자로 변화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가는 동지는 결코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대표적인 386세대 조승수 동지가 당내 경선에 나섰을 때부터 본선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현장출신 예비후보가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조승수 동지를 지원한데는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지역에서 쌓은 경력만큼 당선가능성이 누구보다 높았고 준비정도가 충실했으며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번에는 기필코 진보정치의 50년 숙원을 반드시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입김이 절대적인 이 지역에서 조승수 동지는 시의원, 구청장에 도전할 때마다 현장노동자 출신이 아니라는 현실의 벽에 부닥쳤다. 그때마다 나는 현장출신 노동자냐, 학출이냐를 가지고 후보의 적합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출신성분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우리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데 적합한 것인지를 판단했으며, 뜻을 같이하여 길을 함께 가는 이상 학출이든 현장출신이든 노동자들의 후보였고 우리의 동지였다. 노동자들 앞에서 조승수 후보를 선전할 때 운동원들은 '노동자후보 조승수'라고 얘기했고, 노동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386이 권력이라면 그것은 투쟁의 산물이다
87년말 운동에 뛰어들던 무렵, 나는 학출 선생님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386세대의 선배격인 K, L의원은 우리의 선생님 노릇을 여러 차례 했으니까 그들도 나를 기억할 것이다. 반면, 지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된 386세대들은 개인적인 인연이 없다. 그러나, 내노라하는 일류대학의 학생회장이나, 전대협 의장출신인 그들과 우리는 같은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며 짱돌과 화염병을 함께 던졌을 것이다. 백만 학도와 천만노동자의 노학연대를 외치면서 말이다. 그때 그렇게 흘렸던 땀과 눈물과 피의 역사가 한편으로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자산이 되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만든 민주노동당의 자산이 되었다.
한때 '우리'와 같이 민중당을 함께 했던 '그들'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보수 정당으로 떠나 감감 무소식이다. 민주당으로 들어간 '그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열린우리당으로 쏠린 386세대들이 정확히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제껏 자신들이 해왔던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들의 고뇌를 이해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그들에게서 어떤 희소식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의 이름으로 묻히고, 노무현의 정책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 속에 그들의 어떤 그림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아직 못 돌아오는 그들처럼, 민주당에 몸담으며 탄핵사태에 동조했던 그들처럼, 열린우리당에서도 노동자와 민중을 수탈하는 지배구조에 안주하는 386세대라면 그들은 지나온 투쟁의 역사를 사적인 권력추구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동시대를 살며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사실 '통박'으로 승부하고 판단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수정당에 들어간 386세대 정치인에 대한 기대는 이미 녹슬어 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벌한 구호를 외치던 시절부터, 이한열의 시체를 앞에 놓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동지가를 부르던 시절로부터 우리 모두는 변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구호로 밥을 먹는 노동운동가의 저급한 수준이 될 것이기에 꺼내지 않겠다. 다만, 보수정당에 뛰어들어 뭔가를 해 보겠다던 초심에 비춰보면 최소한 386으로 지칭되는 운동세대의 정체성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그 안에서 사적권력과 이해를 추구하는 계파구조에 줄서지 말고, 그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386세대의 작지만 뚜렷한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얘기다.
한가지 더 당부하면 수구언론과 논객들에게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쭐거리는 강아지를 무대 위에 올려놓고 가소로운 단죄를 해대는 저들의 비아냥거림을 보면 함께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해도 수구꼴통들의 타켓을 벗어나기 힘들겠지만, 운동판에서 굵은 판단과 능력이라면 능히 저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맨 앞에 소개한 에피소드의 결론을 내려야겠다. 60년대에 태어나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운동권 세대, 나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고 세상의 변혁과 진보를 위해 힘써 왔지만 결코 대학을 다녀 본 일이 없기에 이들의 부류에 속할 수는 없을 터이다. 386의 주류이든 아니든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면서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많은 386세대들은 노동, 농민, 시민사회운동, 경제 등 각 부문의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중추로 기능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동세대들에게 연대와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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