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에서 사회통합 가능한가

노동사회

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에서 사회통합 가능한가

admin 0 5,616 2013.05.12 07:27

노동통제, 노동시장, 노동운동의 복합으로 구성되는 '노동체제(labor regime)'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변화, 정치체제 변화의 영향 속에서 단계적 형성과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고 있던 한국의 '억압적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 노동체제는 (주변부) 포드주의적 축적체제 및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맞물려 있었다. 자본재와 중간재, 그리고 생산기술을 해외에서 도입하고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하여 대량생산 체제를 유지하며, 생산물의 판매 시장 역시 해외 시장에 의존하는 이 축적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저임금과 고강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잠재적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병영적 노동통제, 억압적 정치체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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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의 집회 모습 ]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노동체제의 해체

이 노동체제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급격히 해체되었는데,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위기와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그 배경이 되었다면(경제위기와 정치위기), 노동체제 내부에서는 무엇보다도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극적으로 진행된 한국 노동운동의 급성장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1987∼89년의 3년여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의 대중적 계급투쟁을 통해 잠재적 계급역량을 조직적 계급역량으로 성장, 전화시켜 작업장 수준과 정치적 수준 모두에서 더 이상 수동적 통제의 대상이 아닌 독자적 계급행위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켰다. 

그러나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노동체제의 해체가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노동체제의 형성으로 곧바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노동체제가 더 이상 정합적 노동체제로서 존속할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도 국가와 자본은 여전히 낡은 노동체제를 유지하거나 다시 강화하려 시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작업장 수준과 정치적 수준 모두에서 자본과 노동, 국가와 노동간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95년 민주노총의 출범은 결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제 한국의 노동체제가 더 이상 과거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게 되었음을 확정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노동체제로의 전환이 국가, 자본, 노동의 행위주체들 중 그 어느 한편의 의지에 의해 결정될 수 없고 대립과 갈등, 교섭과 투쟁과 타협의 효과들이 누적되는 연속적 과정 속에서 그 방향이 정해져 나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limyil_02.jpg1987년 노동체제

필자를 포함하여 노동문제 연구자들은 이를 잠정적으로 '1987년 노동체제'로 부르고 있다. 1987년의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되어 1997년 경제위기 시기까지 계속된 이 노동체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체적 특징을 지니는 것이었다. 

첫째, 이 체제는 매우 제한적이고 불균형한 제도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노사관계의 층위를 정치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 그리고 작업장(기업) 수준으로 나눌 때, '1987년 노동체제'는 작업장 수준의 노사관계만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어 있었을 뿐, 사회적, 정치적 수준의 노사관계 제도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작업장 수준의 노사관계 제도화 역시 매우 제한적이어서, 주로 기업단위 노조들이 상대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부문들(대기업들, 공공부문, 그리고 일부 성장산업 중소기업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둘째, 매우 높은 수준의 갈등을 수반하는 체제였다. 이 갈등은 사회적, 정치적 수준의 노사관계 형성 혹은 제도화가 지체 혹은 거부되고 있는 상황에서 빚어진 사회정치적 갈등, 그리고 작업장 수준에서의 격렬한 노사대립으로 표출되었다. 노동운동은 이 시기 동안 대체로 '조직화-연대투쟁'모델로 볼 수 있는 운동 노선을 견지했는데, 그 기반은 노동운동의 지도부와 현장 노동자들 사이의 높은 호응성 관계에 있었다. 흔히 '현장 장악력'이라 일컬어 졌던, 작업장 수준에서 촘촘히 짜여진 활동가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그물망 조직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했다. 

셋째, 그러나 '1987년 노동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 기업별노동조합이라고 하는 매우 분산적인 노동조합 조직체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기업별노조 체계는 한편으로는 지도부-평조합원 사이의 호응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조직체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노동운동의 지향을 폭넓은 사회, 정치적인 쟁점으로 이끌기보다는 기업(작업장) 수준에서의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로 수렴되게 하는 질곡이기도 했다.

사회적, 정치적 수준에서 제도화된 노사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작업장 수준에서의 강도 높은 갈등과 대립을 수반하는 기업별 노사관계에 기초한 이 과도적 노동체제는 1997년의 노동법 개정, 그리고 'IMF 체제'의 경제위기를 경과하면서 강력한 전환의 압박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초반의 노경총 합의, 1996년의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미 IMF 위기 이전 수년간 노사관계의 각 주체들은 이 전환의 '방향'을 놓고 서로 공방을 벌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노사관계의 부재로 인해 타협의 계급정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 공방의 과정은 항상 일종의 소모전 혹은 부합(負合) 게임으로 귀착되어 왔다.

그러나 1996년 말의 노동법 개악과 이에 대한 노동계의 총파업 투쟁, 1997년의 노동법 재개정, 그리고 뒤이은 IMF 경제위기의 발발은 '1987년 노동체제' 내에서 팽팽하게 유지되어 왔던 국가-자본-노동간의 힘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허물었다. 특히 '공황'의 발발과 더불어 진행된 '위기의 노동정치' 과정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1987년 노동체제'는 그 한 축을 이루었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유례 없는 위기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1987년 노동체제'는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과도기적 역할을 마감하고 새로운 노동체제로의 전환을 구체화해야 할 강력한 압박에 직면해있다. 

limyil_03.jpg노동체제 전환의 압박조건들

'1987년 노동체제' 형성의 주된 동력이 노동운동의 변화, 즉 강력한 독립노조운동으로서의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급성장이었다면, 이 과도적 노동체제의 해체 계기도 역시 노동운동의 약화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절대적 기준에서의 평가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노동시장 상황에 대처할 상대적 역량의 미비가 그 주된 내용이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노동체제 전환의 핵심적 압박 요인은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서 주어졌다. 한편으로 구조조정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일상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노동시장의 분절이 심화되었다. 전반적인 고용불안과 노동시장의 분절은 노사간 권력관계를 사용자 우위로 급격히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1987년 이후 전개되어왔던 임금 쟁점을 중심으로 한 노동정치의 의제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경제위기 발발 직후 노동시장의 쟁점은 대량실업과 실업대책이었지만, 이후 쟁점은 금융과 공공부문, 민간대기업에서의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을 둘러싼 노사갈등,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와 노동시장의 분절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1987년 노동체제'의 외부 환경적 조건들 역시 급격히 변화하였다. 기존의 발전국가-재벌 연합에 의한 주변부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경제위기와 더불어 전면적인 해체 단계에 돌입했고, 개방화, 세계화의 급진전과 정치적 민주화의 계속적인 진전으로 인해 개입주의적 국가의 능력 자체가 심각한 제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치구조는 보다 다원화되었고, 계급정당의 합법화와 대중정당화의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계급정치의 진전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도기적인 '1987년 노동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노동체제로 전환해 갈 주체적, 구조적, 환경적 조건들이 함께 성숙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노동시장, 노동운동, 노동통제의 세 구성요소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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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체제 전환의 방향

1987년 이후 한국의 국가와 자본은, 그리고 때로는 노동단체들도, 다양한 방식, 다양한 논리, 그리고 다양한 어법으로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를 강조해왔다. 노사화합, 협력적 노사관계, 생산적 노사관계, 윈-윈 노사관계, 합리적 노사관계, 타협적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주의 등등이 그것이다. 현 정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주창한다. 그러나 노사관계의 성격, 그리고 그 변이의 폭, 나아가 특정한 유형의 노사관계의 성립 범위와 그 지속 시간 등은 결국 그 기저에 어떤 노동체제가 자리잡고 있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그동안 국가와 자본에 의해 추진된 다양한 형태의 협조주의적 노사관계가 사실상 모두 허구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 정부가 말하고 있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역시 보다 본질적인 수준에서 노동체제의 합리적 개편을 위한 노력이 먼저 기울여지지 않는 한 마찬가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본다. 국가가 주도하는 노동통제 방식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자본이 주도하는 노동시장 재편의 방향에 수정이 가해지고, 노동운동이 새로운 노사관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기 변화를 추진하는 속에서 노동체제 변화의 새로운 방향이 정해지고, 그 위에서 비로소 새로운 노동체제와 상응할 수 있는 노사관계의 형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노사관계의 세 주체들 모두가 새로운 노동체제 형성을 위한 주도적 행동에 나서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제위기 이후 국가와 자본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와는 전혀 상응관계를 가질 수 없는 노동통제 정책, 노동시장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규제완화,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경영권의 고수 등 영미식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가 그대로 관철된다면 예상되는 노동체체는 일종의 '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가 될 것이다. '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 위에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의 형성이 가능할까? 오히려 그 위에서는 사회해체적이고 분절적이며, 대립적이고, 결국 억압적인 노사관계가 재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만일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고 하는 것이 그 본연의 의미에서 성립할 수 있으려면, '법 테두리 내에서'를 명분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배제적 노동통제, 노동시장의 분절화를 심화시키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위에서 노동운동의 기조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수십년 동안 체질화되어 있었던 기업별노조, 기업별교섭 구조에서 벗어나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하고, 사용자들에게 산별교섭에 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용자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이미 형해화된 '노사정위원회'만을 붙들고 있을 뿐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들은 이것이 무슨 문제인지를 아예 모른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통해 스스로 계급정치의 주체가 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4·15 총선에서 민주노총을 핵심적인 조직적 토대로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거둔 정치적 성과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통합적인 새로운 노동체제 형성을 추진할 정치적 역량도 키워왔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결국 앞으로 한국의 새로운 노동체제 형성도 범노동세력과 범자본세력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결과에 의해 방향이 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갖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어깨는 여전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