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민정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
“… 너무 딱딱하던 노동은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너무 흐물흐물하던 노동에는 탄성을 줘야한다. 다시 말해 [… 중략] 중요한 것은 노동의 형태가 아니다.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은 어떤 일을 하건 누구나 기본적인 노동의 질,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방법이다.” p.37
『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1)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최근 들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녹아내리는 노동’ 혹은 ‘액체 노동’ 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비판하며, 낡고 오래된 노동에 대한 관념들과 ‘좋은 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1부: 일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정의하는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가 과연 타당한지를 되짚고 있다. 1부에서는 특히 ‘녹아내리는 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상기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마치 노동의 형태가 최근에야 녹아내리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균열된 노동으로부터 시각을 옮겨 ‘녹기 시작한 노동’을 최대한 이전의 고체 형태로 가깝게 만들려는 시도로밖에 이어지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저자는 오히려 소위 ‘고체 노동은 곧 권력이자 안정성’이라는 인식과 환상에서 벗어나 보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미 불안정했던 노동은 보다 안정적이고 탄성이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는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그리고 그 용어로도 정의되지 않는 수많은 불안정 노동에 대하여 산발적인 정책과 사업을 실행하고 있다. 물론 빠르게 변화하는 노동형태에 비해 느리기만 한 보편적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것보다는, 우선적이고 개별적인 사업과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그나마 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발 빠르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점점 더 개별적이고 단기적이며 함께 녹아내리고 있는 정책들을 보고 있자면, 사각지대만 점점 더 넓어지진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러다 결국 녹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기체상태의 노동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고체 상태를 좀 더 유연하게, 액체 상태를 좀 더 단단하게, 기체 상태로 떠다니고, 흩어져 있는 노동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노동의 질, 기본적인 삶의 질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고 있지만, 기본소득 논의라든가, 성남시에서 전국 최초로 제정한 ‘일하는 시민을 위한 조례’ 등의 보편적 논의를 보다 활발히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코로나19 시대가 도래한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2부: 우리가 매여 있던 낡은 것들” 에서는 노동에 대한 낡은 관념과 환상을 꼬집으며 새로운패러다임을 위한 생각을 하게 해준다. 정규직이라는 모호한 개념과 인식을 되짚고, 모든 노동문제의 기원은 ‘차별’임을 되새긴다. 2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으며, 동시에 노동과 사회보장에 대한 생각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사회안전망과 노동과 삶의 질, 복지국가에 대해 연구하고 늘 생각하고자 한다면서도, 어느새 사회 시스템 속에서 타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규직에 대한 환상, 엘리트주의에 대한 선망, ‘좋은 일자리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실력 있는 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돈을 더 받고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가지려 했나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보고, ‘노동’과 ‘일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때야 하는가를 고민해볼 수 있는 장이었다.
“3부: 어떤 일이 ‘좋은 일’일까”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식하는 ‘좋은 일’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고 있음을 이야기하여, 무엇이 좋은 일이고, 좋은 일이 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확실히 이전 세대가 생각하는 ‘좋은 일’과 현재 일하는 우리가(특히 청년세대가) 생각하는 ‘좋은 일’에는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 좋은 일을 가질 자유를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는 심히 불평등하게 갖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을 딱딱한 노동으로만 전환하려는 시도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정책 또한 지금의 우리가, 특히 청년들이 지향하는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3부에서는 특히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휴가에 인색한가?’에 대해 논의한 점 또한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는 아파도, 큰 일이 있어도, 아주 잠깐만 밖에서 해결하고 와도 되는 일도 다 휴가(혹은 쪼개서 사용하는 반차)로 사용하게 한다. 그마저도 일일이 설명이 필요할 때도 많고, 허용이 되지 않거나 눈치를 봐야할 때도 아직 많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억지로 일하거나 눈치를 봐야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는 아이러니가 만연하다. 이제는 정말 단순히 ‘쉬는 것’, ‘노는 것’을 넘어, ‘아프면 아플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봐야 하는 시기이다. 산재보험, 상병수당, 유급휴직 뿐만 아니라 재택근무, 원격근무, 탄력근무에 대한 말랑말랑한 방법을 계속해서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4부: 좋은 일을 위해 찾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서는 좋은 일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해 개인적‧사회적‧정책적 차원에서 생각의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요즘 청년들에게는 실패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다. 여전히 정해진 컨베이어벨트에서 시기적절한 시기에 퀘스트를 깨야한다는 것이, 그리고 여전히 그 퀘스트를 깨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답답하다. 청년들에게 무엇이 좋은 일인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해보고 실패를 해볼 기회와 자원도 주어졌으면 좋겠다. 또한,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을 힌트로, 무조건 ‘도덕적 해이’를 낳을 것이라느니,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이냐’ 같은 말로 논의부터 막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정책적 상상이 필요하다.
사실 어떤 문제는 개인의 잘못, 사회의 잘못, 정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좀 더 나아갈 방법을 생각을 않는 ‘굳어버린 사고방식’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말랑말랑한 노동’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용어를 가지고 하는 장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말랑말랑한 사고라는 것에 동감하게 되었다. 점점 특정 사안을 두고 명확한 구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소용없는 행동이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말랑말랑한 노동을 제시하는 이 책은 앞으로의 정책적 상상을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1): 황세원 저(2020), 『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좋은 일의 기준이 달라진다』, 산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