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roh4013@hanmail.net)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 왔다.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 여론은 거세지만 일여다야(一與多野)로 치러지는 선거는 개표 결과를 보지 않아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역대 선거와 달리 4·13 총선은 정부·여당의 국정 심판이 아니라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쟁점이 되었다. 새누리당의 진박 논란, 야당의 분열과 안철수의 신당이 그것이다.
불평등의 심화, 청년실업의 악화, 국가 및 가계 부채의 급증, 남북관계 긴장 격화 등 국민들의 절박한 관심사들은 선거 정치에서 외면되었고, 국민들은 ‘그 나물에 그 밥’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는 선거제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원래 선거는 엘리트들만이 선출될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정치 허무주의와 선거 무용론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비합리성을 교정할 수 있는 국민들의 전략적 선택과 함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직접 민주주의를 삶의 현장에서 실현해나가야 한다. 최선이 없다면 차악을 막기 위해서라도 선거 참여는 필요하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투표용지는 탄환보다 강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거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한국 정치는 시민 배제의 기득권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수 정치권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재벌대기업, 언론, 관변단체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 위세가 당당하다. 반면 시민사회의 역량은 턱없이 취약하다. 월급쟁이들의 이해대변기구인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10.3%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이고, 시민의 참여 없는 시민단체들은 규모의 영세성에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 없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역설적 상황이 우리의 직면한 정치 현실이다. 정치는 사회적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하고 소수 기득권 세력의 담합 구조를 확대 재생산할 뿐이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경제 민주주의는 후퇴하였다. 경제 민주화의 골갱이인 노동권은 30년 전으로 후퇴하였다. 법률로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은 보장되었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조는 정부의 불인정 방침으로 법외노조 신분이다. 비정규직 확대와 저임금노동의 확산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되었다. 장하성 교수는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소득계층 상위 10%가 전체 소득 중에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29.2%였지만 2012년에는 44.9%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9년부터 16년 동안 불과 2.2% 증가했던 그들의 소득은 1995년부터 2012년의 17년 사이 15.7%로 급증했다고 고발한다.
노동의 무권리뿐 아니라 갑을관계에 얽매인 영세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리 목숨이다. 매일 터져 나오는 재벌대기업 오너와 3∼4세들의 갑질은 우발적인 정신병리 현상이 아닌 노동인권이 말살된 폐쇄적 갑을관계와 일터의 속살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현대가 3세인 정일선 현대BNG 스틸 사장과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 몽고식품 김만식 명예회장의 운전기사들에 대한 폭행과 폭언,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의 항공사직원 신문지 폭행, 미스터 피자 정우현 회장의 경비 폭행과 자서전 강매 등이 그 예다. 고용주들의 갑질 행태는 그 유형도 가지가지다. ‘면벽 대기근무’로 명퇴를 강요한 두산모트롤, 여직원 결혼시 퇴직을 종용한 금복주 사례가 그렇다.
정치와 경제 민주화의 퇴행은 이를 제어할 시민사회의 취약한 역량과 비례한다. 기득권 지키기에 매몰된 정치와 불공정한 사회경제 구조의 타파는 한 번의 선거로 결정되지 않는다. 일반 국민들의 목소리를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재구성하여야 한다. 지역과 일터에서의 조직화는 그 출발점이다. 학생은 학생회로, 샐러리맨은 노동조합으로, 시민들은 시민단체와 생활협동조합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대의제 정치구조를 보완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하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총선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희망의 작은 씨앗을 심자. 국민이 정치의 수동적 수요자가 아닌 직접 공급자가 되는 것은 정치 혁신의 시작이다.
*이 칼럼은 4월 11일 뉴스토마토(시론)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