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이타카, 그리스, 그리고 양극화/이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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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창] 이타카, 그리스, 그리고 양극화/이주희

구도희 5,530 2015.06.29 09:33
 
 
-이주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j.lee@ewha.ac.kr)
 
미국 코넬대학교는 이타카(Ithaca)라는 뉴욕주의 작은 소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인구는 약 3만 명에 불과하고, 코넬대가 가장 큰 고용주이다. 작은 도시 규모에 걸맞지 않게 미국에서 가장 큰 노사관계대학원이 자리하고 있어 이전에도 왔던 곳이다. 이번 해에는 한 학기동안 동아시아프로그램의 방문교수로 코넬을 찾았다. 
 
마침 방문기간인 4월 중순 경, 뉴욕시에서 미국 노동법 제정 80주년을 기념한 “노동권의 진전”(Advancing Worker Rights)을 위한 학회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올해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생활임금 시간당 15달러를 위한 투쟁”(fight for $15)이 진행된 바 있다. 전미서비스노조(SEIU)는 적어도 5천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난 2년간 이 캠페인을 지지해 왔다. 학회에서도 매출에 따라 일시해고가 상시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끓는 기름에 화상을 입은 노동자에게 연고 주고 하루 쉬고 오라”고 하는 것이 전부인 유명 패스트푸드사의 처우에 대한 비판과 낮은 임금으로 인한 소득 양극화 문제가 크게 주목받았다. 오랜 기간 노동운동에 종사한 한 노동조합 간부는 “죄 없는 흑인 청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고 이렇게 불안정고용과 저임금으로 다수 노동자가 고통 받고 있는”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의 대명사, 미국에서 아직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통탄한다는 논지를 펼쳐 좌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이 토론에 환호하지는 않았다. 이 학회는 코넬대 노사관계대학원 70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대학원생들도 참여하고 있었고 나는 어쩌다 보니 대부분 젊은 그들과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다른 노동조합원들이 환호하는 내내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맨해튼 금융 중심지의 초현대식 건물 안에서 들은 ‘혁명’이란 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학회에서 미국 노조의 자기반성도 들을 수 있었다. 노조에 대한 태도 조사 중, “노동조합이 당신의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긍정적 응답은 22%에 불과했다고 한다. 코넬대의 많은 직원들도 항상 임금과 노동조건에 만족하진 않는다. 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기만 한다는 불평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조에 가입하거나 활동할 생각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면 별 희한한 제안을 다 한다는 표정과 함께 짧은 침묵이 뒤따랐다. 미국 노동조합도 젊은 피의 수혈을 위해 다양한 청년노동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들을 노조 활동가로 영입하려 하고 있다. 참여를 독려하는 한 패널의 발언에 한 젊은 학생이 예의바르게 손을 들어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가 큰 힘이 된다고 하시지만 참여할 수 있는 노동조합 내부의 구조와 관료적인 의사결정 관행을 바꾸지 않고 참여만 요청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성과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7년 전인 2008년 말, 지금과 같이 코넬에서 한 학기 연구년을 보내던 나는 그리스 아테네대학 경제학과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교수가 그리스 노총과 함께 주최한 국제비교 노사관계 학회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방문학자 생활을 마무리 할 예정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유명한 관광도시의 대학에서 초청을 받게 되어 부푼 마음으로 이타카에서 아테네 행 비행기를 탔건만, 지금의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의 발단이 된 12월의 대 폭동이 발생하는 통에 관광도, 학회참석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학회 전날 오후부터 공항이 폐쇄 되어 대양을 가로지르는 먼 여행을 해야 하는 국가의 학자들만 참석하였고, 대부분의 유럽 학자들은 오지 못하였다. 덕분에 거침없이 자유로웠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바루파키스 교수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지금 유럽연합(EU), 유럽 중앙은행, 그리고 국제금융기구(IMF)의 긴축정책을 ‘재정적 물고문’이라 반대하며 채권단과 길고 힘든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그리스의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리스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근원지인 세계금융의 거인들과 맞서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수많은 노동문제와 양극화를 발생시킨 90년대 말 금융위기 때 단 한 번의 반항도 없이 IMF의 긴축안과 구조조정요구를 전면 받아들인 우리 생각이 나서 그리스  급진정부의 저항이 관철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그리스와 한국은 국제금융의 횡포와 관련된 양극화된 대안을 상징한다. 
 
구체적인 대안 없이는 혁명을 꿈꾸지 못하는가? 아니, 그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을까? 실패할 가능성이 90%가 넘는다면, 저항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세월호와 메르스의 상처를 되풀이하는 한국에서 좀 더 나은 정치를 희망하는 것 역시 허황된 일일까? 아니, 이런 거창한 질문을 하기 전에, 내 안의 양극화를 먼저 극복하고 싶다. 활동가가 될 능력도 의도도 없는 나이지만, 할 수 있는 연구를 통해서라도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은 없다. 하지만 사회는 변하지 않고, 나는 별 하는 일도 없이 지쳐만 간다.  제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좀 살자는 나와, 크게 도움 되는 일을 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노력조차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가 가끔 싸운다. 하지만, 다시 내가 나에게 묻는다. 아카데미 안에 안주하지 않고, 한 번이라도 진지한 소통의 노력을 해 보았는가?
 
후자의 내가 이기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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