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현대차 지부 연대임금 전략은 허망한 꿈인가?/조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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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창] 현대차 지부 연대임금 전략은 허망한 꿈인가?/조성재

구도희 6,171 2014.04.13 11:35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chosj@kli.re.kr)
 
임단협의 계절이 코앞에 다가왔다. 통상임금 판결과 정년 60세법, 그리고 휴일근로시간의 제한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금년도 교섭은 어느 해보다 어려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때 세인들은 다시 현대차를 바라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노조 조직을 갖고 있고, 사용자 쪽도 대표 산업, 대표 재벌이기 때문이다. 이른 바 본보기 교섭(pattern bargaining)의 ‘본’이 되는 사업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대차 지부는 ‘본’이 되면서도 ‘본’이 될 수 없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현대차 지부는 과거 선도투쟁을 통하여 임금수준을 높이고 산업안전을 포함한 많은 영역에서 선구적으로 노동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해왔다. 그런데 그 선도투쟁을 따라할 다른 노조들의 힘이 너무 부쳐서 이제는 그 선도성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앞서 나갔는데, 따라올 노조들, 따라올 중소기업 조합원들이 없다면 얼마나 무안한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무안함을 현대차 지부나 조합원들이 별로 느끼고 있지 못한 것 같아서 걱정이다. 노동운동에서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사람의 한 걸음이 더 의미 있다고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의 노사관계에서는 그 연대의 원리가 실종된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차 지부가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말인가? 노조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필자는 현대차 지부가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조 본연의 역할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현대차와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는 너무 너무 커져있다. 연간 총소득으로 1억 원 대 3천만 원이다. 여기에 현대차 조합원들이 누리고 있는 여러 항목의 기업복지들을 감안해보면 그 격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고서 어떻게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칠 수 있겠는가? 노동시장이 분단되고 노동자 내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 노동운동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정당성에 대한 공격에 취약하게 된다. 현대차 조합원들이 믿고 싶지 않겠지만, 현대차 지부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난은 조중동과 경제지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진보적 의식을 가진 학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이제 현대차 지부의 나홀로 고임금에 우려와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이러한 커다란 격차의 배후에 기업별 노사관계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현대차 조합원들은 2007년에 산별노조로의 전환이라는 결단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관계자들은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나을 것인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노조는 ‘무늬만 산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공장 내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과의 연대도 삐거덕대기 일쑤였다. 다른 업종은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부품산업 노동자들과의 연대 역시 헛구호에 그쳤다.
 
현대차 지부 입장에서 이런 평가와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다. 현대차는 현재 글로벌 5대 기업으로 도약하였으며, 이러한 성공은 노동자들의 기여에 힘입은 것인데, 나의 몫을 요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의 몫’은 매년 임금인상과 막대한 성과금으로 배분해야만 하는가? ‘기금’ 등의 형태로 불황에 대비하거나 연대활동에 쓰일 수는 없을까? 더욱이 그 ‘나의 몫’이 정말 나의 기여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필자의 분석에 의하면 최근 현대차 고수익의 원천 중 40% 정도는 해외 사업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 몇몇 노조 간부들도 알고 있듯이 현대, 기아차 해외공장들의 임금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더 낮다. 미국 알라바마 현대차 공장과 조지아 기아차 공장의 임금수준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6천만 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며, 중국과 체코, 슬로바키아 등의 임금수준도 2천만 원 내외에 불과하다. 그래서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으며, 그 이윤 중 일부는 국내 현대차 조합원들의 임금으로 흘러들어왔을 수 있다. 이럴 경우 모두 다 예상할 수 있듯이 중장기적으로는 해외공장들이 국내 일자리를 잠식할 수도 있다.
 
국제연대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이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연대가 실천적, 실질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20여 년 이상 논란이 되어 왔지만, 완성차와 부품기업들간의 원하청 불공정거래는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완성차노조는 여러 해 동안 원하청 불공정거래를 바로잡으라고 사측에 요구해왔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적은 없다. 그러는 동안에 임금격차를 이용하기 위한 자본의 아웃소싱은 광범하고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가장 정점의 모듈화는 말할 것도 없고 1차 하청에서 2차 하청으로, 2차에서 3차로 물량이 이전되면서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중소 영세기업이나 사내하청 일자리만 늘어났다. 외부에 광범한 저임금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면, 자본은 굳이 내부에서 5, 6천만 원을 주면서 일을 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15년여 동안 일관되게 확산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연대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일자리를 지키고 나의 사회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실질적인 전략이다. ‘나만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현대차의 초과이윤은 1차든, 2차든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함께 나누어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현대차 지부 조합원들이 임금인상을 자제하면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서 격차가 줄어들 것인가? 물론 현대차 지부만의 임금인상 자제는 현대차의 초과이윤을 더욱 늘려줄 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바로 이 지점이 새로운 노동운동의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양보한, 내가 자제한 임금 재원이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도록 경영에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발언하는 것, 그래서 현대차 지부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 경제적 실리에만 목매는 집단이기주의자들이 아니라 공정, 평등, 연대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당당한 주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현대차 지부는 그러한 점에서 막중한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은 힘을 잃고 있으며, 따라서 노사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결국 노동시장의 왜곡이 심화된지 오래이다. 현대차와 기아차 지부 등 몇몇 대기업 노조만이 홀로 힘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남은 힘을 자신의 조합원만이 아니라 공장 담벼락 밖의 노동자들과 나눠 쓸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현대차 지부뿐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연말 성과금을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나누겠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통상임금 관련하여 목돈이 생기거나 높은 인상률을 실현한다면 그 일부를 원하청연대기금으로 내놓으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 것인가?
 
2014년 임단협 교섭에서는 사회연대기금과 고용안정기금 등의 방식으로 임금인상 재원을 달리 활용해보자. 매년 조합원들 개인들이 가져가는 몫을 늘리는 데만 집중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어야 했다. 다른 기업 노동자들은 그것을 따라할 수 없었고, 부러움, 때로는 질시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나의 몫’은 놔두고 자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유감스럽게도 공정거래위원회와 여론의 숱한 뭇매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스스로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욱이 그 방식으로는 필자가 강조하는 연대 전략을 통한 노동운동의 사회적 위상과 정당성 제고가 불가능하다. 노동이 먼저 양보할테니, 자본도 개과천선하라! 그러면 현대차 지부는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보이던 현대차의 지불능력도 이제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대차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작년에 14.4%까지 상승하였다. 이는 10년전의 10% 내외 수준, 그리고 역시 일본업체들의 10% 수준보다 크게 높아진 것이며, 몰락한 미국 빅3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다. 지불능력이 남아 있을 때 새로운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환할 시점을 놓쳐서 1998년과 같은 대규모 불황과 고용조정이 갑자기 닥칠 경우 그 때는 아무도 현대차 지부를 응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번양보하여 그 때도 40~50대 기성세대 조합원들의 타격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청년 세대는 1999년과 같은 노동강도 강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더 이상 희망이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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