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적녹연정의 실패와 좌파정치세력의 분열

노동사회

독일 적녹연정의 실패와 좌파정치세력의 분열

편집국 0 5,266 2013.05.17 10:32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Green)의 소위 ‘적녹연정’의 7년 통치가 종식을 고하고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전통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표방해 온 사민당이 내부분열을 하면서 독일의 좌파정치세력이 새로운 이합집산을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배경, 그 동안의 경과 및 향후 전망을 제시하며, 독일 집권 좌파의 정치적인 실패 이유와 그것이 우리 진보정치에 주는 함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998년 적녹연정의 ‘새로운 중도’ 출범 

1998년의 선거에서 당내 분파대립을 평정하며 사민당의 총리 후보로 지명된, 니더작센 주지사 출신의 정치가이자 현 독일 총리인 게하르트 슈뢰더의 모토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이 ‘새로운 중도(Neue Mitte)’였다. 그는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이라고 하는 국내외 거대한 정치변동과 세계화가 야기하는 새로운 경제적 도전에 조응하는 ‘혁신적인 사회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야심 찬 집권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그리고 헬무트 콜이 4선까지 하면서 이끌어 온 16년간 기독교민주당(CDU) 정권의 아성은 신흥 청년정치 세력인 녹색당과 손잡은 독일 좌파의 혁신적 도전 앞에 끝내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독일에도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로운 좌파 정치’의 기류가 형성되는 듯 했다. 여성, 환경, 평화 등 1970년대 이래 신사회 운동을 주도해 온 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성한 녹색당도 정치세력화 이후 최초로 집권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적녹연정의 ‘새로운 중도’는 21세기형 진보정치의 새로운 상을 창출하며, 독일이 경제·사회적으로 당면한 무거운 현안들을 해결할 대안정치의 주체로서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중도’는 애초부터 개혁의 내용상 내적인 모순과 긴장을 갖고 있었다. 집권과 더불어 독일의 좌파세력은 이내 노동과 자본을 아우르는 국민경제 전체의 부흥을 책임져야 했다. 이를 위해서 사민당은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건설된 독일 복지국가의 여러 제도들을 스스로 가지치기해야 했다. 4백만을 웃도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고비용을 피해 독일 땅을 떠나는 자국의 기업들을 잡지 못하면, 수년간 저성장에 머물고 있는 독일로서는 아무리 “오늘의 수출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내일이 불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집권당으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사회적 부담을 높이면서 국가의 사회적 지출(Sozialabgabe)을 줄이고, 그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해 복지제도 운영상의 방만함을 합리화시키는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1980년대를 전후로 영국 대처와 미국 레이건이 신보수주의의 칼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면서 추구한 복지삭감의 정치와 유사한 것을, 조금 더 신사적으로(?) 자행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에 비판의 칼을 세우며 집권한 좌파정치세력이 결국에는 신자유주의적 속성을 지니는 정책을 스스로 실천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다만 그 ‘정도’와 ‘경로’에 있었다. 그리고 좌파의 집권이 그나마 노동계급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도와 경로의 문제가 그래도 좌파정부 하에서는 뭔가 더 나은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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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민당의 여성당수 메르켈(Angela Merker)과 사민당의 슈뢰더(Gerhard Schroder) 총리 ]

집권 1기 노사정 고용연대의 실패와 극적인 재집권

‘새로운 중도’가 혁신적 의미를 구현하고 내용과 형식상에서 영미식의 신보수주의와 뭔가 다른 정치를 실천하면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호응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 않고는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처럼 그저 노동계급의 이해를 뒷전에 둔 채 좌파정당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치를 자행하는 것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과거의 정치를 구태의연하게 답습하면서 대량실업과 생산지 이전 등 동서통일과 세계화가 초래하는 사회경제적인 위기의 상황 앞에 무능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컸다. 안타깝게도 적녹연정의 집권 1기는 노동조합의 반개혁적 압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개혁의 구현에 실패했던 후자에 가까운 시기였고, 집권 2기는 뒤늦게 부랴부랴 노동조합을 배제한 채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강행한 전자의 모습에 가까운 시기였다. 

집권 1기에 사민당은 정계와 학계의 최고 싱크탱크들로 구성된 소위 ‘벤치마킹 그룹(benchmarking group)’을 결성, 유럽 내 다른 나라들, 특히 네덜란드의 개혁 성공사례를 면밀히 분석하며 구체적인 정책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더불어 콜 정부 말기에 싹이 텄던 노사정 협의체 ‘고용연대(Bndnis fr Arbeit)’를 활성화시키며 노사 이익단체들과 합의를 통해 개혁의 정당성을 제공받고자 했다. 일종의 국가수준의 코포라티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도는 1970년대 오일쇼크의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추구되었던 ‘조율된 행동(Konzertierte Aktion)’ 이후 사그라졌던 삼자주의의 부활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의 정세는 고용연대의 성공을 가로막았다. 금속노조(IG Metall)의 노선투쟁과 강경파의 대두, 신흥 서비스노조 베르디(Ver.di)의 선명성에 치우친 정치적인 선택 등 노조는 내부적으로 강성분위기가 부상했다. 사민당 우파에 해당하는 슈뢰더의 취약한 리더십은 노조내부의 반개혁적인 움직임을 제어하면서 이들을 전체적인 개혁프로그램으로 유도, 조율시키는 통큰 정치로 나아가지 못했다. 노조는 정부를 비판하고 정부는 노조를 비판하면서 사민당과 노조간에는 반목이 깊어 갔다. 결국 고용연대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고 어영부영 4년이 지나가 버렸다. 좌파정부의 주도 하에 면밀한 개혁정치의 실천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동시장 상황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실업의 고통은 집권 당시나 집권 1기 말이나 그대로였고, 그에 대한 변변한 처방 하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집권 1기를 마감하고 닥쳐 온 2002년의 선거에서 당연히 적녹연정의 패배는 거의 불 보듯 훤했다. 그런데, 천우신조였을까? 선거를 목전에 두고 동독지역에 발생한 100년만의 대홍수와 그것에 맞서 강력한 시민적 연대가 발동을 했고, 동맹국의 이라크침략전쟁 참전을 종용하던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제안을 외무부장관인 요시카 피셔(녹색당)가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적녹연정의 인기는 선거 1개월을 앞두고 갑자기 솟구쳤다. 일종의 포퓰리즘적인 선거전을 통해 적녹연정은 기사회생을 꾀했고, 결과는 극적인 성공이었다. 적녹연정의 집권 2막이 열린 것이다. 

아젠다 2010과 신좌파 ‘선거대안’의 등장

집권 2기가 되면서 슈뢰더는 더 이상 코포라티즘적인 지지창출 전략을 포기한다. 슈뢰더는2003년 소위 ‘아젠다 2010’의 이름으로 광범위한 노동시장 개혁프로그램을 선포하며, 이익단체 중심이 아닌 의회중심의 개혁을 추진한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개혁의 파트너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노조를 버리고, 적녹연정의 집권 1기 동안 지방정부 선거들에서 승승장구 해 온 기민당(CDU)과 암묵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었다. 아젠다 2010을 통해 적녹연정은 독일 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실업, 의료, 연금 등의 제도적 기반을 대폭적으로 허물고, 사회적 지출의 규모를 크게 삭감시켰다. 그 내용은 사실 기민당이 주장해왔던 것을 다소 완화된 형태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민당은 새로운 정책에 대해 그것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사민당이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개혁의 내용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늦은 개혁내용의 추진과 전통적인 코포라티즘에 반하는 개혁방식이 상호상승적인 결과를 내오지는 못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한 실업난 해소는 짧은 시간 내에 그다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2005년 들어 오히려 5백만명을 넘겨 버렸다. 경기침체와 실업난이 극복되지 못한 가운데 행해진 복지축소에 대해 서민 대중들은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이미 적녹연정의 경제사회 정책상의 무능함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전통적인 사민당 지지층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독일 정치체제의 특성상 매년 수차례씩 있는, 주정부 선거와 지방정부 선거에서부터 유럽의회 선거까지, 선거란 선거에서 사민당은 참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가운데 사민당과 노동조합 내에서는 적녹연정이 집권 2기에 추진한 강경한 노동시장 개혁을 비판하는 일부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젠다 2010류의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은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자, 세계화의 위기를 노동계급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사민당 당권파와 정부를 비판했다. 이들은 사민당을 이탈해서 독자적으로 새로운 좌파정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처음에 ‘선거대안(Wahalternative)’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신좌파 정치세력의 조직화는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이후 선거대안은 사민당 내 좌파의 거두이자 자알란트 주지사 출신이며, 1998년 선거전에서 슈뢰더에게 당권을 내준 후에 정계를 떠난 오스카 라폰텐을 영입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켰다.  

한편, 2004년 초 실업보조금과 실업수당, 사회보조금 등을 통합한다는 취지로 만들어낸 소위 ‘하르츠 IV’ 법안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 수백만명의 실업자들에게 돌아가는 국가의 보조금이 크게 삭감되어 이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을 기점으로 하여 동독지역을 중심으로 이 법안의 실행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인 ‘월요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신좌파’들은 이러한 대중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인 성공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2002년 선거에서 적녹연정의 좌경화 선거전략 때문에 표를 잃으면서 최소지지율 확보에 실패해 의회진출이 좌절되었던, 구동독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주사회주의당(PDS)도 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특히 이 당 소속이면서, 몇 년 전 베를린의 주지사로 있던 중 세비남용과 관련한 스캔들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했던 대중적인 정치가 그레고 기지도 시위대에 얼굴을 나타냈다. 라폰텐과 기지는 나란히 시위대열에 합류, 적녹연정과 기민당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비판하는 정치적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었고, 두 정치세력 간의 의미심장한 공동행보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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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과 사회정의를 의한 선거대안의 라폰텐(Oskar Lafontaine) ]

승부사 슈뢰더가 던진 재신임안의 포석

올해 들어 선거대안은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이라고 명칭을 확대변경하며, 약자로 WASG(Die Wahlalternative-Arbeit-und Soziale Gerechtigkeit)라는 이름을 걸고 지난 5월 하나의 독자적인 정당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독일 내 좌파성향의 유권자들 가운데 사민당의 개혁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의 표를 끌어 모으고, 2006년에 있을 총선에서도 독자후보를 출마시킨다는 전략을 취했다. 또 WASG는 민사당(PDS)과 본격적인 정치적 연합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적 기반을 중심으로, 서독지역은 WASG가, 동독지역은 민사당이 주력을 하면서 당면한 선거에서 신좌파 공동의 선거전선을 구축하였다. 신좌파의 독자노선이 현실에 안착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자, 사민당의 몇몇 정치가들은 탈당계를 내고 WASG로 이적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지난 세기 독일 노동운동의 정치적 구심이자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및 복지국가를 가꾸는데 주춧돌의 역할을 해왔던 사민당은 분당이라는, 창당 이래로 처음 겪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독일의 노동조합은 공식적으로는 사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있다. 부분적으로 슈뢰더의 개혁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WASG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노총(DGB)의 의장 좀머나 서비스산업 노조 베르디(Ver.di)의 브지르케 모두 신좌파 경향의 노동운동가들은 조직 내에서 일부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WASG가 민사당과 결합하면서 운동정치와 대중의 바람을 추구하는 것도 사실 조직화된 대중의 뒷받침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좌파의 도전은 무시 못 할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민당의 정치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며 독일 좌파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한편, 지난 6월 말에 치러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정부 선거는 적녹연정 정부로 하여금 거의 정치적인 기권이라고 할 수 있는 비참한 선언을 하도록 만드는 파괴적인 펀치를 날렸다. 전통적인 공업지대로 산업노동자들이 밀집한 이 지역은 지난 40여년간 사민당의 ‘표밭’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의 붉은 아성은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로써 적녹연정은 하원의회에서 간발의 차이로 다수의석을 유지하고 있지만 상원의회는 거의 다 야당에게 의석을 넘겨줘 버리게 되었다. 

NRW 선거 패배 직후 사민당은 국정을 끌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승부사 슈뢰더는 전격적으로 의회에서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고, 만일 재신임을 얻지 못할 경우 의회를 해산시키는 방안을 제안하고 나섰다. 이는 사민당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가 이반된 상태에서 여권의 응집력을 확인하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미 수적으로 재신임이 불가능한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오히려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정치적 실패의 책임을 보다 능동적으로 지고, 차후를 노리겠다는 포석이 깔린 시도이기도 했다. 

또, 2006년 총선에서의 패배가 너무나 자명한 상태에서 그나마 지금 총선을 치르면, 야권에서 보다 ‘합리적인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기민당의 여성 당수 앙엘라 메르켈이 총리가 될 가능성이 크므로 이후 상대하기가 훨씬 낫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슈뢰더 개인으로도 메르켈이 총리가 되면 아젠다 2010의 개혁이 급격하게 바뀌지 않고 추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후에 개혁의 성과가 드러났을 때 자신의 공을 내세울 근거가 마련될 수도 있다. 만일 내년까지 기다릴 경우, 2002년 선거에서 자신과 경합을 겨룬, 보다 보수적인 기사연(CSU)의 에드문트 슈토이버가 야권의 후보로 다시 나올 가능성이 컸다. 이는 독일의 경제사회가 보다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했다. 

2006년, 예정된 사민당의 패배

지난 7월초, 독일 하원의회(Bundestag)에서 총리에 대한 신임을 묻는 표결은 사민당이 의도한 대로 ‘신임실패’로 끝났다. 결국 집권 2기의 임기마저 채우지 못한 채 조기총선이라는 카드를 쓰면서, 이제는 단지 ‘보다 덜 초라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분해를 선언한 것이다. 적녹연정은 이렇게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두 차례의 집권기에 정치적 표류를 하면서 끝내 자신들이 표방한 새로운 중도의 혁신적 구현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노동당은 반노동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권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반면,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그러한 개혁방식을 통해 암울한 정치적 위기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슈뢰더 총리와 사민당 수뇌부들은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을지언정 “개혁의 방향은 옳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남은 정치일정은 일단 7월 중순까지 연방대통령이 하원의회의 불신임 건의를 수용하느냐 마느냐에 있고, 수용할 경우 의회는 해산되고 9월에 총선이 실시된다. 사민당의 패배는 불 보듯이 훤하다. 어쨌거나 이 선거에서 흥미로운 것은 과연 신좌파 정치세력이 어느 정도나 부상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대표적으로 WASG의 라폰텐은 전략적으로 NRW주에 출마하여 구노동계급 정당에 실망한 노동대중들을 향해 표사냥에 나설 태세에 있다. 만일 신좌파 정치세력들이 10% 가량 획득하고, 기민당이 45% 가량 획득하면서 집권한다면, 전통적으로 약 35~40% 가량의 지지를 받아 온 사민당은 좌우에서 살을 뜯기며 치명적으로 외소화될 것이다. 

근래에 여론조사의 흐름은 이러한 가능성도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하튼 이제 이변이 없는 한 기민당과 메르켈의 시대가 열리고, 개혁의 주사위는 다시 보수야당의 주도 아래로 들어갈 전망이다. 동독출신의 여성정치가로 물리학 박사이기도 한 그녀는, 올 가을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수상의 권좌에 오를 준비에 분주하다.  

한국 진보정치, 독일사례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세기말을 전후로 하여 새로운 기회를 부여잡은 듯 했지만 결국 10년도 채 못 되어 초라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독일의 좌파정치의 실패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독일의 집권좌파 정치세력이 끝내 난파한 것에 대해서 다양한 원인 분석과 함의를 내올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나는 핵심적으로 집권 1기에 추진한 고용연대의 실패, 즉 개혁의 파트너로서 노동조합의 동의를 끌어내는 것에 실패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사민당 당권파들과 슈뢰더의 정치적 무능력과 더불어 노동조합의 경직성 모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아닌 또 다른 세계화는 분명 가능할 것이지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좌파 스스로에게도 혜안과 지혜를 겸비한 폭넓고 깊은 정치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는 노동조합에게도 마찬가지다. 시장과 산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 성찰하며 막연한 반대와 저항을 넘어서 새로운 개혁의 청사진을 유연하고도 능동적으로 내놓지 않고선 노동운동의 밝은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민당의 실패는 분명 많은 부분 노동조합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을 한국에 1차원적으로 대입시키면서 그 파편적인 그림들을 부여잡고 일희일비하거나, 한국적인 맥락에 기초한 이데올로기화된 시각에서 독일의 현실을 주관적으로 재단하면서 구미에 맞는 사실들에만 집착, 정치적 다이나믹 전체를 무리하게 한쪽으로만 해석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모습이다.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만큼이나 역사, 경험, 조직, 정책, 제도, 자원 그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독일과 한국의 노동운동과 좌파정치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면서 둘의 상이한 현실에 천착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정치가 독일의 적녹연정의 실패 때문에 쉽게 좌절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만 조직과 세력의 확대와 더불어 세계화의 보편적 도전 앞에 유연하고 지혜로운 좌파가 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단행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그렇지 않고선 독일의 형국이 보여주듯이 오히려 자본과 우파에게 시대의 주도권을 내줘버리게 될 수 있으며, 어쩌면 이것은 근래에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위기’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진행되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