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발놀림은 부지런히!

노동사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발놀림은 부지런히!

편집국 0 3,051 2013.05.17 10:18

『노동사회』가 어느덧 1백호를 맞았다. 그 중 반 이상이 내 손을 거쳐 나갔으니, 파릇파릇하던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이 고스란히 『노동사회』에 묻어있다. 수십 호를 만들었지만, 책을 낼 때마다 제대로 만들었는지 회의하기 일쑤였다. 정성을 기울인 때가 없지 않았지만, 설렁설렁 만든 적도 많았다. 그런 달에 느꼈던 자괴감은 아직도 얼굴을 붉게 만든다. 하지만, 김금수 위원장, 이원보 이사장 등 당시 연구소 식구들이 보여준 관심과 배려, 수백 명에 달한 일선 활동가들의 기고, 수십 명에 이른 편집위원들, 무엇보다도 함께 일했던 친구들(박영삼, 배지영, 전은주, 이명규, 이주환, 형제인쇄, 변영주, 남홍근) 덕에 오늘의 『노동사회』가 가능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증오, 비관, 패거리 속에서 건진 대중의 ‘진실’ 

책을 만들면서 사회를 증오하고 현실을 비관하는 운동 풍토를 걷어내려 애썼다. 노동운동의 강함은 ‘붉은 머리띠’나 ‘불끈 쥔 주먹’에 있는 게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 집, 지역사회 등의 일상에서 겪고 느끼는 희로애락에 노동운동이 서 있지 못하다면 노동자 개개인에게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투쟁’을 빙자해서 사회를 증오케 하고, ‘혁명’을 들먹이며 비관주의를 퍼뜨리는 풍토를 바로잡으려던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태를 과장하지 않고 거짓이 아닌 진실을 전하려는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의미 있는 행위라 생각한다. 

1997년 IMF 경제위기는 우리 사회는 물론 노동운동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노동사회』에 ‘개량주의’, ‘관료주의’, ‘사회적 조합주의’의 전파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누가 운동에 해악을 끼쳤는지는 이미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고, 또 나중에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아무튼 개량이 필요할 때 개량을, 운동의 능률이 필요할 때 관료의 중요성을, 운동의 혁신이 필요할 때 자기개혁을, 사회적 대화가 필요할 때 노사정 타협의 필요성을 역설하려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책을 만들며 각종 정파들의 패거리 문화와 거리를 두려 애썼다. ‘운동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정파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현대중공업노조 제명이나 기아자동차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을 바라보면서, 『노동사회』를 만들며 ‘현장’은 간 데 없고 정파만 남은 ‘현장조직’들의 폐해를 제대로 짚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정파의 만발 속에서 망했거나 망해 가는 노조가 어디 현대중공업노조나 기아자동차노조뿐이랴. 1910년대의 러시아나, 1930년대의 만주벌판을 ‘꿈’꾸면서 1980년대의 한국식으로 ‘실천’하는 정파들이 ‘전노협 정신 복원’이나, ‘신자유주의 반대’니 ‘통일조국’을 외쳐봤자 거기에 무슨 미래가 있고 대중의 공감이 있으랴. 

발놀림이 부지런해야 책이 맛있어진다 

『노동사회』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큰 흐름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엄호한 유일한 노동 월간지였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하게 되면서 열 석도 권력이라고 ‘단물이 있는 곳에 파리가 끼듯’ 지금은 당 안팎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여정은 1997년 ‘국민승리21’ 시절부터 따지자면 만만치 않은 걸음이었다. ‘범좌파연합’이니 ‘민족민주연합’이니를 외쳤던 정파들의 주장은 오류였음이 실천적으로 증명되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가 민주노동당이 앞으로도 잘해나가리란 전망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정파등록제’니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낡디 낡은 정파들의 해악이 장려되고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참여를 억제하는 구조로는 민주노동당의 앞날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노동사회』가 신경 쓸 대목이 아닐까 싶다. 

책을 만들면서 가졌던 가장 큰불만은 ‘노동현장과 운동쟁점에서 비켜있지 않느냐’였다. 기획력의 한계와 발 품의 부족을 늘 반성했지만, 내가 만든 마지막 책까지 ‘책상물림’을 벗어나진 못했다. ‘글이 너무 어렵지 않느냐’도 고민이었다. 몇 줄을 읽어야 마침표가 나오는 긴 문장을 짧게 끊고, 일부 전문가만 아는 용어를 쉽게 풀며, 그림과 표를 곁들이고, 오타를 잡아도 보통 사람들이 읽기엔 부담스런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을 어떻게 재미있게 만드느냐는 어려움 가운데 어려움이었다. 편집실 생활 말년에는 일간지나 주간지보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월간지로 순간순간 엄청난 정보를 쏟아내는 인터넷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는 온전히 후배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노동사회, “뜨겁던지 차갑던지 하라” 

결론적으로 『노동사회』는 노동조합 간부를 위한 책자다. 지금 노동운동 주변엔 정책, 조직, 교육, 홍보, 선전 따위의 일상 활동을 소개하는 자료가 없다. 꼭지 구성과 관련하여 『노동사회』가 주목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노동자 내부 격차 해소, 산별노조 건설, 산별교섭 정착, 노사정 3자 대화 구축, 노동 진영의 자기 개혁과 통합,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완성, 국제주의 실천 따위의 중장기 과제와 관련해서도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할 게다. 이를 통해 『노동사회』가 공식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권위 회복과 조직 강화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차갑던지 뜨겁던지 하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노동사회』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사회개혁과 자기개혁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이다. 『노동사회』가 노동운동의 발전을 통한 사회개혁을 꿈꾼다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만족, 온정주의, 연고주의에 빠져 자기개혁에 성공하지 못할 때 『노동사회』 역시 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정파들처럼 낡은 유물로 전락할 게 뻔하다.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열정으로 스스로를 고쳐내지 못할 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할 때 『노동사회』의 미래는 없다. 끝으로 노동운동 밖에서는 돈의 논리에 밀려, 그리고 노동운동 안에서는 정파들의 주의주장에 밀려 내팽개쳐진 ‘근면·성실·정직’의 미덕을 노동자들과 우리 사회에 전파하는 『노동사회』로 자리 매김하길 바란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