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사회연구소 10년을 걸어와 뒤돌아보니

노동사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0년을 걸어와 뒤돌아보니

편집국 0 5,256 2013.05.17 10:10

1. 한국노동자교육협회(1986년~1989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출발은 시대의 요구와 운동주체의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군부독재의 암울한 1980년대에도 민중들은 삶의 현장과 노동의 현장에서 저항과 조직의 싹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대학생 친구 한 명을 바라던 전태일 열사의 간절한 소망에 화답하며 이른바 위장취업, 현장투신이 물결을 이루었고, 민주노조의 맹아들을 지원하는 집단들도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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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노총에서 일하던 일군의 활동가들도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1985년 7월31일 김금수, 유종설, 김근화, 박홍섭, 이성균 등이 한국노총에서 해고되었고, 이에 항의하며 천영세, 김유선이 동반 사표를 제출하게 됩니다. 구로동맹파업, 서노련 사건을 거치며 견고해보이던 전두환 체제에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이들 해고자들은 새로운 상황을 예기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논의합니다. 

1986년 4월26일 홍제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김금수, 천영세, 김유선, 정이환, 배동문이 상근하며 민주노조세력의 사랑방 및 노조 상담 등의 활동을 시작한 것이 바로 ‘한국노동교육협회’의 출범이었습니다. 

민주화투쟁의 열기는 하루가 다르게 고조되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엄호 세력은 매우 빈약한 상황이었습니다. 노조실무나 대중조직 활동 경험자가 극히 소수인 상태에서 한국노동교육협회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활동경험을 바탕으로 노조설립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1986년에는 노동자의 학습교재를, 1987년에는 노조결성, 일상활동, 단체교섭 등 노조실무에 관련한 서적을 출판했고, 활동가 대상의 노동법, 조합실무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이 때 교육협회를 드나들며 민주노조를 일구었던 분들이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지노협, 업종협, 그리고 전노협의 결성 과정에 교육협회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도 말씀드려야겠군요. 1987년 10월 서울역 광풍빌딩 시대의 개막, 1988년 회보 『노동조합의 길』 창간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1988년 박혜경, 1989년에는 이형범이 합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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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색(1990년~1993년)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교육협회에는 초창기 성원들이 빠지고, 현장 출신의 활동가가 충원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후 교육협회는 노조상담과 강사훈련과정 등 교육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월례토론회 등 현장 투쟁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월례토론회 때마다 100여명이 넘는 노조간부 및 활동가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죠. 

한편 전노협, 지노협의 결성으로 노조 조직이 자생력을 갖게 되면서 교육협회의 교육, 상담기능은 자연스럽게 축소되었습니다. 교육협회의 성원들은 노조활동의 체계화와 이론적 토대 구축을 위한 연구기능 강화 필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모색 속에 협회는 연구소로의 전문적 기능을 강화하는 조직 변화를 추구하였고, 1993년 교육부, 연구부, 총무부로의 기구개편은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조직의 역할을 좀더 분명히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협회의 사업이 꾸준히 확장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열악한 재정으로 ‘활동가 정신’이 필요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각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렸고, 이후로도 활동가 급여와 재정 문제는 늘 협회의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조직 체계와 규모가 꾸준히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93년에는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월 3~5만원의 회비를 결의하여 안정적 재정을 마련하고자 했고, 삼각지 평복빌딩으로 두 번째 이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에는 김유선, 천영세, 이병우 등이 전노협으로, 정이환 등은 학교로 각각 협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허명구, 양기연, 구용회, 김강하, 이민영, 박치관, 유선희, 강영추, 김영두, 노광표 등이 새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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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환 (1994년~1999년)

1994년은 안팎으로 큰 전환이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민주노총 건설이 논의되면서 교육협회도 연구기능 강화 요구 등을 이유로 연구소 설립 논의를 본격화합니다. 1994년 10월25일의 이사, 운영위원 합동회의에서 연구소 설립을 결의했고, 11월에는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에 가칭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준비위원으로 참가해 줄 것을 공식 제안했습니다. 이 즈음에 섬유노련에서 일했던 이원보가 결합했고, 이 때부터 전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습니다. 

1995년 1월30일 46명의 조직대표 및 개인이 준비위원으로 수락하고, 3개의 조직대표가 참관 자격으로 결합하면서 김진균 교수를 준비위원장으로 하여 연구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발기인을 모집했습니다.

1995년 4월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4월1일에 사무실을 회현동 남산빌딩 2층으로 이전했고, 13일 제2차 준비위원회를 통해 연구소 설립을 확정했으며, 28일에는 총 228명의 발기인을 모집하여 서울대 동창회관에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창립대회를 치렀습니다. 이사장을 김진균, 소장을 김금수, 부소장을 이원보가 각각 맡게 됐습니다. 이 때부터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10년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어 5월8일에는 현 『노동사회』의 전신인 『노동사회연구』가 창간되어 그 첫 호를 발행합니다. 

그리고 연구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의 경영참가, 산별노조, 조직진단, 리더십 연구 등 노동조합의 조직 연구, 노동운동사, 노동의 인간화,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 등의 연구는 이후 연구소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초석이 됐습니다. 

1997년 7월에는 『노동사회연구』를 『노동사회』로 변경하면서 월간으로 발행을 시작하고, 회원제도를 통해 안정적인 재정과 활동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박중기 이사님와 전무배 고문님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죠. 

교육사업에도 많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강사훈련과정을 계속 진행하고, 한겨레노동교육연구소와 함께 한 노동교실, 민주화섬연맹과 함께 한 현장활동가 훈련 등 기획교육과 파견교육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교육의 체계화와 단계별 학습을 위한 “21세기 노동교육”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국제연대활동이 본격화된 것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1995년에는 한국·브라질·남아공 노동운동 발전을 위한 연구와 정보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많은 해외 노동조합 및 운동단체들과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연구소 창립부터 참여한 인수범, 이민영, 노광표, 김영두, 박영삼과 홍주환, 윤효원, 김희정, 이선옥, 이광석, 김채미 등이 연구소의 이 전환기를 함께 한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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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약을 위한 준비 (2000년~2004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96~97 총파업’과 IMF 구제금융 사태, 이어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연구소에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며 21세기를 맞이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산별노조 건설, 전략적 개입, 사회공공성 확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현장교육 강화, 국제연대 활성화 등 연구소가 제안했던 주제들을 본격화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기존 성원들은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고, 노동운동의 상황 변화에 부응하여 공공부문과 공무원노조 운동,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장과 임금체계, 노동교육 프로그램 등의 실천적인 연구 과제가 진행됐습니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운동이 향후 운동의 중심 축이 될 것이라는 판단 속에 공공포럼을, 노동운동 노선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요청 속에서 노동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2000년 이후 국제연대 사업은 더욱 활발해져서, 한국·브라질·남아공 3국 노동조합의 연대회의에 참가하는 한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국제교류 지원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연구소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05년 초 국제정보센터를 출범시켰습니다. 

1997년 9월부터 이사장으로 활동한 김금수 선생님을 비롯, 이원보, 김유선, 김태현, 노광표, 김영두, 인수범, 홍주환, 박혜경 등 1980년대 노동운동 경험자들이 이 시기를 주도했다면, 지금의 충정로2가로 옮겨온 1999년 이후에는 새로운 면면들과 함께 연구소의 분위기도 상당히 바뀌게 되었고, 연구실, 교육실, 편집실에서 보다 전문화된 영역을 나누어 맡게 되었습니다. 

김금수 이사장님이 노사정위원장으로, 김태현 부소장님이 민주노총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2004년 2월부터 현 이원보 이사장님, 김유선 소장님이 연구소를 이끌고 나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부터 사무실을 확대하고 인력을 충원하여 더욱 적극적인 연구소 활동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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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 걸음을 위하여

한국노동교육협회로부터 19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창립으로부터 10년.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의 입으로 말하며,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론과 정책을 생산하고, 현대사회의 정보와 지식을 선도하는 전문성으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노동자 연대를 실현하고자 연구소는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그 동안 진행한 수백 건의 상담, 60여건의 연구사업, 40여종의 단행본과 50여종의 연구보고서 출간, 38회의 노동포럼과 19기에 이른 노조간부 기본과정 등 노동교육 사업과 국제교류 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소중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성과들입니다. 무엇보다 지령 100호를 맞은 『노동사회』, 10년을 맞은 연구소의 존재 자체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 여러 분들의 노고와 애정이야말로 연구소를 지켜온 버팀목이자, 미래의 거름이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제껏 연구소와 함께 고생하며, 또 연구소를 여러 모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전인미답의 길을 힘차게 내딛고자 하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결의와 포부로 보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