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바르, 당신의 꿈에 피와 살을

노동사회

볼리바르, 당신의 꿈에 피와 살을

편집국 0 3,481 2013.05.1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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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볼리바르의 꿈에 뼈와 살을 붙이고 심장과 영혼과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알레한드로 톨레도 페루 대통령)
“우리의 거울은 유럽연합이 될 것이다.”(에두아르도 두알데 메르코수르 상임대표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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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 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국을 해방시킨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하나로 통일된 라틴아메리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볼리바르는 이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지금 그의 후예들이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초 라틴아메리카 정상들이 출범을 선언한 남미공동체(CSN, Comunidad Sudamericana de Naciones)가 바로 그것이다.

남미 12개 국가(메르코수르 회원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안데스공동체 회원국: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그 외에 칠레, 기아나, 수리남) 정상들은 잉카제국의 수도인 페루의 고산도시 쿠스코와 1824년 볼리바르의 부하 수크레가 에스파냐군을 물리친 아야쿠초에서 제3차 남미정상회의를 갖고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안데스공동체(CAN)의 통합을 선언하는 한편, 향후 유럽연합처럼 남미의회를 구성하고, 하나의 시장과 단일통화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쿠스코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이 실현된다면 인구 3억7천만명, 국내총생산(GDP) 1조달러 규모, 면적(1천7백72만 평방미터)으로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2천1백59만 평방미터) 다음으로 큰 거대 시장이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뒷마당에 불과했던 라틴아메리카가 국제정치 무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같은 움직임에 각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dlp_01.jpg남미 경제통합운동, 연이은 좌절의 역사

하 지만 라틴아메리카 경제통합운동의 잇단 좌절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쿠스코 선언은 호들갑을 떨며 전할만한 소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1960년부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경제통합운동에 적극 나선 바 있다. 1930년대부터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수행해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1950년대부터는 각국의 좁은 시장규모, 중간재와 자본재에 대한 대미 의존도 강화 등의 구조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통합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에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연합(ALACL)이 결성됐고, 1961년 중미공동시장(MCCA) 결성, 1969년 안데스 국가들 사이의 공동시장 합의, 1973년 카리브해 연안국가들의 카리브공동체와 공동시장(CARICOM) 합의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같은 경제통합운동은 원대한 목표가 무색하게도 자국산업을 보호하는 한도 내에서 ‘제한적인 무역자유화’ 정도에 머물렀고, 유럽처럼 경제통합을 촉진시키고 지역의 공동이익과 정책협조를 위한 상설기구를 제도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같은 좌절을 겪은 경제통합운동은 1980년대말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이 라틴아메리카에 몰아닥치면서 각국은 새로운 성장모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선 각국의 민선정부들은 해묵은 갈등과 경쟁의식을 극복하고 지역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외적으로는 유럽, 동남아시아, 북미 등에서 블록화가 진행되면서 라틴아메리카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90 년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지대 결성을 위한 협상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3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의 남미공동시장 합의(아순시온 조약), 5월 안데스 협약 당사국들의 재통합 가속화 합의(까르따헤나 정상회의), 12월 중미 공동시장 건설 결의(떼구시갈빠 정상회의)가 이어졌고 카리브공동체 회원국들도 단일시장 창설을 빠르게 추진해나갔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블록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벌어졌지만 대륙 차원이 아닌 국지적 블록화라는 한계 외에도 블록내 중심국가와 주변국가 사이의 마찰,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 차원의 경제통합 추진 압력(ALCA, 미주자유무역지대), 지역협력보다 미국경제권 편입을 선호하는 회원국들의 내재된 욕망 등 내외적 요인들로 인해 경제통합은 기대만큼 진행되지 못했다.  

남 미공동체 창설 합의가 이뤄졌지만 메르코수르 내부에서는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에 대해 무역장벽을 설치하는가 하면 브라질 농민들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쌀의 통관을 저지하는 일이 벌어졌다(The Economist, December 11th, 2004, 35쪽). 안데스공동체는 메르코수르와의 무역액보다는 대미 무역액이 훨씬 높은 실정이다. 남미의 주요국 가운데 하나인 칠레는 안데스공동체에 참가했다 탈퇴한 뒤, 메르코수르에도 참여하지 않고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에 주력하는 한편 북미자유무역협정 편입을 시도하는 등 따로 놀아왔다(칠레는 1996년에 메르코수르 준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무엇보다 남미의 대국인 브라질에 대해 갖고 있는 각국의 경계심은 경제통합을 더디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구매력지수(PPP)로 환산한 브라질의 GDP는 다른 11개국 GDP의 총합보다 많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향후 남미공동체 건설 과정에서도 브라질 경제의 흡입력은 내부 갈등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요

그렇다면 이번에 남미 12개국이 내세운 남미공동체라는 원대한 포부도 과거 경제통합운동과 비슷하게 허망한 꿈으로 끝날 것인가? 아직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사실이다. 통합에 난관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통합의 주체들이 다르다. 과거 ‘경제통합’이 우파 정치인들의 한낱 정치적 수사들에만 존재했다면 지금 라틴아메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좌파정부들은 어느 때보다 통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메르코수르에 적극적인 타바레 바스케스가 지난 10월 우루과이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파라과이를 제외한 메르코수르 정회원국 세 나라를 좌파성향의 대통령이 이끌게 됐으며, 안데스공동체에는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 좌파성향의 정부가 들어서 있고 가스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볼리비아에서도 좌파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또한 미국이 추진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 형성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반감이 커지면서 독자적인 블록형성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쿠바를 제외한 아메리카 대륙의 34개국을 대상으로 한 미주자유무역지대는 지난 2003년 11월 마이애미에서 열린 각료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협상이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다. 2005년 1월 출범시키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일찌감치 수포로 돌아갔고 미주자유무역지대 형성은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2003년 8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과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미주자유무역협정은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며 라틴아메리카의 경제통합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렌지, 설탕 등 라틴아메리카의 수출품에 대한 통상장벽을 낮추지 않으면서 시장개방을 강요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면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주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경제통합운동이 단순한 역외공동관세 수준의 낮은 단계에 머물렀다면 남미공동체는 공동시장, 단일통화 등 높은 단계의 경제통합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현재 메르코수르와 안데스공동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관세동맹’ 정도에 불과한 상태이지만 남미공동체는 유럽연합과 같이 통합기구를 상설화하고 관세철폐, 무역장벽 제거에서부터 중앙은행 설립, 단일통화 채택에 이르는 한층 높은 통합작업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가 장 중요한 것은 남미공동체가 경제통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미공동체는 단기적으로는 메르코수르와 안데스공동체의 통합을 통한 공동시장 건설로 시작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남미대륙을 아우르는 정치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3월 브라질에서 열릴 첫 정상회의에서는 2005년 중으로 마련할 남미공동체 헌법 초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어이 부시, 뒤통수 간지럽지 않나?

그동안 세계화와 함께 진행된 지역경제블록화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3극에 의해 추진돼왔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던 남미 국가들이 독자적인 경제블록 형성을 모색하는 것은 3극 중심의 신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맞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 난 2003년 10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발표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컨센서스’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컨센서스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각국 정부의) 자율성은 다양한 (국제적) 다자 기구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키움으로써 투기금융자본의 불안정한 운동과 선진국 블록의 공세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며, “이 점에서 성장·사회 정의·만인의 존엄성을 결합한 발전 모델이라는 목표를 향한 남미의 통합은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선언했다(윤효원, “부에노스아이레스 콘센서스” vs “워싱턴 콘센서스” 『진보정치』 154호 참조).

부시 행정부가 저 멀리 중동에 관심을 쏟고 있는 동안 ‘뒷마당의 조용한 반란’은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다. 미주자유무역협정이 난항을 겪자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분할통치 전략 하에 개별적인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메르코수르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미국의 노림수는 남미통합이라는 강력한 역풍을 맞게 됐다.

선진국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에 맞선 남미 국가들의 통합운동은 남남협력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계기가 될 것이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맞선 부에노스아이레스 컨센서스의 정신이 이 통합운동에 어떻게 녹아들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