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노말헥산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무지

노동사회

범인은 노말헥산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무지

편집국 0 5,547 2013.05.13 11:18

2005년 벽두에도 한국사회는 사람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사건, 사고들로 시끌시끌하다. 한국사회가 자본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미처 합리화, 근대화되지 못한 것들이 뿜어내는 악취 속에, 시장의 전능함을 신앙으로 삼아 노동자민중의 삶을 재편하려는 첨단 신자유주의 정책이 쏟아내는 신제품들과 이에 대한 저항들이 무서운 속도로 제목을 갈아치우며 뉴스란에서 명멸하고 있다. 
이 가운데 90일이 넘게 곡기를 끊으면서 개발과 환경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 주체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주는 한 스님의 청정한 눈빛이 있다. 그리고 또 한 켠에는 그들 스스로는 결코 알아내지도 해결하지도 못했을 엄청난 재앙 앞에 힘을 잃고, 이 사회를 향해 우리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묻는, 무력하지만 원망스런 눈빛이 있다. 

노말헥산에 중독되어 하반신이 마비된 이주노동자들이 뉴스 지면을 크게 장식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집단 직업병문제가 이렇게 사회이슈화 될 수 있었던 데는 너무도 적나라한 이주노동자의 인권침해 현장이 언론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며칠동안 일어난 비슷한 일들, 1월20일 오후 경기도 파주에서 20미터 높이에서 용접작업을 하던 건설노동자가 떨어져 죽었고, 21일에는 산재치료 중이던 대우조선 노동자가 음독 자살했으며, 22일 오전에는 파업 중인 현대자동자 비정규노동자가 분신을 기도했다는, 이어지는 노동자의 죽음들에 이 사회가 이다지도 덤덤한 까닭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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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말 헥산에 의한 다발성 신경장애 치료를 위해 태국 여성노동자들이 재입국하고 있다.   - 출처:오마이뉴스 ]

“걔들한테 나 정도면 잘 해준 거지”

어쨌거나 이번에 뉴스에 보도된 타이 이주노동자들은 1년 가까이 ‘반(半)감금’-선정적으로 들리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상태에서 사업주가 주는 물질을 다루다가 ‘다발성 신경장애’라는 상상 못할 병을 얻게 되었다. 발병 이후 한국인 사업주의 반응은 믿지 못할 만큼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이었다. 이들을 작업장에서 나오게 한 후 다시 기숙사에 가두어 버렸고, 이들 가운데 3명은 타이로 돌아가라고 공항에다 내버리다시피 했다. 

이번 노말헥산 중독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정부는 처음에는 작업환경측정에서 기준치를 ‘약간만’ 넘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측정 당시에도 회사 안에 이주노동자들이 있는지, 작업장의 환기장치나 보호장비는 있는지 따위는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조사 당시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런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주노동자 8명에게서 다발성 신경장애라는 병이, 그것도 매우 심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정말 노말헥산을 사용한 거냐?”, “그렇게까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 거냐?”,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이런 상식적인 의문들은 이주노동자들이 기준치나 오차범위를 거론하기조차 무안한, 기준치의 수백 배에 달하는 노말헥산에 노출되는 비상식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이 5명의 노동자들은 노동상담소를 만나고 나서야 병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한국인 목사가 고향으로 쫓겨난 3명의 노동자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타이에 갔을 때 한 노동자는 떨리는 손으로 “사장님, 우리를 데려가서 치료해 주세요.”라고 썼다. 그러나 한국인 사장은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는가. 나 정도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잘해준 편이다.”라고 기자들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나는 사장의 ‘하소연’이 반드시 꾸민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사실 그 속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공장을 운영한다고, 이른바 기업을 운영한다고 하는 이들에게 이 정도의 양식수준이 일반적일 것이란 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정부의 대응이 이례적으로 매우 신속하였다. 사실, 내가 일하는 단체 명의로 성명서를 쓰면서 사업주의 행위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정도가 아니라 형법상 ‘과실치상’에 해당하는 중범죄이니 구속하라는 주장을 하긴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정부와 검찰이 신속하게 ‘특별점검반’을 구성해 노말헥산 사용 실태조사에 나선다 하고, 사장을 과실치상으로 구속하는 걸 보니 되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큰 사망사고가 일어나도 벌금 200~300만원으로 처리되거나 불구속 수사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안전보건 실태 점검=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그 속내는 바로 드러났다. 이주노동자의 안전보건 실태를 점검한다고 하면서 미등록 노동자를 솎아내려는 음험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생색도 내면서 실속도 챙기는 효율적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미 피해사례가 이주노동자 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노말헥산 사업장에서는 이미 수십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출국당했거나, 출입국관리소에 끌려가는 등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사장에 대한 구속은 문제의 확산을 막고, 한 기업만의 특수한 문제로 사건을 정리하려는 계산이 깔린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판단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미등록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장기간의 농성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건이 일어났고, 사건의 크기가 이주노동자 당사자의 분노는 물론,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연대투쟁을 촉발할 수도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정치경제적 토대의 정당성, 도덕성을 회의하게 하는 사건이며, 국제적으로도 한국사회의 천박한 이면을 드러낼 만한 악재였기 때문에 시급히 진화하는 것이 상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들여다보니 공허하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 자체는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정부관료는 언론에 대고, “합법 취업한 이주노동자는 법제도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문제가 없다”며, 미등록 노동자이기에 직업병에 걸린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노말헥산에 중독된 8명 속에는 합법취업자도 포함되어 있다. 

뉴스를 보며 아마 많은 이들이 떠올렸을 테지만, 이번 일은 과거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원시적 직업병 사건들과 매우 유사하다. 1992년 발간된 『노동인권보고서』 2집을 보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에게 이황화탄소 중독사건이 일어난지 3년이 지나고, 이미 100여명이 넘게 직업병 판정을 받은 -현재 900여명의 노동자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판정되었다- 당시에도, 노동부와 회사측은 “작업환경측정에서 큰 문제가 없다”, “기준치를 넘지 않았다”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토록 우매한 기술적 조작과 맹신은 이번 노말헥산 중독사건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15년여의 시간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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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다. 살인기업주를 처벌하라' 노동자대회 전야제 선전전 모습  -출처:노동건강연대 ]

영세사업주 90%는 ‘범법자’

2004년 4월 현재 산업안전보건 관련 규제는 100여개에 이른다. 그런데 규제가 지켜져야 할 현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2004년 가을에서 겨울사이 노동건강연대는 서울 성수동 지역에서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무료건강검진’을 진행하였다. 80여명이 검진을 받으러 왔고, 이 가운데 60여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숫자로만 보면 조촐한 규모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온 설문결과는 우리 사회 영세노동자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를 보면, 조사 노동자의 32%는 산재를 겪었다고 답했으나, 이 가운데 6%만이 산재신청을 했다고 답했다. 일터에서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있다고 답한 노동자는 8%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해물질을 다루는 노동자가 받아야 할 특수건강진단은 6%만이 받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산재보험에 가입하였다고 답한 노동자는 28%, 건강보험에 가입했다고 답한 비율은 54%였다. 이 결과에 의하면, 90% 이상의 영세사업주들은 실정법을 어기는 범법자들이다. 

또, 2004년 노동건강연대가 학교급식조리노동자 337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75%이상이 소음, 고열, 다습한 환경이 심각하다고 답하였다. 위험한 기계와 기구, 미끄러운 바닥에서 일하기 등 1년간 사고의 발생률은 34.2%였으며, 이는 금속산업사내하청노동자, 골프장 경기보조원노동자에 비해서도 높은 사고 위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2004년 11월, 제화노동조합이 성수동 지역 제화노동자의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유기용제, 분진, 소음 등의 노출수준이 심각하였으며, 장시간노동도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제화노동을 하면서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51.7%에 달하였으며, “신체 근육이 이상하다”고 표현한 근골격계질환이 가장 많았고(42.3%), 15.4%가 본드 등의 유기용제로 인한 이상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또 회사가 제공하는 건강진단을 받아본 경험은 26%에 불과하였으며,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개인 비용으로 처리하거나(19.2%) 개인 의료보험으로 처리(35.9%)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반면, 산재보험(7.7%)이나 사업주 부담(10.3%)으로 처리했다는 제화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80년대 말까지 ‘노동자’ 지위를 갖고 있던 제화업자들은 비용절감과 구조조정 차원에서 유행한 소사장제로 인해 개인사업자로 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장이 되면 돈도 더 잘 벌고, 건강상태도 나아져야 할텐데, 왜 일은 더 하게 되고 아파도 병원에 갈 처지마저 안 되는 상황으로 나빠지는 걸까? 남은 것은 ‘노동자성’을 부인당하는 무권리 상태, 노동규제와 노동자건강권 규제의 사각지대가 된 제화일터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00가지가 넘는 산업안전보건규제는 노동자들에게 현실적인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해당사자인 노동자의 권리를 구현하고, 이를 위해 사업주에게 의무를 지우는 규제방식이 아닌, 정부가 직접 사업주에 대해 부과하는 명령, 지시만이 살아있는 현재의 규제방식은 노동자의 건강상태와 직업병 발병에는 관심이 없는 체제임을 증언하고 있다. 

인권의 눈으로 보는 노동자의 몸

우리는 이런 상식 속에서 큰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잘 산다는 것,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희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업경쟁력 또한, 이것으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 노동자와 서민들의 살 만한 생활의 질이 더 이상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아지면서 보편적인 복지를 누리고 사는 것, 이것이 좋은 세상을 논하는 것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을 잊은 채 기업경쟁력 회복이 모든 선의 기준인 양 모두들 착각하고 사는 듯하다. 국가적 부가 팽창하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그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다. 

- 1992년 출간된 『노동인권보고서』 발간사 중에서


2005년 2월의 공기가 1992년 5월의 공기보다 따뜻하거나 가볍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노조활동으로 인한 의문사, 감시, 납치, 폭행 등 지금은 보기 드문 ‘어두운 시절의 단어들’을 제외하면, 건강권을 포함한 노동인권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 일부 대기업노조가 맞닥뜨리고 있는 민주적·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내부위기와 외부의 공격 등이 변화된 상황일 수 있겠다. 그러나 시간제 여성근로자의 이름이 여성 비정규노동자로 바뀌고, 영세하청노동자의 이름이 그대로 영세하청이거나 이주노동자로 바뀌었을 뿐, 노동사회가 인권을 모르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풍토는 여전하지 않은가. 

시민적 권리, 자유권적 권리가 진전했음에도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인권, 사회권적 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가 입는 끔찍한 재해들, 사망, 부상, 중독, 질병을 문제삼지 않는 사회가 정당한 도덕적 기반을 갖춘 사회일까? 100가지의 규제를 지키면 이주노동자 노말헥산 중독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영세사업주의 90%가 위반하고 있는 법제도의 존립근거는 무엇일까?  

규제는 지켜져야 하고,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규제와 시스템이 노동자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제도가 있어도 노동자인권과 건강의 수준은 사회의 양식과 도덕이 보호해주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완벽한 제도도 없다. 바로 지금 정부관료와 기업, 그리고 노동운동도 인권의 눈으로 노동자의 짓이겨지는 육체와 정신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노출기준과 오차범위에 얽매여 양심과 상식이 정하는 권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정도는 멈출 수 있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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