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볼리비아 가스전쟁

노동사회

다시 시작된 볼리비아 가스전쟁

admin 0 4,689 2013.05.12 05:52

초국적 석유메이저 기업인 로열더치 쉘은 얼마 전 "2025년까지 가스가 석유를 제치고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천연가스는 석유나 석탄에 비해 온실가스가 적게 배출되는 청정원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천연가스는 석유와 달리 상온에서 기체상태에 있기 때문에 채취단계에서 연소되거나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일이 잦다. 또 짧은 거리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할 수 있지만 장거리 운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천연가스 액화기술, 즉 천연가스를 냉각시켜 액체형태로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각국 정부, 특히 한국과 일본 등 비산유국들이 천연가스 개발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천연가스 통제권을 둘러싼 전쟁

jsyoon_01_0.jpg지금 이 천연가스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볼리비아 얘기다. 미디어에 의해 '전쟁'이라고 명명된 이 사태의 발단은 지난 2002년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당시 대통령이 52억 달러 규모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계획이란 지난 20여년 동안 볼리비아 경제를 좌지우지해온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산체스 전 대통령이 초국적 에너지회사들을 끌어들여 인접국인 칠레를 통해 천연가스를 미국에 수출하려던 것이었다. 이는 곧 노동자, 농민, 학생, 교사 등 볼리비아 민중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지난해 9월 수도 라 파스를 비롯한 볼리비아 전역에서는 산체스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과 가스산업의 재국유화(renationalization)를 요구하며 볼리비아노총(COB)의 총파업을 비롯하여 연일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집회가 열렸다.

한달여 동안 퇴진요구 시위가 지속되었고, 정부가 강경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이 사태는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궁지에 몰린 산체스 대통령은 결국 그 해 10월17일 사임을 선언하고 미국 마이애미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이로써 가스전쟁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카를로스 메사 부통령은 산체스 대통령을 하야시킨 볼리비아 민중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듯 했다.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칠레를 통한 천연가스 수출계획을 일단 연기시키고 가스산업의 미래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같은 메사 대통령의 계획은 최대 좌파정당이자 '가스 전쟁'을 이끈 사회주의운동당(MAS)을 비롯해 노동조합과 농민단체 등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산체스 정부 시절 이미 탄화수소법(가스산업의 민영화 법안)에 따라 수십 건의 계약을 따낸 엔론, 렙솔, BG 등 초국적 기업들이 정부에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은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비중을 6.8%로 낮추고, 산체스 정부가 가스생산 민영화를 계속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대규모 시위 불 지핀 기만적 국민투표

이런 상황에서 메사 대통령은 약속대로 7월18일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예'와 '아니오'로 대답해야 하는 5가지의 질문 가운데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가스산업의 국유화와 관련된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국민투표 용지에는 핵심적인 이슈가 빠진 상태에서 탄화수소법의 개정 필요성이나 이미 민영화된 석유회사의 개편 필요성 등 애매모호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진정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영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이용하려는 메사 정부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국유화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는 것을 본 볼리비아 민중들은 투표불참 운동을 선언했다. 이에 정부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유권자는 벌금을 물게 될 것이고 향후 공무담임권을 박탈당하거나 심지어는 신규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가하며 투표를 강요했다. 또 투표용지에 찬반 기표 외에 다른 문구를 적는 경우 이를 찬성으로 간주하겠다는 방침까지 발표했다. 국민투표에서 메사 정부가 신임을 잃을 경우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 민중들은 등록된 유권자의 40%가 투표에 불참했고 20%는 기권을 하거나 투표용지에 "국유화"라고 쓰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을 표출했다. 투표소마다 군경을 동원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볼리비아 전역에서는 기만적인 국민투표 실시에 항의하는 시위가 종일 이어졌다.

전체 유권자 수에 비하면 30%만이 찬성표를 던졌을 뿐이지만 메사 대통령은 이날 국민투표의 결과를 천연가스의 수출 허용, 초국적 기업에 고율의 세금 부과 등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찬성으로 해석했다. 언론도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메사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했다고 분석했다.

국민투표 이후 메사 대통령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볼리비아 석유회사(YPFB)를 재출범시켜 초국적 석유회사와 민간자본의 투자를 받아 천연가스를 개발, 칠레를 통해 수출하고, 천연가스 사업에 참여한 외국기업들에 대해서는 생산가의 50%를 세금과 로열티로 내도록 해 정부가 이를 교육과 사회 인프라 확충에 투자하도록 하는 내용의 탄화수소법 개정을 추진한 것이다.

정부의 천연가스 정책이 전면화 되자 볼리비아 노총과 농민총동맹(CSUTCB), 무토지농민운동(MST) 등을 주축으로 한 또 한번의 반대투쟁이 시작됐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코차밤바에서는 지난 8월25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코차밤바는 지난 2000년 말 민영화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곳으로, 정부와의 계약에 따라 이 지역 수도 공급을 담당했던 미국 벡텔사의 자회사는 결국 철수를 결정하고 말았다.

풍요롭기에 가난한 볼리비아 사람들

볼리비아는 원래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고산지대에는 은, 주석 등 광물이 널려있다. 19세기에는 은과 고무를, 20세기에는 주석을 수출해 돈을 벌여들었고 최근 들어서는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볼리비아에 부를 가져다줄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됐다.

하지만 자연자원이 풍부할수록 가난하다는 역설을 입증하듯 부는 광산 소유주 등 소수에게만 집중될 뿐이었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오들은 빈곤에 허덕일 뿐이었다. 정부는 자원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적절히 분배하는 데 소홀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몰아닥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볼리비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정부는 돈이 되는 국유재산을 모두 내다 팔기 시작했다.

볼리비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천연가스마저 민영화되고 싼값에 미국과 멕시코로 수출하려는 정부의 계획은 결국 초국적 자본과 소수 기득권층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 게 뻔하다. 정부는 천연자원 개발에 참여하는 다국적 기업에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렙솔, 페트로브라스, 비피아모코 등 참가 기업들의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얼마나 약속이 이행될지도 의문이다. 지난 달 트럭기사들의 유가인하 요구 시위에 정부가 유가동결을 약속했다가 석유업체들의 반발로 후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석유자본의 막대한 영향력 하에 놓여있는 메사 정부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누가 천연가스와 미래를 함께 할 것인가

천연가스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볼리비아의 가스전쟁은 대통령 하야와 국민투표로도 끝나지 않고 한층 더 격화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투표를 놓고 약간의 혼란을 겪은 좌파정당과 사회운동 진영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서고 있다. 한편에서는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자적인 자연자원 통제기구 구성 움직임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과 미국, 초국적 석유메이저 기업들도 이 가스전쟁의 승리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요 공공부문을 재국유화한 뉴질랜드나 철도의 재국유화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영국에 이어 초국적 자본의 먹잇감이 된 천연가스를 지키려는 볼리비아 민중들의 투쟁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