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건강권 운동의 성격과 위상, 그리고 전망

노동사회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성격과 위상, 그리고 전망

admin 0 3,491 2013.05.12 05:00

여타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산업재해 문제의 시작은 산업화의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노동3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군사정권 하에서 산업재해나 직업병은 사회적 의제로 등장하기 어려웠다. 실제 산업재해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등장한 시기는 1987년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산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재추방의 신호탄, 87년 노동자대투쟁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산재추방운동’이 태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형성하게 된 것은 문송면군 사망대책활동과 연이은 원진레이온 투쟁이었다. 1988년 작업 중 급성수은중독에 결려 사망한 15세 소년 문송면군 사건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산재문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책활동 중심의 산재추방운동의 정점에 있었던 원진레이온 투쟁은 노동조합을 통한 대중적인 산재추방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사회운동 전반에 산재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초기 산재추방운동은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산업재해, 직업병문제를 사회적 현안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많은 성과를 남겼다.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던 정부와 제도권에 자극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제도권의 산업안전보건에 질적, 양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여러 형태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각 지역에서도 조직들이 자발적으로 결성되어 산재추방운동의 활성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산재추방운동단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노동조합이 산재추방운동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노동조합의 산업안전보건활동 역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들이 결성되고 노동운동의 대중적 토대가 형성되면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다. 임금인상투쟁, 신규노조 건설, 지역별 노동조합협의회 건설, 노동악법 개폐투쟁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 계급의식이 점점 높아졌고, 자연발생적인 작업환경개선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함께, 그간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속에 묻혀 왔던 산업재해·직업병 문제가 단위사업장들의 공동 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연대투쟁이 활성화되었다.

산업안전보건활동 이상의 것에 대한 요구

특히,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노동조합의 산업안전보건활동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노협이 금속 조직노동자 대상의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중심에 두었던 반면에 민주노총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단위사업장의 활동력을 뛰어넘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여전히 금속 중심의 대기업 노동조합의 문제에 대응하는 수준으로 산업안전보건활동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노동조합의 산업안전보건활동이 전체 산재추방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발전함에 따라 개별 산재추방운동단체의 역할과 위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1998년 전문가단체, 노동조합, 산재노동자 단체가 함께 하는 산재추방운동연합의 결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산재추방운동연합은 조직형식만을 보면 기존의 산재추방운동단체와 산재노동자단체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대기업노조 중심의 산업안전보건활동에 대한 지원과 연대 활동을 전개하는 조직이었다. 특히 산재추방운동의 사회적 여건이 위축되고 산재문제의 심각성이 첨예화된 IMF시기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역량을 집결하여 산재문제를 사회화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결성이 급진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산재추방운동연합은 산재요양 중에 자살한 이상관씨 대책활동을 계기로 첨예한 내부 갈등관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운동 주체간에 해소하기 어려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한 후 해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작용한 것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조합 산업안전보건활동의 지원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산재추방운동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건 산재추방운동연합의 결성과 해체를 겪으면서 운동 주체들은 대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산업안전보건활동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되었고, 그러한 틀에 기초해서 산재추방운동이 갖는 문제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욱이 IMF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광범위한 비정규노동자를 양산하면서 노동조건 및 건강 문제에서도 이들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일상화되었다. 때문에 기존의 형식과 내용의 산재추방운동으로는 산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자건강의 문제를 조직된 노동자에서 전체 노동자의 것으로 확장하고, 더 나아가 전체 민중으로 확장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노동자 건강의 문제를 주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기 위해서 연대의 대상과 내용이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무엇인가

이처럼 기존의 산재추방운동이 조직된 남성 대기업노동자 중심의 운동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인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조직된 노동자뿐만 아니라 미조직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산재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포함한 운동이다. 조직 형식에 있어서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배치되는 운동이 아니라 주변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전개되고, 큰 틀에서 전체 노동자를 아우르면서 전개하는 운동이다. 주변부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는 건강문제 자체가 ‘생존의 문제’인 경우가 많으며, 고용, 인권, 복지 등 다양한 문제가 중첩되어 있어서 총괄적인 접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산재추방운동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로 대변되는, 구체적 현장에서의 건강권 문제를 주로 다룬다면, 새로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현장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 측면에서의 건강권으로 문제를 확장한다. 이러한 사회적 의미의 건강권은 노동자가 건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위협하고 건강의 차별을 낳는 제반 사회적 조건을 철폐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련의 내용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산재추방운동이 전통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기초한 것이고 이를 강화하는 데에 일조한 운동이었다고 한다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과제 뿐 아니라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인권운동’, 노동자 민중의 건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한 ‘보건의료운동’ 등과 공통의 과제를 갖고 함께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사회운동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주요한 동력 역시 기존의 산재추방운동과 조금 다른 특성을 갖는다. 산재추방운동의 경우 운동의 동력이 초기 진보적 보건의료인에서 나중에는 금속 중심의 현장 조직노동자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현장 노동자가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한 채 조직노동자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고, 그 중에서도 금속의 대공장 위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운동의 동력을 조직노동자뿐만 아니라 영세비정규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건강문제에 있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미조직노동자들도 중요한 운동 동력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또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전체 국민 또는 시민의 건강하게 삶을 영위할 권리와 깊게 연관된 운동이라는 점에서 보건의료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제반 시민사회운동 영역과 실제적인 연대를 구축하면서 운동의 동력을 확장해야 한다. 현재 성장 발전하고 있는 다양한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영역과의 연대의 틀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은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커다란 강점이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그 힘이 미약하긴 하지만, 현재 양극화되고 있는 노동시장에서 건강권의 문제가 가장 ‘약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향후 노동운동 및 전체 진보운동에서 중요한 운동 영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자건강권운동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사회운동의 영역으로서 위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뿐 아니라, 노동자가 산재문제의 직접적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인권, 복지, 보건의료 등 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영역을 넘어선다.

일반적으로 ‘건강권’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로서 인정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UN 산하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위원회(the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CESCR, 사회권 위원회)’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이하 사회권 규약)’ 12조에서 “체약국은 누구에게나 성취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건강권을 규정하고 있다.

노동자건강권은 이러한 건강권 개념의 구체적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또는 조직노동자든 미조직노동자든, 또는 여성노동자든 남성노동자든, 또는 한국 국적의 노동자든 외국인이주노동자든 상관없이 차별을 받지 않고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사회적 차별로부터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제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인권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사회복지를 강화하기 위한 제반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기업복지를 뛰어넘어 노동운동이 사회복지에 착목해야 하는 이유는 개별 임금이 갖는 이중성에 있다. 즉 투쟁의 성과라는 측면과 노동의 분할전략 일환이라는 측면이 공존하는 개별 임금에 노동조합의 투쟁이 집중될 경우 노동운동의 발전을 제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일치한다. 또한 사회임금으로서 교육, 의료, 주택 등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은 전체 노동자의 연대, 더 나아가 전체 민중의 실질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노동자가 가장 기본적인 4대 사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복지를 강화하기 위한 투쟁은 선택의 차원이 아닌 당면한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의미하는 바가 현장의 직접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개별 노동조합 차원의 작업환경 및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의 건강과 관련한 사회적 권리를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때 당연하게도 사회복지운동과의 연결고리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보건의료운동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전체 민중의 건강문제와 떨어져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검진 등 극히 제한적인 영역만이 쟁점이 되었지 일반적인 건강문제는 산재추방운동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상당수의 건강문제는 문제의 원인이 사업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생하였더라도 그 해결책은 일반적인 보건의료분야와 연관 속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산재추방운동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모색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산재보험 및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은 노동자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는 측면에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중요한 활동내용이어야 했지만, 기존의 산재추방운동에서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보건의료운동과 연대의 폭과 깊이가 확장되어야 한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근본적 목표보다는 운동이 해결해야 할 중기적 목표와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은 크게 노동자건강을 위협하는 제반 환경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활동의 영역과 노동자가 재해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손상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보상받고 차별 없이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사회복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활동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두 가지의 활동영역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활동과정에서 상호침투하고 발전하게 되지만 개념적으로 구분하면 전자의 활동영역에 노동시간단축, 비정규직 철폐를 통한 노동자건강권 확보 투쟁, 비정규직·이주·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산재 및 건강권 보호활동, 산재다발 사업장 및 정부정책의 감시활동, 산재 및 노동자건강에 대한 기업의 책임과 사회적 제재 강화를 위한 캠페인 활동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활동 영역은 산재노동자의 보장성 강화와 사회복귀를 위한 산재보험제도의 전면적 개혁,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보건의료의 공공성 강화 활동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건강권운동이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결되어 있고 활동의 영역이 매우 광범위하다고 해서 모든 운동 과제를 노동자건강권운동이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산재추방운동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이고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성격과 위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활동 전망이 객관적인 정세에 대한 분석과 현실 역량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기초하여 수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굳어져 온 운동의 관성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여타 분야의 운동주체들간 교류와 연대가 조심스럽게 확대되고 있고, 어렴풋하게나마 현실적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의 가능성을 점쳐 본다. 운동의 관성에 묻혀서 현실의 한계를 탓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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