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인터내셔널의 탄생

노동사회

제2인터내셔널의 탄생

admin 0 6,511 2013.05.11 09:46

19세기말 30년과 20세기 초에 걸쳐 자본주의는 괄목할 성장을 하여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새로운 착취형태가 생기고 경제와 정치에서의 억압도 강화되었죠.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확대되고 정치 의식도 높아져 노동자계급의 자립 정당 결성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집니다. 노동운동 발전에서 정당의 창립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합니다.

한편, 이 기간에도 노동자계급의 국제 결합은 발전합니다. 각국의 노동운동가들은 계속해서 접촉하였고, 다른 나라 파업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선거운동을 비롯한 캠페인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일은 흔한 일이었죠. 이런 국제 연대활동은 활동과 투쟁 경험을 나누고 국제주의 정신을 확산하기 위한 노동자 교육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gskim_01_1.jpg노 동운동 조직과 사회주의 단체들의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를 위한 공동투쟁, 각국 파업투쟁에 대한 지원,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연대활동은 노동자계급의 국제 단결을 굳건히 하는 움직임을 촉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76년에 해산된 제1인터내셔널을 대신할 새로운 국제 연대조직을 빨리 결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고, 독일 사회민주당과 프랑스 노동당 등에서 이런 요구를 구체적으로 했습니다.

1889년 7월14일 바스티유 탈취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노동자대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20개국 대표자 391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어요. 참가자 대부분은 유럽 국가를 대표했고, 유럽 이외의 국가를 대표한 경우는 미국과 아르헨티나뿐이었죠.

이 조직은 결성 당시에는 정식 명칭이 없었지만 곧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됩니다.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협동조합도 직접 참여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노동자계급 조직이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주도한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제1인터내셔널 내부에 존재했던 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라살레주의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제2인터내셔널 시기(1889∼1914년)는 명실공히 마르크스주의의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 노동운동 그 자체의 황금기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과 실천으로 무장하였고 이제 운동의 목표와 실천을 모두 갖춘 완성된 운동으로 현실에 등장합니다.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초 형성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국제 노동입법과 노동 보전에 관한 결의를 했습니다.

"노동과 인류의 해방은 국제 규모에서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본소유를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절박한 요구 실현을 위한 투쟁방침을 세웠으며 동시에 목표까지 내세웠습니다.

gskim_02_1.jpg대 회는 8시간 노동제의 입법화 요구, 아동노동 금지·연소노동자 및 여성노동 보호 요구, 야간노동과 유해작업에 대한 특별 규제 요구, 주휴제의 의무 제정, 임금에 대체하는 현물지급 금지, 남녀 노동자에 대한 민족 차별 없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한없고 완전히 자유로운 단결과 결사의 권리, 공장감독의 국가제도 수립 요구 등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상비군 폐지와 온 국민의 무장을 결의했죠. 이런 요구들은 그 뒤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활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국제 노동자계급 운동을 위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 회가 결정한 중요한 행동통일의 하나는 1890년부터 5월1일을 '메이데이'(May Day)로 정해 세계 노동자계급이 함께 시위 행동을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용감하고 비극적인 투쟁을 기념하고 8시간 노동일의 제도화와 노동자상태의 개선을 위해 국제 차원에서 공동 행동을 실천하기로 한 결정이었죠. 1890년 5월1일에는 유럽 대부분 나라들의 공업 중심지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제히 가두로 나섰습니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사회주의 정당 전술 문제

제2인터내셔널은 초기에 열린 몇 차례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일상 요구와 노동자투쟁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와 관련한 결의들을 했습니다. 1891년에 열린 브뤼셀 대회는 세계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노력을 결합하고, 노동자가 정치 권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 권리를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893년에 열린 취리히 대회는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동자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결의했습니다. 1896년에 열린 런던 대회는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조했죠.

제 2인터내셔널은 노동자계급의 당면 요구 실현을 위한 투쟁을 강조했는데, 브뤼셀 대회와 런던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효한 투쟁수단의 하나로서 파업의 의의를 지적했습니다. 거기서는 노동조합과 활동형태의 문제, 국제 결합의 강화에 관한 토의도 행해졌죠. 그리고 취리히 대회는 특별결의로서 노동조합의 전국 연합체를 모든 나라에서 결성하고, 산업별 국제노동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습니다.

gskim_03_2.jpg그 러나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이 각국의 개별 노동조합 문제를 다루었던 만큼 충분히 노동조합 문제를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독일 사회민주당의 많은 간부가 노동조합운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더욱 중요하게는 당시 거의 모든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세심한 지도에 따라 운영되는 전국 노동조합과 지방적 전국적 총연합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의 전술문제에 대한 광범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런던 대회는 노동자계급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투쟁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 의회전술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결의했죠. 취리히 대회와 런던 대회는 결의로서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과 독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타협은 용인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별개의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죠.

국제대회가 처음부터 주요 의제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반전투쟁 문제였어요. 여기서 중요하게 제기된 것은 여러 나라의 노동자계급이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문제였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쟁 위험에 대한 투쟁의 성격을 강조한 것은 브뤼셀 대회였습니다. 이 무렵 유럽 열강은 이미 두 개의 진영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전쟁상태로 돌입하지는 않았죠. 대회는 세계노동자들에게 어떤 목적의 전쟁이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협정에 반대하고 이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했어요. 그러나 결의는 반전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런던 대회는 국가 사이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중재기관'의 설치를 요구했습니다.

gskim_04_1.jpg제2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의 역할

20 세기에 들면서 노동자계급의 국제 결합과 공동행동 강화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제2인터내셔널은 다양한 국제조직과 결합시스템으로 발전했습니다. 통상 3년마다 열리는 대회에는 노동자조직의 대표 파견이 확대되고 정비되었죠. 대회가 거듭될수록 참가국의 수도 불어났습니다. 1900년에 열린 파리 대회에는 22개국의 대의원이 참가했고, 1904년에 열린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미국 대의원 3명과 아시아 및 오스트레일리아 대의원을 포함해 25개국 노동자대표가 참가했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적 활동가들은 분명히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를 제외하고는 모든 노동자단체와 사회주의 조직을 결합하려 했어요. 그래서 제2인터내셔널에는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와 같이 극히 온건한 단체까지 참가할 수 있었죠. 그 결과 1904년에 열린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25개국에서 온 대의원이 45개 조직을 대표했어요.

당시 국제노동운동에 참가한 조직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국제 통일을 반대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었죠. 그러나 실제로는 온건주의, 개량주의, 수정주의, 기회주의, 보수주의 경향을 지닌 조직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인터내셔널의 권한 강화에 의의를 제기했고, 사회주의 정당의 통일적 정치방침 작성에 반대했어요.

이런 안팎의 사정을 반영하여 노동조합운동은 제2인터내셔널을 뒤흔든 이데올로기 투쟁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드러낸 주요 조류는 세 가지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경제주의 또는 실리주의 노선입니다. 이 형태는 주로 숙련노동자와 직업별 노조조직을 발판으로 하면서 대체로 자본주의 제도를 암묵적으로 혹은 실제로 인정했어요. 이런 형태의 노동조합운동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했어요.

두 번째는 무정부 생디칼리즘인데, 당시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무정부 생디칼리즘은 정당 형태가 아닌 노동자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치 총파업을 통해 자본주의 제도를 철폐하려고 했어요.

세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입니다. 이 형태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가장 우세한 편이었고 독일,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을 주요 발판으로 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노조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설과 전술 원칙을 대체로 받아들여 중앙집권의 조직체계와 산업별 노조형태를 지향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노조들 가운데 많은 조직들이 투쟁과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숙련노동자층을 중심으로 기회주의 정책을 추구해서 마르크스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제2인터내셔널의 성립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적 노동운동과 결합하였고 이제 이론 영역에서 현실 영역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아직 이념 형태로만 지니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에 실천적 전술을 결합시키면서 완성된 운동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인터내셔널 안에서 유일한 교의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각국의 다양한 사회주의 전통을 수용하는 신축적이고 탄력적인 교의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의 지형 속에서 주요 사항들에 대한 논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 정세에서 국제노동운동이 절실하게 추구했던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의 일반노선을 설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다른 상황과 특수성 때문에 각국 정당과 노동조직의 일치된 행동을 강요하기 어려웠죠.

혁명인가, 개량인가

gskim_05_0.jpg1896 년 런던 대회는 회원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자본주의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는 조직의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과 의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노동조합"으로 결의했어요. 이런 회원 자격에 대한 결의는 명백히 아나키즘의 축출을 의도한 것이었죠.

그러나 아나키즘의 축출로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 지형을 완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900년 파리 대회에서 주요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밀레랑 문제'와 관련하여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어요.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자가 내각에 참여한 처음 사례였고, 혁명 이념과 개량적 실천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죠.

조레스(Jaur s)는 밀레랑의 행동을 두고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표현했어요.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며, 반동 요소를 일정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이에 반해 게드(Guesde)를 비롯한 반대 진영은 밀레랑의 행동이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죠.

프랑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일어난 논쟁은 1900년 파리 대회까지 이어졌습니다. 인터내셔널은 운동의 통일을 위협하는 논쟁의 격렬함에 불안을 느껴 양 진영의 타협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카우츠키가 발의한 결의안은 "개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하는 것은 정치권력 획득의 정상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잠정적이고 예외적인 임시방편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있을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상황이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술상의 문제이지 원칙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대회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카우츠키의 결의안은 대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터내셔널은 밀레랑 문제에 대해 아무런 판결도 내리지 않은 꼴이 되었고 밀레랑의 행동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총파업과 대중파업 논쟁

gskim_06_0.jpg총 파업을 둘러싸고도 논쟁이 확대되었어요. 1900년 파리 대회에서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습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죠. 총파업 문제는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다시 제기됩니다.

대회에 상정된 안은 먼저 총파업과 대중파업을 구분했어요. 총파업은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었어요. 정치적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즉,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중요한 사회 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건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파업도 그것이 "일정한 조직 발전을 통해서,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과 세력 강화"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강조되었습니다. 이 안은 대회에서 결의안으로 채택됩니다. 결의안은 사실상 사회주의 목표와 관련된 전술 수단으로서 총파업을 부인하고 매우 좁은 범위의 개량적 실천으로서 대중파업만을 인정한 것이죠.

1900년과 1904년에 열린 국제대회는 메이데이 투쟁에 대해 중요한 의의를 인정하고 이전에 채택한 메이데이 결의를 재확인했습니다. 1900년 파리 대회는 모든 나라 모든 직업에서 8시간 노동일제 입법화를 요구하고, 최저임금제와 여성노동 특별보호를 위한 법률제정을 요구했죠. 암스테르담 대회는 메이데이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한 투쟁과 민주주의 목표, 특히 평화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걸 것을 권고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대회에서 식민지 문제를 토의하고 군국주의와 전쟁 도발, 독점체가 준비하는 세계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강령을 마련했어요. 1900년 파리 대회에서는 평화·군국주의·상비군의 문제를 토의합니다.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일본·러시아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함으로써 결의가 더한층 돋보였죠.

국제노동운동의 성장

20세기에 들어 제2인터내셔널의 활동은 대회 활동에 머물지 않습니다. 1900년부터는 국제사회주의 뷰로(ISB)가 활동의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그 기능은 경험의 상호교류를 위한 정보활동의 조직, 국제대회 자료의 발간, 노동자조직의 활동보고 발표, 노동운동 발전 상황 출판과 중요 문제에 대한 의견 교환, 개별 노동자당 제안의 일반적 통지 등을 하게 됩니다. 1900년 파리 대회의 결정으로 국제사회주의 뷰로는 상설기관으로서 집행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했어요. 19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집행위원회는 많은 국제문제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개별 국가들의 혁명운동 지지와 반동세력과 식민지주의자의 범죄행위 규탄, 메이데이 시위 조직,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호소를 하지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제2인터내셔널의 공식 주장은 1907년 슈트가르트 대회에서 처음으로 표명되었어요. 인터내셔널은 대회에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결의를 선언하고, 반대를 실천하기 위해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은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합니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런 활동과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수정주의·개량주의 사이에 끊임없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됩니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프랑스 사회주의운동 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직접 반영된 것이죠. 20세기 초의 제2인터내셔널은 전체 국제노동운동의 성장과 강화를 촉진했지만, 노선 투쟁과 분열을 거듭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에 휘말리면서 약체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