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를 위하여

노동사회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를 위하여

admin 0 3,511 2013.05.11 12:32

한국 사회의 변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는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3김’으로 상징되던 낡은 시대가 끝나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새로운 시대는 ‘3김’이 물러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는 이미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낡은 정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어떤 것인가?

새로운 시대는 구조, 주체, 매체의 세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구조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큰 틀을 뜻하는 데, 그것은 흔히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으로 나뉘어 파악된다. 주체는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며 또 그것을 바꾸어가는 존재인 데, 이것은 크게 개인 주체와 집단 주체로 나뉜다. 매체는 많은 주체들이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고안물이며, 사회의 변화에서 단순한 도구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는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요약해 보겠다. 한국 사회는 지난 40년 사이에 역사 이래 최대의 변화를 겪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1970~80년대이다. 20년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시간을 지나며 한국 사회는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 변화는 우선 경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1970년에 채 300달러가 안 되었던 일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에는 1,200달러를 넘어서게 되고 다시 1990년에는 7,000달러에 육박하게 된다. 이른바 ‘고도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양’적인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양’적인 변화가 쌓이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서 20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한국 사회는 ‘가난한 농업사회’에서 ‘부유한 공업사회’로 면모를 일신했던 것이다. 이 변화가 자연과 민중의 착취라는 ‘이중의 착취’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부유한 공업사회’로 변했다는 사실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정부는 물론이고 사회운동도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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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가 빠르고 컸던 만큼 세대 사이의 차이가 갈수록 커졌다. 이 점은 특히 1990년대 초의 이른바 '신세대'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

경 제적인 변화에 따라 문화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적인 변화가 빠르고 컸던 만큼 문화적인 변화도 빠르고 컸다. 벼농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부장적 유교문화가 급속히 해체되거나 변형되는 대신에 기본적으로 생활양식의 서구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문화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의식주의 모든 면에서 빠른 변화가 이루어졌고, 대중문화와 여가생활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다. 변화가 빠르고 컸던 만큼 세대 사이의 차이가 갈수록 커졌다. 이 점은 특히 1990년대 초의 이른바 ‘신세대’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신세대’는 전쟁과 보릿고개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부모세대에 맞서서 ‘풍요를 즐기자’고 외쳤다. ‘부’를 향해 치달렸던 한국 사회의 성과가 ‘신세대’라는 열매로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점에서 ‘신세대’에 대한 기성 세대의 우려와 불신은 상당 부분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신세대’는 기성 세대가 피와 땀을 흘려 이룬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성 세대는 ‘신세대’를 나무라기에 앞서서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낡은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했다.

구 조적 변화에서 가장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변화이다. 정치는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강제력을 동원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집합적 활동이므로 다른 차원의 변화보다 더디게 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다른 사정이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식민지의 경험, 한국전쟁의 비극, 그리고 오랜 군사독재를 통한 ‘근대화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주권이 크게 억압되어 사실상 근대 정치의 형성 자체가 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 지체 현상’이 한국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막아왔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와 낡은 정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는 오랜 사회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면서 이러한 사회 변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박정희 시대’를 넘어

노 무현 정부가 해결해야 할 사회 분야의 개별적인 과제들은 대단히 많을 것이다. 환경, 문화, 정보, 교육, 주택, 치안, 노동, 평화, 복지, 여성, 노인, 장애인, 소수자, 청소년 등으로 과제의 종류는 끝없이 나열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는 낡은 시대를 해소하는 과제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낡은 시대를 해소하는 과제에 대해 살펴보자.

낡은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밑거름이 된 시대이지만, 새로운 시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 시대는 이를테면 ‘박정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박정희라는 철권 통치자가 중심이 되어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간 시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태생적으로 결여된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성장으로 메우려 했다. 그의 시대는 ‘성장제일주의’의 시대가 되었으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연과 노동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세계 제일의 노동 사회이자 배금주의 사회가 되었다. 무자비한 착취는 강력한 국가 권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0년대의 유신독재는 사실상 총통제 사회였다. 그러나 통치는 강제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의 시대는 반공주의와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국가 가부장제’의 시대였다. 국가는 가부장으로서 가족인 국민들을 ‘보호’하며, 이를 위해 가족인 국민들에 대해 낱낱이 알아야 한다는 ‘보호 이데올로기’가 작동되었다. 그것은 국민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나아가 진정한 주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대신에 박정희는 국민을 생각할 줄 아는 노동기계로, 더 많은 돈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돈의 노예로 만들려고 했다.

박정희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러나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참한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는 ‘고도성장의 변증법’을 무시하고 시대 변화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극렬한 반공주의도 여전히 일부에서 살아 있으며, 성장제일주의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보호 이데올로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노동 사회와 배금주의 사회의 문제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구실하고 있다. 새 정부가 진정한 참여와 개혁의 정부가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이러한 ‘박정희의 성과’를 없애거나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 세 가지를 꼽고 싶다. 먼저 하나는 부동산 투기이다.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의 막개발을 시작했고, 이와 함께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동산 투기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 사회는 세계 최악의 지대사회이다. 이로 말미암아 막개발의 문제는 계속 확대재생산되고 있고, 또한 계층간의 불평등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학벌주의 문제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학력경쟁 국가이다. 한때 학력경쟁은 사회적 이동의 통로이자 변화의 동력이었으나, 이제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계급의 신분화’를 가져오는 길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는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국토개발계획을 밀고 나갔으며, 그 결과 극도의 지역불균등발전과 지역주의라는 정치적 장애물을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발전’을 말할 수 없으며, 서울을 분산하지 않고 이 문제의 해결을 꾀할 수 없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낡 은 시대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는 더욱 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미 10년 전부터 ‘신세대’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던 새로운 시대는 ‘정치 지체 현상’의 해소와 함께 더욱 더 분명하게 사회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상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함께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생태사회’와 ‘문화사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바람직한 사회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낡은 시대가 무엇보다 ‘삶의 양’을 추구한 사회였다면, 새로운 시대는 이와 달리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삶의 양’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해서 그 가치를 계산한다면, 따라서 노동과 자연의 착취마저도 비용과 이윤의 관점에서 합리화한다면, ‘삶의 질’은 이런 식의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삶의 질’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삶의 양’에 촛점을 맞추고 만들어진 사회와는 아주 다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삶의 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며, 나아가 ‘삶의 질’은 그저 그럴듯한 수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삶 의 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경제적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적 만족에는 상한선이 없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만 따지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이미 경제적 능력이 아니다. ‘삶의 질’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부’를 공평하게 나누는 능력,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능력이다. 새로운 시대는 무엇보다 이런 능력을 요청한다. 여기서 첫번째 것은 복지사회와 관련되는 것으로 그다지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두번째 것은 1990년대를 지나며 본격화된 새로운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능력은 이제 ‘생태사회’라는 개념으로 집약되고 있다. 낡은 시대는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를 발전의 상징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 권장되었다. 이 무식하고 무도한 시대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과제를 이루어야 한다. 첫째, 전국 곳곳에서 지역환경과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난개발의 광풍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부동산 투기를 막는 과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둘 째, 성장제일주의의 견인차인 핵발전 정책을 끝내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은 무한한 순환 에너지 자원인 태양광을 이용하는 ‘태양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무서운 핵발전을 끝내고 ‘태양의 시대’로 성큼 나아가야 한다.
세 째,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하고 갯벌매립 정책을 끝내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은 없앤 갯벌도 다시 살려내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여전히 낡은 시대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살아있는 갯벌에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시대이다. 갯벌매립과 같은 무서운 자연파괴는 이제 확실히 그만두어야 한다. 

생태사회는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을 요청한다. 돈만 많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회, 따라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가혹한 노동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회는 사람과 자연을 죽이는 사회이다. 돈이 적더라도, 아니 돈이 없더라도 사람이 사람과, 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새 정부는 단순히 민주화를 진척시키는 정부여서는 안 된다. 이미 1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성큼 나아가는 정부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새 정부는 시대의 변화를 잘 읽고 생태사회의 요청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