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 운동이 산별노조 건설의 원칙을 세우고 실천해 온 10여 년 동안 산별노조는 이제 시대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IMF 이후 경제위기를 빌미로 계속된 정권과 자본의 공세는 경제위기 이전 기업별노조에서 어느 정도 가능했던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 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되는 등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55.7%(2001년 8월 현재)에 달하는 조건에서 노동자 내부의 격차는 노동자의 단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정규직 중심 노조운동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은 조직형식의 변화가 아닌 노조운동이 처한 도전과 시련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중요하며, 금속노조나 보건의료노조 등에 비하면 늦었지만 공공연맹은 '산별노조건설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망을 구체화하고 있다.
[ 세종문화회관노조에 이어 전북지역국악원, 청주시립예술단노조가 작년에 결성되었고, 올 들어 인천시립예술단, 서울예술단, 국립발레단노조가 줄줄이 결성되었다. ▷ 출처: 공공연맹 ]
업종별 노조 조직화 현황
공공연맹에서 산별노조를 어떻게 건설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직도 이렇다할 정답을 내린바 없다. 다만 공공 대산별 노조로 한꺼번에 가는 움직임보다는 소산별 노조 건설 움직임이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994년 전국과학기술노조가 최초로 소산별 노조를 건설하였다. 당시 전국과학기술노조는 1991년 이후 불어닥친 노동조합 탄압에 대한 정부출연기관노조들의 공동대응 투쟁과정에서 '기업별노조를 뛰어넘는 노조'에 대한 고민을 현실화시킨 것이었다. 전국과학기술노조 이후 전국연구전문노조(1997년), 전국자동차운전학원노조(2001년), 전국건설엔지니어링노조(2001년)가 계속해서 소산별 업종노조의 깃발을 꽂았다. 지역과 업종을 동시에 기반으로 한 서울상용직노조(1999년), 경기도노조(1999년), 한국전력 자회사끼리의 연대와 업종에 기반한 한국발전산업노조 등 다양한 형태의 초기업단위 소산별 노조가 공공연맹 내에 존재하고 있다. 현재 공공연맹에는 20개의 초기업단위 노조가 있고 조합원은 1만8천 명이다. 공공연맹은 8개 업종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단위노조간 연대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올 들어 공연예술, 사회복지, 공공시설환경 분야의 노조들이 소산별 노조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공연예술노조 건설을 향해
1999년 '예술가'의 삶에서 한 발짝 나아가 '노동자'로서 자각과 단결을 실천했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예술인 중 최초로 노조를 결성했다. 세종문화회관노조는 공연예술계의 오랜 관행이자 폐단으로 굳어져온 '오디션제도'의 폐지와 공공성이 강화된 올바른 공연문화의 창달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전북지역국악원, 청주시립예술단노조가 작년에 결성되었고, 올 들어 인천시립예술단, 서울예술단, 국립발레단노조가 줄줄이 결성되었다.
공연예술노조는 문화관광부나 지방자치단체 관할 예술단에서 관현악, 국악, 연기, 무용 등을 하는 예술가와 무대, 조명, 음향 등 을 담당하는 지원부서, 공연예술 정책과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소속된 노동자로 구성된다. 9개 노조가 만들어졌고 조합원은 700여명이며 앞으로 공연예술노조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순수예술 중심의 공연예술노동자들이 노조 결성과 기업별노조를 넘어 소산별 노조를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오디션제도의 문제다. 수백,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입단을 해도 공연예술계는 해마다 오디션을 치러 그 중에서 일부를 해고한다. 전북지역국악원노조는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파업과정에서 거부한 오디션을 빌미로 전체 단원 118명을 해고되기도 했다. 2001년 말 오디션 결과 해고된 청주시립예술단과 인천시립예술단의 예에서 보면, 몇 년을 수석단원 혹은 차석단원으로 활동해 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실력 부족으로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로 학맥, 인맥으로 얽힌 공연예술계에서 단체장이나 예술감독과 갈등을 유발할 경우 곧바로 해고시킬 수 있는 제도로 악용되어 온 것이다. 결국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로 판결나 복직을 했지만 해고 과정의 엄청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디션제도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고, 이로 인해 매년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정 고용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공연예술노동자의 현실이다.
둘째, 공연예술인들은 신분상 지위가 문화관광부 관계 법령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의해 공무원이 아닌 예술단원으로 규정되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여있다.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개인 레슨이나 과외 활동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리기조차 힘든 저임금 구조다.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 야간·휴일근로와 연습이나 공연과정에서 빈발하는 산업재해도 제대로 보상처리 되지 않는 등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노동권리를 확보하지 못해 왔다.
셋째, 단체장이나 예술감독의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운영으로 예술단체가 공공의 기능보다는 사조직화 되어왔다. 따라서 공공성이 강화된 예술활동의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공연예술인노조의 단일화가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공연예술 노동자들에게도 이윤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이 민영화되고, 국립발레단이 민영화되었다. 전북국악원노조가 결성된 동기 가운데 하나는 예술단의 민간위탁 반대였다. 민영화의 논리로 공연예술을 규정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문화 예술은 망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공연예술노동자들은 매월 대표자회의 개최, 간부 수련회 등을 통해 단결과 연대의 폭을 넓혀오고 있다. 지난 8월2일 전국에서 모인 50여명의 간부들은 (가칭) 전국공연예술노조 건설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연내 소산별 노조 결성 제안에 따라 추진위원회구성과 건설일정 등을 차기 회의에서 논의키로 했다.
[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공연예술 노동자들에게도 이윤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사진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집회모습 ▷ 출처:공공연맹 ]
소산별노조는 대산별노조로 가는 징검다리
공공연맹은 구성 업종이 다양하고, 단위노조의 규모도 조합원 5명에서 3만6천 명에 이르기까지 그 편차가 크다. 산별노조 전환 방침과 계획 전체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2002년 2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작년부터 시작된 산별특위 활동을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공공연맹 산별특위는 2∼3단계를 거치는 공공 대산별노조 건설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업종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가 병존하는 과정을 거쳐 유사연맹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사실상 공공부문을 아우르는 산별노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단계를 밟기보다 한꺼번에 산별노조로 전환하자는 의견도 있다. 공공연맹은 산별특위 활동을 토대로 각급 단위의 토론과 의견을 수렴해 대의원대회에서 산별노조 전환 방침을 확정할 예정이다.
공공연맹 산별특위는 2002년 8월 산별노조학교를 개설해 공감대를 넓히고, 10월에는 해외연수를 추진해 다른 나라의 산별노조 활동사례를 배울 계획이다. 그리고 공연예술, 사회복지, 공공시설환경 분야 노조들의 소산별 노조 건설을 지원하고 있다. 나아가 운수, 환경에너지 분야의 소산별 노조 건설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국과학기술노조 이후 공공연맹의 업종 소산별노조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고, 산별노조의 필요성과 힘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 분쇄·민영화 저지투쟁,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에 소산별 노조가 앞장서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산별노조의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소산별 노조가 인력과 재정을 집중하여 중앙지도력을 강화한 만큼 산별 교섭과 투쟁도 책임지고 있다. 그렇지만 산별 교섭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기획예산처가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지침과 예산유보방침을 내린 데 반발해 전국과학기술노조와 전국연구전문노조가 2년에 걸쳐 연대투쟁을 전개했고, 어느 정도 기획예산처와 협의틀을 만들었지만 산별 교섭과는 거리가 멀다. 산별 교섭 틀을 만들고, 교섭이 가능할 때 산별로 힘이 모아질 것이다.
지난 몇 년의 소산별 노조 활동을 놓고 볼 때 현장과 중앙 지도부 사이의 결합력 약화, 즉 현장 공동화도 극복해야할 과제다. 기업별 노조의 관행과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부 운영을 산별에 맞게 변화시키고, 현장 집행력을 살리는 작업이 절실하다. 따라서 중앙 지도력의 강화와 현장의 동력을 살려내는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소산별노조가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 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예비노동자 등을 조합원 범위에 두고 있다. 현재 소산별노조는 기존 기업별노조의 재편 과정으로 치우치면서 미조직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적극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소산별노조에서도 현실은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사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책대안과 조직화, 투쟁계획을 내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끝으로 소산별노조 건설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업종 소산별노조는 공공 대산별노조로 가는데 하나의 징검다리다. 연대와 투쟁의 과정에서 소산별노조가 자신의 틀을 깨고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할 때 공공연맹 소산별노조는 의미 있는 활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