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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9월15일~20일 브라질 노동자당(PT) 대통령선거 캠페인 민주노동당 참관단의 일원으로 브라질을 방문했다. 연수단이 머문 인구 1050만의 브라질 최대도시 상파울로는 대통령을 비롯해 주지사, 상원의원, 하원의원, 지자체의원을 뽑는 10월6일 선거를 앞두고 정치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연수단은 9월16일 브라질 최대 노총인 CUT를 방문해 브라질 노동운동 세미나를 가졌는데(강사 CUT 국제국장 Kjeld Jakobsen), 이 글은 이 세미나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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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제도와 노조의 정치활동
정치적으로 브라질은 연방정부와 27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6일 대통령, 상원, 하원, 주지사, 지자체의원 선거가 한꺼번에 있다. 대통령선거의 경우 50% 이상 득표자가 없을 경우 10월27일 결선투표를 하게 된다. 전자투표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에 개표는 신속하게 이뤄진다. 브라질 인구는 1억7천만 명으로 16세 이상이면 투표권을 가지며, 10월 선거에서 유권자수는 1억1천5백만에 이른다. 투표는 의무·강제 투표제이며,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1~2 달러 정도의 벌금을 문다. 대신 직업군인은 투표권이 없다. 선거 과정에서 신발, 옷 등으로 표를 매수하기도 하며, 심지어 1989년에는 룰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선거를 막기 위해 대중버스가 운행을 중단한 적도 있다.
한편 사용자단체는 지지정당을 선언하고 자금도 지원할 수 있는 반면,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불법이다. 노조는 자금지원은 물론 지지선언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노조는 사실상 불법으로 정치활동을 하며, 대신 ‘불법’ 활동으로 후보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주의한다. CUT는 PT에 정치자금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지만, 물론 그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노조원으로서가 아니라 당원으로서, 또는 정당 지지자로서 후원하기 때문에 사실상 법적으로도 문제될 것은 없다. CUT를 비롯한 브라질 노조운동은 노조 정치활동 금지 규정이 사라질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사용자만 허용하고 노동조합은 금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과 노조의 관계
브라질 정치 구도는 PT 지지층 30%, PT 반대층 30%, 중간층 40%로 나눠져 있다. 따라서 정치적 중간층을 설득하고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게 선거 승리의 관건이다. 한데 CUT 지도부와 소속 노조원은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노조 조직이 정당과 정치로부터의 정치적 자율성을 조합원들에게 보장해준다는 이야기다. 현재 간부·활동가층의 15%는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브라질공산당(PCdoB)이 이번 대선에서 PT와 선거연합을 형성한 배경이 되고 있는 듯 했다(연수단이 공산당을 방문했을 때 CUT 간부인 당원이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후보가 6명인데 그 가운데 극좌파로 분류되는 1명은 CUT 임원 출신이다. 전체적으로 CUT 간부·활동가의 90%는 좌파로 분류된다. CUT보다 규모가 적은 FS(노동자의 힘)라는 노총이 있는데, 이번 대선에서 인민사회당(PPS)의 대선 후보로 나온 시로 고메스가 부위원장으로 있으며, CUT 가맹조직 중 은행노조나 전력노조는 고메스를 지지하는 흐름이 크다.
이번 선거에서 CUT는 처음으로 룰라 지지를 결정했다. 이것은 CUT가 전에는 선거에서 PT는 물론 룰라를 공식 지지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CUT의 룰라 지지 선언은 4백 명이 참가한 가운데 2001년 11월 열린, 우리로 치자면 중앙위원회에서 이뤄졌다.
CUT가 각종 선거에서 PT를 공식 지지한 적이 없으며, 룰라를 지지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야기는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CUT는 정당보다는 후보 중심의 선거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원칙상의 이유와 더불어 PT가 의회와 지방정부 차원에서 전국정당이 된 게 그리 오래지 않다는 현실적인 배경도 작용한 듯 하다. 이러한 신중한 정치 방침으로 CUT는 1983년 출범이래 한번도 분열하지 않았으며, 이런 경우는 남미에서 CUT가 유일하다.
노동조합 조직과 구조
역사적으로 브라질의 노동체제는 1930년 노동법에 기반하고 있다. 1930년 노동법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노동법을 그 모델로 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 코포라티즘(state corporatism)이라 할 수 있다. ‘1930년 체제’는 1988년 헌법이 개정될 때까지 이어지며, 지금도 브라질 노동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주요 특징으로는 ‘지역별 1산업 1노조’ 체제를 들 수 있다. 우리로 치면 경기도화학산업노조, 서울시금속산업노조, 대구시은행노조 식으로 노조가 조직되어 있다. 이렇듯 지역에 기반한 산업(혹은 업종별, 영어로는 department)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구성되어 있으며, 산업·지역·기업 단위의 복수노조는 금지되고 있다. 그리고 상급단체(umbrella organization)도 산업별(혹은 업종별)로만 법으로 인정받는다. 예컨대 브라질화학노조연맹, 브라질금속노조연맹, 브라질은행노조연맹은 합법적인 상급단체인데, 산업·지역을 전국적으로 아우르는 노총은 노동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CUT나 FS는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임의단체인 셈이다. 하지만 노사정 3자 테이블이나 국제노동기구(ILO) 총회 등에서 CUT는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전국중앙단체의 자격으로 활동하는 등 노총으로서의 활동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
1988년 노동법 개혁으로 공무원노조가 합법화되는 등 자유화 조치가 있었으나, 아직 노조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8천 개의 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들 노조는 지역별 산업(혹은 업종) 노조이다.
지금 지역과 산업에 기반한 독점 노조체제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쟁이 CUT를 비롯한 노동운동 내부에서 이뤄지고 있다. 물론 CUT 내부에도 노조의 분열과 난립을 방지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지역에 기반한 산업별 독점노조체제를 선호하는 흐름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노동조합의 기본 권리인 ‘결사의 자유’를 해칠 가능성이 있고, 또 노동자의 통일과 단결이 법으로 강요되는 것은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노동권
198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주44 노동시간, 출산 휴가(유급 120일), 직업훈련, 연장근로의 경우 첫 2시간 25% 임금할증, 그 이상은 50% 임금할증, 휴가는 1년 30일(연차유급, 이중 10일은 안 쓰면 현금으로), 육아휴직 연 2~3일 보장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
1930년 노동법에서는 5년 이상 고용되면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었는데 다국적기업의 압력으로 해고수당제도가 제정되어 1964년부터는 월마다 임금의 8% 정도를 해고수당으로 적립하면 사용자가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의 자의적 해고권이 폭넓게 행사되어 왔다는 이야기다. 브라질 북동부의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핀란드의 대표적 다국적기업인 노키아 현지공장 노동자의 임금이 시간당 1달러(1천2백 원)다. 하루 10시간 일해봤자 1만2천 원이 조금 넘는다. 이런 이유로 사용자의 해고수당 적립금 부담이 크지 않아 해고가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직률이 40%에 달한다. 브라질 전체 노동자가 3년마다 새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동법원 제도가 있지만, 서비스는 엉망이고 법관의 자질은 형편없다. 노동법원의 재판관은 자격시험을 거치지 않는다. 판결은 보통 5~6년이 걸려 판결이 나기도 전에 노동자가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며, 반노동자적인 판결로 인해 제대로 보호받기 어렵다. 또한 법적 조항이 애매한 관계로 필수공익사업의 범위를 노동법원이 판단하는 경우가 많아 노동조합이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도전과 대응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정부는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87호를 인준하지 않고 있다. 이런 관계로 노조 조직을 작업장 안으로 확대하려는 사업이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점에서 CUT는 브라질 정부에 ILO 협약 87호 비준을 촉구하고 있으며, 아직 남아있는 국가의 노사관계 개입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의 미주자유무역협정(FTAA)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브라질 노동운동의 고민거리다.
그리고 생산성은 향상되지만 임금은 계속 하락해왔다. 고용도 늘어나지만, 고용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CUT는 브라질 경제를 장악한 다국적기업에서 노동조합의 현장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동시에 비공식 부문(informal sector)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비공식 부문은 비정규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비정규직이 노동자 내부의 문제라면, 비공식 부문은 농민, 빈민, 자영업자 등을 포괄한 것으로 한층 복잡한 문제다. 브라질 노동인구에서 비공식 부문 종사자가 차지하는 규모는 절반에 육박한다.
상파울로 시를 대상으로 한 199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 구성원 중 최소 1명, 대학 졸업자의 23%가 비공식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며, 노동인구에서 비공식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 36%에서 1999년 49%로 증가했다. 비공식 부문에는 백인보다는 유색인종, 남성보다는 여성, 그리고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이 속해 있음을 조사 결과는 보여준다. 그리고 공식부문의 평균임금은 3백 달러인데 비해 비공식 부문은 220 달러였다. 나이 기준으로 10~17살 70%, 18~24살 55%, 25~40살 50%미만이 비공식 부문 노동자였다.
총파업의 진원지에 자리잡은 CUT
CUT 본부는 영세한 공장들이 즐비한 상파울로 외곽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1917년 임금인상과 노동권 보장을 요구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이 지역에서 일어났고,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시위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여기에 항의해 상파울로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해 열흘 가까이 상파울로를 마비시켰다. 몇해 전 CUT 본부에 누군가 침입해 컴퓨터를 깡그리 훔쳐 간 일이 있었는데, 야콥슨 국제국장은 좀도둑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CUT 본부에 들어가니 로비에 건장한 이들이 출입자를 체크하고 있었다.
이번에 룰라가 당선되면 CUT에서 많은 이들이 정부로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야콥슨 국장은 이미 갈 사람은 많이 PT로 갔기 때문에 임원급에서는 많아야 두 세 명일거라고 답해주었다.
상파울로 중심지에 있는 CUT 고용센터에서는 매일 3백 명에게 일자리를 잡아주고 있었다. 고용센터는 연수단 숙소 근처에 있었는데, 새벽에 나가보면 수백 명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민주노동당처럼 PT도 노동위원회가 있고, 위원장은 브라질 최대 노조인 CUT 산하 금속노조위원장 귀바가 맡고 있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현직의 산별위원장이 당 노동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1980년의 PT 탄생에는 노동운동이 큰 힘이 되었고, 1983년의 CUT 탄생에는 PT가 큰 힘이 되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 CUT는 브라질은 물론 남미 최대의 민주노조운동으로 성장했고, PT는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주도하는 브라질의 정치 실험이 어디로 갈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