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추진 기업연금제 무엇이 문제인가?

노동사회

정부 추진 기업연금제 무엇이 문제인가?

admin 0 3,462 2013.05.08 10:25

정부는 지난 10월11일 경제정책조정회의를 통해 기업연금제 도입 방침을 밝혔다. 이날 윤곽이 드러난 정부시안에 따르면 △ 사업장별로 기업연금을 도입하여 서서히 퇴직금제도를 대체하고, △ 기업연금 형태는 확정급부형과 확정갹출형(확정기여형) 중 노사에게 선택권을 부여하고, △ 회사 이전 시 연금 이전이 가능하도록 개인퇴직계정제도를 도입하고, △ 기업연금 기여금에 대한 세제혜택으로 제도 확대를 유도하는 것 등이 그 골자이다. 정부는 10월 중 노사정위원회 논의, 11월 중 정부안 확정, 내년 2월 국회제출 등의 일정으로 이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노동자 노후비용으로 주식시장 활성화

기업연금제는 노동자들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적립금(현행 퇴직적립금)을 퇴직금처럼 회사에 모아두지 않고, 주식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투자신탁회사 등에 그 기금을 운용하도록 해서 노동자 퇴직 때에 적립된 금액을 연금으로 지급하는 제도이다. 기업연금제의 형태는 크게 확정급부형(DB형, Defined Benefit Plan)과 확정갹출형(DC형, Defined Contribution Plan) 두 개로 나뉜다. 확정급부형은 노동자가 퇴직 뒤 받을 연금액(급부)을 미리 정해놓는 것으로 회사가 기금의 운용 책임을 지는 제도이고, 확정갹출형은 월급의 일정 비율을 갹출(기여)금으로 정하고 기금의 운용 수익 결과에 따라 연금액이 달라지는 제도로 개인이 기금 운용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는 확정갹출형이 확정급부형에 비해 주식시장의 상황에 더 많이 좌우되는 만큼 위험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현행 퇴직금 제도가 안정적인 노후소득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고 자본측 비용 부담이 가중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 장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제도를 도입한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로는 불안정한 주식시장에 노동자 퇴직적립금을 투자해 주식시장을 안정화시키려는 것이 주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기업연금제 도입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바로 노동자들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적립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그간 정부는 주식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기업연금제 도입을 언급해왔다. 그래서 지난 10월11일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도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서둘러 도입 방침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연금액수는 주식시장의 상황과 성과에 따라 좌지우지될 것이다. 특히 벤처열풍의 거품이 걷히고 세계 경제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면서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주식시장 상태를 고려할 때 주식투자를 전제로 하는 기업연금제는 매우 불안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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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론의 파산으로 종업원이 보유한 증권증서와 기업연금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을 풍자한 만화 ] 

jooju_02.gif기금운용 위험성은 노동자의 몫

기업연금제의 형태에 대하여 정부는 확정급부형과 확정갹출형 가운데 노사가 선택하여 도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연금제가 도입된다면 확정갹출형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확정갹출형이 기금운용의 위험성이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 개인의 부담으로 된다는 점,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갹출금의 수준이 현재의 퇴직금보다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기업들이 이를 절대적으로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국제적으로도 확정갹출형이 최근에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며 이를 간접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처럼 확정갹출형이 대세를 이룰 경우 기금운용의 부담과 위험성이 모두 노동자 개인에게 떠맡겨지게 되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확정갹출형 연금제도의 일종인 401(k)를 도입하고 있던 엔론 등이 회계조작과 주가거품 붕괴를 맞아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연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면서 안정적인 노후소득보장이라는 기업연금제의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기업연금이 설사 일정하게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제도가 전체 노동자에게 혜택이 되는 제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안에 따르면 기업이 임의적으로 이를 도입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불능력이 충분한 기업들을 중심으로 도입될 것이고, 지불능력이 불충분 영세소기업은 제도 도입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정부안은 5인 이상 사업장으로만 대상 기업을 한정하고 있다.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 조장

기업연금제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의 경우에도 기업연금 가입률은 노동자수 대비 50% 수준이다. 기업연금제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의 대부분은 소기업, 저임금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대부분 취약한 노동자들이다. 실제로 1998년 현재 미국 기업연금의 가입자수의 비중을 속성별로 살펴보면 연소득 5만 달러 이상의 고임금 노동자의 74.6%가 기업연금제에 가입되어 있으나 임금수준이 낮아질수록 가입률이 떨어져 연소득 5천 달러 이하의 노동자는 12.6%만이 기업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 기업규모별로도 100명 이상 사업장은 가입률이 54.2%인데 비해 25명 미만 사업장은 18.3%에 그치고 있다. 노동시간별로도 연 2천 시간 이상 노동자의 55.6%가 기업연금제에 가입되어 있는 것에 반해 1천 시간 미만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11.8%만이 가입되어 있다. 결국 기업연금은 전체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제도로서보다는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의 정규노동자의 추가 재산 형성을 위한 제도로만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노동자 없는 기업연금제

기업연금은 또한 기업비용 줄여주기에 그 목적이 있다. 현행 퇴직금은 1년에 한 달치 평균임금을 적립하여 기업이 월급의 8.3%(1/12)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월 적립하여 이를 퇴직시에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연금의 도입 과정에서 이러한 적립금의 수준은 현재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부안에 따르면 확정급부형의 경우 일단 현재 퇴직금 수준을 유지한다고 되어있지만, 재정경제부는 확정갹출형의 경우 기업이 낼 적립금은 현행 퇴직금의 8.3%보다 크게 낮은 6% 내외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상태이다. 확정갹출형이 대세를 이룬다고 보면 기업의 퇴직금 적립 부담은 지금보다 20% 이상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정부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추진도 문제다. 정부는 퇴직금을 대체하여 기업연금을 도입하겠다는 엄청난 정책도입을 시도하면서 공론화의 과정도 없이 경제정책조정회의를 통해 기습적으로 정부 방침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 도입이라는 '초고속' 추진 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하고 일방적인 추진은 제도의 직접적인 주체일 수 있는 노동자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최근 완전히 개악된 주5일근무법안과 노동기본권을 완전 부정하는 경제특구법안의 국무회의 통과와 국회 제출 등과 함께 임기말 선거를 의식한 친기업적 정책의 무리하고 일방적인 추진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퇴직보험제 강화가 바람직

결국 정부가 도입하려고 하는 기업연금제는 노동자 퇴직적립금을 불안정한 주식시장에 쏟아 부어 노후연금을 불안정하게 하고, 도입과정에서 영세사업장, 비정규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기업비용의 감소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과는 거리가 멀다.

퇴직금의 수급권 보장이 문제라면 기업연금제 도입이 아니라 현행의 퇴직보험제를 강화하여 퇴직금의 안정적 수급을 보장해야 한다. 정부는 이미 1997년 퇴직금의 지급보장성을 높이기 위해 퇴직보험제도를 도입했으나 정부가 이 제도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 퇴직적립금의 극히 일부만 퇴직보험에 적립되어 있는 상태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주식시장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연금제 도입을 중단하고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퇴직보험의 강화와 영세기업 노동자 퇴직금 보장에 나서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