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노조, 독일의 베르디

노동사회

세계 최대 노조, 독일의 베르디

admin 0 6,830 2013.05.0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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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를린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001년 10월부터 진행된 몇 차례의 세미나 내용을 기초로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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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통합은 규모의 경제효과는 물론 중복된 조합활동을 특화시켜 조직간의 상승작용을 가져올 것이다. ]

1. 들어가며

통합서비스노조(Ver.di)의 건설은 독일 노동조합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2001년 3월19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창립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독일노총(DGB) 최대규모, 단일조직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새 노동조합(조합원 310만 명)이 탄생했다. 특히 독일노총 산하 4개 노조와 독일노총에 소속되지 않았던 독일사무직노조(DAG)가 통합을 결정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단일서비스노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뮐러에 의하면 베르디의 건설은 조직 정책의 측면에서 독일노동조합 역사상 세 번째로 중요한 결정이다. 

지난 19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독일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조합운동을 발전시켰고, 두 가지 중요한  조직·정책상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첫째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모습이 갖추어진 노동조합 조직의 산업별 구성 원칙에 있다. 그전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조합도 직업별 혹은 업종별, 아니면 지역일반노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합된 조직 구성은 1차 대전을 전후로 노동조합운동의 분화와 정치운동으로의 발전과정을 거쳐 정파별 산업노조(Richtungsgewerkschaft)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 지향적 산업별 노동조합은 2차 대전 후 산업별 단일노조(Einheitsgewerkschaft)로 재편된다. 이러한 조직개편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내부 분열이 독일 사회의 나치즘을 막지 못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독일 노동조합의 이러한 두 번째 조직·정책상의 결정은 독일노총이 1959년 고데스베르크에서 정당 중립적인 단일노조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재확인되었다. 이 결정으로 독일 노동조합은 지난 1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사민당과의 동반관계를 외형상 해소하게 된다. 

다양한 서비스 업종을 포괄하는 베르디의 건설은 기존의 산업별 조직구성을 넘어선, 초(超)산업의 단일노동조합이 독일노동조합 역사에 출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에 포함되는 업종 구성이 제조업부문이 아닌 서비스부문에 한정되어 있지만, 기존의 5개 노조가 자신의 조직 틀을 스스로 해체하고 동등한 자격으로 새 노동조합을 구성했다는 측면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흔히 독일 노동조합의 조직체계를 산업별 구성원칙(Industrieprinzip)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1)

하지만 독일의 경우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의 산업 혹은 업종에 하나의 노조라는 '산업별 원칙'이 어느 정도 변형되어왔다. 정도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노동조합의 재조직화 방향은 세분화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업종들이 서로 묶이고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즉 다(多)업종 혹은 다산업노동조합이라는 경향은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독일노동조합의 재조직화 과정이 만들어낸 실제 결과물이다. 

2. 독일노동조합의 조직 재편과 그 동인

2차 대전 이후 지난 수십 년간 독일노동조합의 조직구조는 대체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한 기업에는 한 산업노조가 대표성을 지니고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정치적인 지향이나 종교적 차이에 따라 구별하지 않는 산업별 단일노조라는 기본 조직화 원칙은 다양한 형태의 구조·환경·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이는 통독 과정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전의 동독지역에 해당하는 신연방주에서 노동조합의 재건 과정은 조직구조상에 별다른 중대한 변화 없이 구 서독지역에 적용되어온 단체교섭제도와 노조조직체계가 어느 정도 변형된 형태로 그대로 적용되었다. 독일노동조합의 조직 안정성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듯이, 1980년대 후반까지 잘 지켜졌다. 이러한 독일산별노조의 조직 안정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기 다른 차원에서 소위 '노조간 합병과 인수'2)를 경험한 서구국가 노조들과의 명확한 차이로 자주 지적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들어 노동조합의 조직·정책에서의 대안 모색은 독일 노동자들에게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내부과제가 되었다. 

노조끼리의 '인수합병' 

1990년대 중반까지 독일노동조합의 조직재편과정3)은 노사간의 세력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구조환경적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적응압력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노조간 연합과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 1978년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경찰노조(GdP)가 독일노총에 가입하게 된다. 그 계기는 독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가 소속 경찰조합원들을 경찰노조로 이적하도록 스스로 추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편 인쇄·종이노조(IG Druck und Papier)는 1989년 초에 독일 기자연합, 작가동맹, 그 외 다섯 개의 작은 직업동맹으로 구성된 예술노조와 함께 새로운 언론매체, 인쇄, 보도출판 및 예술노조(IG Medien)를 조직했다. 하나의 보다 큰 노조조직으로 통합하고 더 큰 노동자연합을 위해서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이러한 조직적 결정은 독일노동조합에 유례 없는 일이었다. 새 언론매체노조의 건설은 당시 이미 정보매체와 언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언론매체 부문에서 매체 콘체른과 같은 기업 집중화 현상이 뚜렷하게 진전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조직의 집중화와 통합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였다. 

한편 1993년 이후 독일노총 산하의 소규모 산업노조들, 즉 상업은행보험노조(Gewerkschaft Handel-Bank-Versicherung), 숙박노조, 섬유피복노조(Gewerkschaft Textil-Bekleidung), 나무인공원료노조(Gewerkschaft Holz-Kunststoffe)와 언론매체노조(IG medien)를 중심으로 대규모노조에 의한 소규모노조의 '인수와 합병'이 아닌 대등한 조직통합의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통합논의의 중심에는 거대노조에 의한 소규모노조의 인수에 대한 경계심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이들 소규모노조들은 1949년 독일노총의 재건과정에서 한스 뵈컬러가 제안했던 초산업적인 '일반노조(Allgemeine Gewerkschaft)'를 독일노총 조직재편의 장기적인 목표로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의 반대로 무산된다. 특히 금속노조는 독일노총내 거대노조 세 개(즉 금속, 화학 그리고 공공운수노조)와 그 외 소규모 노조들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직재편안으로 기존의 14개 산업노조를 제조업부문의 세 개 노조로 크게 묶고, 서비스를 사적 부문과 공공부문으로 나누어 노조로 조직하는 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독일노총의 조직재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산하 노조들간의 논쟁은 이후 가속된 노조의 재정압박과 조직력상실로 인해 거대노조에 의한 소규모노조의 합병이라는 현실적인 경로를 걷게 된다. 먼저 1996년 1월1일부터 진행된 건설석재노조(IG Bau-Stein-Erden)와 조경농림노조(Gewerkschaft Gartenbau-Landwirtschaft-Forsten)간의 통합논의는 건설노조(IG BAU)로 정리되었다. 특히 그동안 진행되었던 조직구조의 개혁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1998년 초에 이뤄진 화학·제지·세라믹노조(IG CPK)와 광업·에너지노조(IG Bergbau und Energie), 그리고 가죽노조(Gewerkschaft Leder) 세 조직간에 이루어진 화학노조(IG BCE)로의 통합이었다. 이 새 노조는 이후 백만이 넘는 조합원들을 포괄함으로써 독일노총 안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노동조합이 되며, 나아가 그에 상응하는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특히 화학노조는 언론매체노조, 체신노조(DPG)와 금속노조로 대표되는 독일노총 내 개혁진영에 대항하는 보수진영의 선두주자라서 독일노총내 보수-개혁의 세력관계에 일정 변화를 초래한다. 한편 나무인조원료노조가 섬유피복노조와 마찬가지로 금속노조에 연이어 가입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대응 - 노조 통합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독일노동조합의 조직재편과정, 좀더 상세히 표현한다면 노조간 인수·합병을 통한 통합은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니라,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규정된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결단 과정이었다.4)

1990년대 독일노동조합의 조직 통합을 추동하고 있는 원인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구조와 생산체계상의 변화, 즉 구조조정의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유럽통합에 따른 경제운영의 유럽화, 자본이동의 국제화, 생산의 지구화, 사양산업과 신종업종들의 급격한 교체, 집단적 노사관계 규범의 보편적 적용의 약화, 신경영전략 도입에 따른 노동조직 변화 등은 일상화된 구조조정에 대응할 수 있는 노동자 이해대변 조직의 새로운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노조 재편과정은 특히 노조 조직이 봉착하고 있는 대중동원력의 상실과도 맞물려있다. 이미 조합원수 감소, 적자재정에 따른 교섭력 제한 등으로 새 이해대변 체계의 구축 필요성과 노조간 경쟁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조직 자원을 결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조직 통합은 규모의 경제효과는 물론, 기존에 서로 겹쳐 수행해온 조합 활동을 특화시킴으로써 조직간의 상승 작용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소위 세계화 시대의 새 경제 패러다임에서 독일노동조합의 조직률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미래에 대한 물음 가운데는 항상 노조 소멸의 가능성에 대한 제기가 중심에 서 있었다. 이는 단지 노조기구 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라기보다, 임노동 관계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관계에서 노조가 차지하던 중요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제기되고 있다. 쿠르츠세퍼와 쵸이너(Kurz-Scherf & Zeuner 2001, 150쪽 이하)에 따르면, 독일노조의 조합원 감소 원인은 먼저 제조업에서, 특히 대공장의 리엔지니어링 과정을 통해서 일반 숙련직의 비중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독일노동조합이 산업사회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중요시되는 새 노동자층을 조직함으로써 조합원 감소를 상쇄하는 데 실패했음을 뜻한다. 또한 정보기술사회, 혹은 서비스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규 고용관계의 비정규직화, 그리고 준/자영업으로 대표되는 비정형 고용관계의 증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조직화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아웃소싱과 분사, 노동조건과 고용관계의 유연화, 규제완화 등과 같은 외적 조건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필요했던 적절한 대응력과 조직화의 실패는 당연히 독일노조 자체의 책임인 것이다. 청년층과 여성들에게 노조가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조합원 감소의 중요 요인인데, 이러한 상황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는 관행에 길들어진 노조 활동, 낡고 경직된 조직구조, 특히 남성중심적인 권위주의 조직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수세적 대응으로서의 노조 통합 

이와 같이 독일의 노동조합은 격렬하고 광범위한 변화 앞에 직면해있다. 조직활동의 여러 조건들, 특히 노조에 대한 외적 구조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새로운 도전들, 그리고 노동조합의 내부요구 그 자체도 변하고 있다. 소위 세계화 시대라는 현 시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노동조합운동이 태동했던 19세기 후반과 버금가는 시기로 이야기된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은 새로운 사회 구성을 동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제2의 탄생, 즉 거듭남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기존의 산업사회가 어디로 나아갈지, 새로운 서비스, 정보·지식·매스컴 사회에서 노동조합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그리고 과연 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독일노조는 외적 환경변화의 영향력에 이미 노출되어 있고,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내부적으로 재구조화, 즉 조직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르디의 건설은 전환기의 도전에 직면한 독일노조가 새롭게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시험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베르디(Ver.di)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태리 오페라작곡가(Verdi)와 디지털(Digital)이 서로 만나 문화와 기술, 그리고 전통과 현대를 통일시킨 느낌을 준다. 하지만 베르디는 독일노조운동의 부활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세계 최대의 노조라는 크기 역시 조합원수의 증가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감소하고 있는 조직률을 조직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한 곳으로 묶어낸 것에 불과하다. "구조는 전략에 뒤따른다"라는 조직 논리에서 나온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안이 아니기 때문에, 베르디는 노동조합의 정책프로그램과 전략방침이 새롭게 설정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볼 수는 없다.5)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고착되어온 산별조직 구성을 깨고 여러 부문을 포괄하는 초산업적인 노동조합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특히 지난 수년간 이루어진 조직통합의 논의과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독일노동조합의 현재 고민과 조직 갈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서비스 부문 내 노조조직의 개혁논쟁과 그 재편과정

verdi_02.jpg다음에서는 서비스부문과 관련된 독일노동조합들의 조직통합 논의를 중심으로 하여 그 개편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 그 수렴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조합의 조직재편, 특히 노조 합병과 통합을 추동하는 동인들이  분명 노사관계를 구성하는 구조·환경·조건과 주체적 요인들로부터 복합적으로 영향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기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였다. 1980년대에 이미 독일노총 소유의 자산과 기업들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존의 '약한 노총·강한 산별노조'라는 구도가 더욱 굳어지게 된다. 노총의 재정 및 정치활동 공간은 좁아지고, 산하 거대노조의 선택에 따라 노총의 운신 폭이 정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더욱이 준비되지 못한 독일 통일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게 되면서 조직 재편 문제가 노조의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이와 같이 1990년대 들어 노조 내부의 개혁 논쟁은 크게 정책 기획과 조직 개편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된다. 초기에는 변화하는 노사관계의 지형과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노선 및 정책 프로그램에 논의의 초점이 모아졌지만, 소규모 산별노조들의 재정이 급속히 악화됨으로써 그 중심점이 조직통합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6)

통합노조, 베르디 건설을 향해 

노조들간의 협력과 공조는 기존에 동일한 사업장에서 조직관할권을 두고 경쟁해왔던 노조들간에 이뤄지기 시작한다. 민간 서비스 영역, 특히 금융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서있던 독일사무직노조(DAG)와 상업은행보험노조(HBV)간에 협력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은 오랜 경쟁관계에서 초래된 피해가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도출된 것이다. 특히 지역차원에서 이뤄진 조직관할권의 조정문제나 임단협 공동목표의 설정 등과 같은 시도는 협력의 시금석으로 작용할 만하였다. 문제는 항상 개별노조의 상급, 즉 중앙집행부가 고집한 상이한 조직 원칙으로부터 불거져 나왔다. 독일노총 소속인 상업은행보험노조는 독일사무직노조가 다수파인 사업장에 소속된 그들의 조합원들을 포기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독일사무직노조는 지금까지 그들이 유지해온 사무직노조의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간의 공백기간을 거치고 난 후, 독일사무직노조와 독일노총 산하 상업은행보험노조와 공공운수노조간에 경쟁적 조직관할 싸움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된다. 1980년대 말부터 공동활동과 공동파업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개별 노조들의 대표자들이 함께 하는 '협력회의(Kooperationsabkommen)'가 구성된다. 

이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1990년대 중반 이후 전체 서비스 부문의 개별노조들 사이에 통합 논의가 진행된다. 1996년 2월 상업은행보험노조의 제안으로 서비스 업종의 통합안이 상정된다. 언론매체노조, 체신노조와 교육과학노조가 이 안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를 타진하면서 노조통합 논의가 가속화되고, 독일사무직노조와 공공운수노조가 상업은행보험노조와 조직통합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함으로써 베르디 건설은 본격화된다. 1997년 10월4일 '함부르크 선언'을 통해 6개 노조의 통합은 단순히 개별노조들간의 합병이 아니라, 새로운 노조로의 구조변화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이는 1998년 2월24일 제안된 정책기초(Politische Plattform)의 내용에서 어느 정도 확인이 되는데, 공동의 상급조직으로서 베르디, 지역과 전문영역의 독자성 존중, 의사결정 구조의 분산화와 기능의 효율화, 명예직 자원활동의 강화 등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1998년 6월 통합위원회는 새롭게 건설될 노조의 '기본구조'를 제안하는 '핵심적인 상'을 확정한다. 이 안에 따르면, 전문영역에 기반한 수직적이고 자율적인 부문구조, 수평적으로 나누어진 지역조직, 직업 및 인적 그룹으로의 분화, 그리고 특화된 주제 및 기획구조를 행렬조직으로 구성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통합안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개별 노조들의 내부에는 조직 통합을 의미하는 합병관계보다는 독자성을 존중하는 협조관계를 선호하는 조합원들이 다수 있었지만, 공공운수노조와 독일사무직노조의 합병추진안이 확정되면서 다른 노조들도 합병 쪽에 힘을 싣게 된다.7)

노선과 정책이 없는 통합?

verdi_03.jpg1999년 초 통합위원회는 소규모노조들의 독자성과 공공운수노조의 기존 이해대변 구조를 적절히 배합한 타협안을 '중심내용(Eckpunkte)'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각 노조의 이해갈등은 심각했다.8)

이 중심내용에 통해 각 전문영역에서의 임단협 권리와 정책결정에 대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정하게 된다. 그러나 베르디의 '중심내용'의 보고서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통합노조의 행렬조직이 너무나 복잡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내부의 갈등뿐만 아니라, 독일노총 내 다른 노조과의 조직 관할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남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9년 11월17일부터 21일 사이 동시에 개최된 각 노조의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베르디의 창립조직으로서 '가자-베르디로(GO-Ver.di)'가 만들어지고, 통합노조의 정책기초, 핵심상 그리고 중심내용 등이 인준된다(Hasibether 2001, 172쪽). 

베르디의 건설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은 바로 '노선과 정책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부재이다. 되레에 따르면, 베르디가 "정치적 기획이 없는 노조건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공식화하고 있는 정치지향과 전문화라는 전략적인 목표간에 갈등이 잠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응으로 노동사회의 미래, 서비스 노동의 미래, 저임금 부문, 노동시간과 공동결정제도에 대한 대토론회가 통합위원회의 주최로 조직되고, 이러한 토론 결과물에 기초하여 "프로그램에 대한 입장(Programmatische Positionspapier)"이라는 지도부의 입장표명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디의 지도부가 노선논쟁의 격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조직 분열과 통합 와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지도부가 프로그램 논쟁을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조직 전환을 우선시하고 그 과정, 혹은 사후에 프로그램상의 노선 및 정책논의를 진행하자는 지도부의 입장이 사실상 관철되었다.

4. 노조 통합과 베르디 건설에서의 문제

약 3년 동안의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베르디 건설을 둘러싼 논의는 노선과 정책프로그램보다는 조직 내부를 구성하는 각 지역 및 전문업종간 의사소통과 동의 창출을 질적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작업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현재 30개 업종의 약 1000개의 직종을 포괄하는 기존 5개 노조의 활동영역을 13개의 업종묶음(전문영역)의 견고한 통일체로 재구성하는 것을 통합노조의 조직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그래서 노조 내부에서 업종의 구분보다는 서로간의 교류와 협조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가 조직발전의 관건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서비스 부문 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의미의 '단일노조'를 궁극적으로 추구했다. 

조직 구성의 수직 및 수평축으로서 전문영역과 지역구획

베르디의 조직구조는 전문영역(Fachbereich)과 지역구획(Bezirk)이 행렬을 이루는 매트릭스(Matrix)형태, 업종 묶음으로 구분되는 조직 구성, 그리고 이러한 전문적 업종 구성체들을 아우르는 상급 대표체라는 세 가지 층을 갖고 있다. 흔히들 이러한 매트릭스 구조는 다차원적인 행위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산하 단위조직들의 사업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등한 의사결정을 어느 정도 보장함으로써 일방적인 결정을 피할 수 있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조정, 합의 및 통일 행위를 위한 시간과 노력이라는 비용이 필요하며, 의사결정 과정의 복잡성으로 책임소재가 불투명해짐으로써 자칫 편의적이고 관료적인 위계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르디의 매트릭스구조는 조직·정책 차원의 제안과 결정 과정을 거친 합의물이라기보다는, 개별노조와 내부 이해집단들의 요구와 이해를 반영한 타협의 산물이다. 그래서 분권화와 자율성이라는 내부 원칙과 대외적으로 구속력을 가진 대표체라는 어쩌면 상호 모순된 조직 원칙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조직 원칙의 상호충돌 가능성이 실제 베르디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다.9)

13개 업종묶음으로 구분되는 전문영역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Keller 2001a, 49쪽 이하). 첫째, 기존의 단위노조가 다수를 점함으로써 조직적 연속성이 유지되는 경우(우편 부문의 경우 체신노조), 둘째, 공공운수노조의 전문영역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다른 개별노조들이 결합되는 경우(교통 부문, 공공 서비스 부문과 사회 서비스 부문의 경우), 셋째, 개별노조의 전문영역이 서로 겹치는 경우(금융 서비스, 통신과 정보 부문의 경우), 특히 셋째의 경우, 이 분야의 사업장 관할권이 새로 재편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기존의 노조들간에 상당한 갈등이 예상된다. 그리고 전국을 110개 정도의 지역으로 나누게 되는 지역구획안도 공공운수노조와 상업은행보험노조간에 상당한 갈등을 유발시켰다. 기존에 약 60개 정도의 지역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던 상업은행보험노조의 경우 내부조직역량의 미비로 인해 가능한 한 지역구획수를 줄이고 한 유급활동가가 담당하는 지역범위를 넓히는 것이 중요했다. 

이와 달리 공공운수노조는 이미 존재하는 170개 이상의 지역편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존 활동 범위의 축소와 인원조정이라는 조직적 부담이 존재했다. 이를 줄이는 작업은 내부 반발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전문영역의 역할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다른 개별노조와 달리 공공운수노조는 임단협 수준의 지역적 평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조직구성을 원하였다. 왜냐하면 공공운수노조는 지금까지 임단협의 일반 적용률이 상당히 높은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지역간 편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전문영역의 강화로 인해 임단협의 보편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원칙적으로 의사결정의 수렴과정을 이중적으로 구성하는 안을, 즉 지역 차원과 전문영역 차원에서 동시에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는 안을 단위노조가 합의하게 된다. 다만 "공공 서비스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업종들"에서는 임단협 규정이 전국 차원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지역 중심적인 공공운수노조안이 존중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임단협의 보편적 적용이라는 교섭정책상의 의미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의 노사관계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예산분배와 의사결정구조, 임단협과 이해대변조직

노조예산의 분배와 관리의 책임은 상당한 논쟁거리였다. 최종적으로 전체예산의 42.5%를 전문영역이, 나머지를 지역조직이 관리하는 것에 합의했다. 다만 지역조직 내 전문영역이 새롭게 편성되는 경우 이를 위한 예산의 60%를 지역에서 조달하는 것으로 결정함으로써, 각 지역조직에 전문영역이 고르게 조직되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지역조직간에 재정 및 인력상의 편차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지역간 불균형이 강화될 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한 문제는 베르디 안에 실제로 독일사무직노조 외에 재정 및 자산상태가 양호한 노조들이 없었다는 데에도 기인한다. 특히 공공운수노조의 경우 지금까지 예산에서 인력비용이 50%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인원 축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다가왔는데, 이러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가 고민거리였다. 특히 인원조정이 불가피한 중하급 상근자들의 반발이 상당히 심각하였다. 이러한 재정압박 상황은 기존 상근활동가들의 조기퇴직을 보장하는 노후기금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비약되었다.

한편 노조조직 내 의사결정 권한의 분할과 배치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사업집행권과 의사결정권을 통일하느냐, 아니면 분리시키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왜냐하면 공공운수노조를 비롯한 독일노총 산하 노조들과 독일사무직노조간에 의사결정구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합의점은 지역의 최고의사결정은 기본적으로 무보수 명예직, 즉 선출된 조합활동가들에 의해서 구성된 대의원대회가 수행하고, 이를 집행하는 단위로서 집행위원회에 지역 사업을 관할하는 유급 상근활동가들이 참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근활동가들에게 기본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투표권을 부여하지만, 조합원들에 의해서 선출된 무급명예직대표자들의 다수에 반하는 결정은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권한분배의 문제는 임금 및 단체교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원칙적으로 임단협의 교섭주체는 개별 전문영역별로 독자적으로 구성되는 임단협위원회(Tarifkommission)다. 임단협위원회는 전국 차원의 위임에 의해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역위원회에는 임단협 전문가는 물론, 다양한 수준(지역/주/연방)에서의 임단협 담당자들이 함께 참가한다. 다만 단체교섭의 내용이 전문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사항인 경우, 연방차원에서 꾸려지는 임단협회의(Tarifausschuss)에서 각 전문영역의 대표자들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또한 이 임단협회의는 각 전문영역의 교섭내용상 차이와 갈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임단협 정책상의 기본원칙들을 미리 상의하고 확정한다. 또한 각 전문영역간 단협 경쟁이나 임단협 수준의 저하를 막기 위해서 감독기구(Clearingstelle)를 두고 있다. 이 기구를 통해 연방차원에서 결정된 임단협의 최소 수준 이상으로 전문영역의 교섭이 타결되고 있는지를 감시한다(Ver.di 2000, 107쪽 이하). 

기본적으로 노조란 내부의 소수자, 혹은 소수그룹의 의사를 반영하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노조의 정강정책이 더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만드는데, 그 조직·정책상의 목표가 있다. 그래서 베르디는 지역구획과 전문영역이라는 행렬조직 외에, 청년·여성·실업자·퇴직자·공무원·노동자 등과 같은 계층그룹(Berufs-und Personengruppe)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조직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조합원의 49%를 차지하는 여성의 이해대변을 위해서 보직할당제나 특별이해 대변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베르디가 포괄하는 업종들 중 많은 부문에서 기존에 각 노조들이 개별적으로 사업을 수행하였을 뿐, 통일적인 활동경험이 부재하였다. 그래서 통합노조의 입장에서 이 업종부문들의 변화와 이에 대한 노조의 대응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단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문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그 범위는 향후에 더 확대되겠지만, 현재 정보통신과 매체, 우편과 물류흐름 및 판매, 금융서비스, 출판과 문화사업에 대한 네 가지 연구 프로젝트가 수행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갈등

verdi_04.jpg이와 같이 통합서비스노조로서 베르디 건설 계획은 독일노조 역사상 최고의 재조직계획으로서만이 아니라, 사적-공적부문의 고전적 조직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첫 시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하다. 실제로 통합과정의 공식적인 논의와 이에 대한 논의문건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갈등 잠재성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베르디의 조직 안팎의 관계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과 갈등의 소지는 향후 발전가능성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베르디 조직의 내적 관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하부집단, 즉 유급 상근활동가, 명예직 선출활동가와 일반조합원(Mitglieder)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Keller 1999, 618쪽). 실제로 통합과정에서 노조의 구성원들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분권적인 조직 원칙에서 내적 관계를 구성하는 상근, 명예직, 평조합원 간에 적절한 임무배치와 역할분담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재정과 인력을 지역별로 보완해 공유해야 하는 일은 어려운 문제다. 특히 기존의 상근자들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일자리를 재분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향후에 그들이 맡게 될 새로운 역할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조직화 관점에서 상근자들의 활동이 중복되어서는 안되고, 협력은 권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야만 분권화된 조직에서 중앙집행위원회와 활동단위간의 상호보완 효과가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내부조직의 권력관계와 관련되어 어느 정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베르디가 처한 도전들 

한편 무보수로 활동하는 명예직 선출대의원들 또한 베르디의 향후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규약상으로 중앙집중적으로 집행되던, 혹은 개별 전문영역에서의 수행능력으로 그 집행권이 이전되던 간에, 새로운 베르디 조직에서는 명예직 활동은 현장기반(Mitgliedbasis)의 매개고리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기초민주주의는 공식적인 지역구분인 연방/주/지역 밖에 새로운 네 번째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 대의원들의 자발적인 활동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외부 관찰자에 입장에서 볼 때, 베르디의 조직개편 과정은 조직상하부간에 상당한 이견이 존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베르디의 통합과정에 참가한 노조들은 개별조직으로서 자신의 존재근거 뿐만 아니라 그들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만 했다. 과연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본적 이해에서 중심이 벗어난 조직통합이 가능한가? 과연 새로운 노조는 자신들의 조합원들을 얼마만큼 통합과정에 적극 참여시켰고, 조합원들은 통합과정에서 자기정체성을 과연 확인할 수 있었는가? 베르디는 그들의 조합원들에게 노동현장은 물론, 일상생활의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야 하는 동시에, 파편적인 개인주의 시대에 집단적 이해대변조직이 가지고 있는 전망을 또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Keller 2001, 378쪽).

둘째, 향후에 베르디가 맺게 될 독일노총 혹은 그 산하 노조와의 관계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Keller 2001a, 72쪽). 개별 노조들의 합병이 상급조직의 위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상식이다. 실제로 베르디로의 통합은 독일노총의 조직구조와 형태를 급변시키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베르디가 맺고 있는 조직적 관계와 관련하여 종종 제기되는 주장은 상당히 낙관적이거나 때론 전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이들은 새로운 통합서비스노조가 독일노총의 위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일노총 내부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베르디는 그들의 이질성, 탈중심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규모 측면에서 볼 때, 소규모의 노총이고, 내용상 상급조직이 필요 없는 조직이다. 그래서 베르디의 통합과정으로 존재 필요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상급조직으로서의 독일노총인 것이다. 

단지 상급조직, 즉 독일노총에 대한 베르디의 관계뿐 아니라, 노총 산하 산별노조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조정되어야만 한다. 특히 조직관할에 대해 가능한 한 확실한 구분이 반드시 요구된다. 왜냐하면 베르디의 출현으로 개별사업장에 따라 노조간 관할권이 중복될 수 있고 새로운 조직갈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여름 독일노총 산하 노조들간의 '협정'은 산업별 원칙을 다시 확인하고, "한 사업장에 한 노조의 대표성"을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는 기존에 독일사무직노조(DAG)소속 조합원의 조직소속 변경을 강제하는 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독일사무직노조는 금속부문의 사업장에 소속된 기존의 조합원의 소속유지와 임단협교섭위원회의 적절한 참여를 금속노조로부터 보장받는 대신에, 이후에 조직화가 가능한 사업장에서의 조직사업을 포기하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정보통신업종과 같이 노조들간의 조직관할이 중첩되는 경우에, 일단 서로간의 경쟁을 금지하고 해당 노조들이 공동으로 참가하는 '주무처'가 이 문제를 관할하는 것을 논의했다. 독일노총의 중재위원회가 만든 안에 따르면, 정보통신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장은 베르디가, 장비기계설비와 관련된 서비스는 금속노조가, 매체원료와 정보재료와 관련된 사업장은 화학노조가 조직관할하는 것으로 일단 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한 사업장은 한 노조가 대표성을 가진다"는 산업별 원칙은 고수된다. 다만 관련사업장에 이미 여러 노조의 조합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조정하는가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10)

또한 "다른 노조와 단순한 협정"이라는 의미에서 이 합의의 성공여부는 아직 보장되지 않고 있으며, 조직경계의 구분문제는 아마 향후에도 반복되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미 구 동독지역의 조직확대과정에서 확인되듯이 조직구획의 조정자로서 상급조직인 독일노총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셋째, 베르디의 분권적 구조, 즉 매트릭스구조는 조직의 민주적 운영에는 유효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효율성과 관련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매트릭스구조는 특히 전체 조직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임금체계의 조화, 노동투쟁의 조직, 공식적인 정책 등)을 상당히 지연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직 통합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을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행렬구조는 베르디 내부의 기묘한 이해균형의 표현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국 해결될 수 없는 조직목표의 갈등지형을 잠시 절충한 것일 수도 있다. 향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지는 중앙의 최종결정권에 의해서만 답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역단위나 전문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반문되어야 할 내용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농후하다. 왜냐하면 베르디의 향후 발전에 대한 전망을 논의하는 노력이 그리 눈에 띠지 않고 있다. 어떠한 원칙과 목표설정이 유효한지, 동시에 베르디의 자기정체성이 과연 무엇인지 거의 토론되고 있지 않다. 즉 아직까지도 베르디를 둘러싼 논의는 형식적인 측면에 기울어 있고, 구성 집단들의 이해조정을 위한 절충안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논의는 조직구조의 재편과정을 통해서 나온 결과로 현실화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Keller 2001a, 106쪽 참조).

5. 결론을 대신하여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그리고 이에 대응하면서 독일노동조합이 취해온 기본 입장은 과거의 성과들을 방어하는 동시에, 포괄적인 자본주의 구조조정에 대해 혁신적인 참가를 조직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 선택 속에 대립과 협력이 모순되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바로 바로 노동조합이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이러한 양면성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대항세력(Gegenmacht)과 질서의 구성요소(Ordnungsfaktor)라는 양날의 칼은 시기와 쟁점에 따라 그 강도가 차이가 나타났을 뿐, 독일노동조합의 버릴 수 없는 조직목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르디의 건설과정도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나타나게 될 통합서비스노조의 사업과 활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르디는 하나의 시험대다. 업종의 차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통합노조로서도 그렇고, 프로그램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촉발 기제로서 조직재편이라는 조직·정책상의 시도에서도 그렇다. 베르디에 대한 조직 전망은 안팎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는 불안감과 함께, 나름대로의 장점을 잘 살리면 성공할 것이라는 호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에 대한 판단은 결국 이후 활동과정에서 매트릭스 구조로 대표되는 분권화된 조직이 어느 정도 총체적인 조직역량을 발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 후주
1) '산업별 원칙'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약간의 오해 소지가 있다. 여기서 산업별 원칙이라는 말은 단체교섭의 한 주체가 산업별 노조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말고도, "한 사업장의 노동자 이해 대표권은 한 산업별 노조"에게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한 사업장이 어느 산업에 속하느냐를 어느 정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별사업장에 대한 독일노총 내 노조간 관할문제가 발생할 때 그 판단기준으로 "그 사업장에서 어떤 것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용된 노동자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직업들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따라 노조 소속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2)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G. N. Chaison, Union Mergers in Hard Times-The View of Five Countries, Ithaca/London, 1996을 참조하시오.
3) 켈러(Keller 1999, 610쪽) 참조.
4)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독일금속노조의 "미래논쟁"의 한 프로젝트보고서로 제출된 Michael Fichter (Hg.), Zukunft der Gewerkschaft, 2001을 참고하시오.
5) 쿠르츠세퍼와 죠이너(2001, 149쪽)는 베르디의 출현이 기존의 공공운수노조, 상업은행보험노조(HBV), 언론매체노조(IG Medien), 체신노조(DPG), 독일사무직노조(DAG)라는 오래 된 와인을 통합서비스노조라는 새로운 병에 옮겨 담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6)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과 내용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독일노총 월간지( Gewerkschaftliche Monatshefte)에 실린 다양한 논문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998년 7월 교육과학노조는 내부분열의 위험성을 우려하여 통합노조에 참여하는 것을 유보하게 된다(Keller 2001a, 53쪽). 
8) 예를 들어, 통합노조의 조합원 반을 차지하는 공공운수노조의 활동가들은 인적 재정적인 분배구조하에서 그 지분이 단지 20%에 불과하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3개 전문영역에서 각 노조들의 주도성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청소서비스, 의료를 비롯한 사회서비스, 공공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교통부문에 대한 주도권을 공공운수노조가 지니게 만들었다. 하지만 금융서비스와 같이 독일사무직노조, 상업노조, 그리고 공공운수노조의 기존 조합원들이 섞여있는 경우, 그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9) 켈러(1999, 622쪽)는 비이익단체로서 노조의 특성을 고려하여 합의된 베르디의 조직원칙이 유급상근활동가와 무급명예직활동가간의 세력균형을 어느 정도 보장하지만,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에서는 상당한 위험이 내포된 결정이라고 본다. 반면, 뮐러(2001, 119쪽)는 이러한 조직형태상의 특성이 분권화와 집중화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능적 균형을 의미한다고 본다.
10) 지금까지 금속노조와 독일사무직노조의 노조원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조직되어 있던 독일 IBM의 경우가 이러한 문제로 인해 노조간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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