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 정치, 어디로 가나

노동사회

2002년 한국 정치, 어디로 가나

admin 0 3,088 2013.05.08 09:00

 


ytjung_01_0.jpg1. 2001년 한국정치를 돌아보며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지 4년이 지났다. 이들이 역대 어느 정당, 대통령보다 '진보적'이고 '친노동적'인 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외교와 사회경제 제도를 어느 정도 바꿨다. 북한과의 교류, 특히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미국이 일반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지기도 했다. 사법부가 전국구 제도가 위헌이라고 판결함에 따라 진보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정당명부제의 도입 가능성도 높아졌다.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모금과 선거 정치 참여가 합법화되었으며, 국가 정책결정에도 정당한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견고한 독재와 종속의 유산들

그러나,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구조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못했고, 새로운 제도에 맞는 관행을 정착시키지도 못했다. 북한과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졌음에 불구하고, 반북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지금까지 915명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북한과의 정치·군사적 대립은 여전히 냉전 수준이다. 미국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때때로 문제도 제기하고 교정하게 했지만, 대미 종속적인 구조나 태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노조의 정치활동은 허용되었으나, 작년 6월 롯데호텔 농성노동자 진압사건이나 대우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폭력 진압이 보여주듯이 단체행동권과 노동자의 개별 권리는 이전과 마찬가지거나 오히려 축소되었다. 

이전과 변함 없는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퇴보를 강제하는 각종 관행들, 예를 들면, 지역주의와 같은 연고주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권위주의와 그에게 순종적인 사람이나 집단에게만 혜택을 주려는 온정주의, 부정부패를 양산해온 편법주의 역시 그대로 남아 있다. 

보수세력 온존과 실종된 개혁 정치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한나라당 등 보수정치 세력과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언론, 그리고 시민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보수 인사들이 온존해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DJ당' 내지 '호남당'으로서의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난 4년 간 정치, 사회 구조와 관행이 별로 바뀌지 않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보여준 문제점 때문이다. 김대통령과 민주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지 못함으로써 영미식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풍미하게 만들었다. 또한 집권 때부터 정치적 지지 기반이 대단히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진보 세력을 강화시켜주기는커녕 주도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오히려 이들과의 갈등을 야기한 데다가, '자기 사람'이 이권에 개입했을 때 '자기 사람'을 감싸는 데만 급급함으로써 스스로 국민적 정통성을 약화시켰다. 이 모든 결과는 정치기반 약화와 작년 10월 재보선의 민주당 완패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친노동자적인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지난 4년 간 통치를 해 왔건만 집권 세력이 처한 외부 요인과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내부 요인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치 구조와 관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 및 사회집단의 영향력과 지지 기반이 이전보다 강화된 것은 아니다. 작년 10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완승을 하였으나, 그것은 보수 세력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개혁을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지지 기반이 강화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등 진보정치 세력의 지지 기반도 4년 전과 비교할 때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민의 정당 지지도를 근거로 판단할 때 전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2. 2002년 한국정치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몇 가지 변수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필자의 소견으로는 올해 정치 구도에 영향을 미칠 변수에는 네 가지가 있다. 

변화된 국민 의식 

우선, 영미식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국민들의 의식 구조 변화를 들 수 있다. IMF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 신탁통치로 우리의 경제제도는 자유무역과 영미식 자본주의로 전환되고 있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소유주의적인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 즉 개인의 소유권과 노력에 입각한 경제적 이득의 획득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관철되고 있다. 물론, 실제 행동은 아직도 연고주의와 탈법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등 전통적 가치관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으나, 동시에 소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점차 팽배해지고 있다. 일반 국민들의 이러한 의식 변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교육 영역에서는 사교육비와 교육 이민의 급증, 직장에서는 능력과 성과에 대한 보상 체계의 도입 지지, 정치영역에서는 이익 집단의 활성화와 정치화(예를 들어, 교총과 의사협회의 정치활동 선언)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개인주의화하고 경제적 이득을 중시하며, 이 두 가치에 반하는 어떠한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반발하는 국민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올해 정치의 향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이념 논쟁이나 폭로전을 일삼으면서 '민생'을 외면하거나 부차적으로 만드는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만이 점차로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작년 12월 초에 실시한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무당파가 40%를 넘었다는 사실이나, 의사협회나 교총 등 이익 집단들이 정치 활동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사실 등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앞으로 정당과 정치인들은 다양한 이익집단간 이해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정당성을 더욱 상실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정치와 의회 정치를 계속 독점하려 할 경우 정치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진보정치 세력에게는 상호 모순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화하고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하는 국민이 많아진다는 점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패권주의 저항 확산

다음으로 영미식 자본주의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전자의 변수가 경제성장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을 의미한다면, 이 경우는 분배 우선주의와 초국적자본에 대한 비판의식의 확산을 의미한다. 영미식 자본주의와 시장개방은 (금융)자본과 (새로운) 기술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전보다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지만, 자본도 기술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오히려 실업이나 저소득을 가져다 준다. 

IMF 체제 등장 후, 많은 실업자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절반을 넘어섰고, 이에 따라 계층별, 성별, 연령층별 소득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국내의 빈부 격차는 국가 간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모순과 문제점에 대항하고 해결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격렬한 저항이 일고 있다. 1999년경부터 시애틀과 체코에서 각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연대 투쟁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다시 벨기에서도 유럽연합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국제연대 투쟁이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 각국의 (세계화된) 자본과 정부, 그리고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제기구들이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 확산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면서 동시에 시장의 지분을 둘러싼 자본간 경쟁과 대립 또한 격화되고 있다. 미국이 최근 들이닥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공세적인 시장개방 압력을 추구하고, 탈레반 정권 등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박멸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국내외 사회경제 정세의 변화가 시사하는 바는 우선, 국내로는 고용안정과 소득분배의 문제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점과,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초국적자본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면, 진보정당의 입지가 크게 강화될 수 있다.

민주당의 제도개혁

셋째 변수는 민주당의 제도개혁을 들 수 있다. 민주당은 작년 10월 재보선에서 완패하자 'DJ당' 내지 '호남당'으로서의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민주당에서 도입한 제도는 대통령의 당권보유 금지, 총재직 폐지와 집단지도체제, 국민참여 경선을 통한 대선후보 결정, 국회의원 후보와 지방자치단체 후보의 상향식 공천 등이다. 이러한 시도는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고, 민주당을 전국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민주당의 개혁은 한나라당의 변화를 강제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민주화와 정책중심 대결 구도로의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실제로, 대선 이후라는 전제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한나라당에서도 대권과 당권을 분리하기로 했으며,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국민 경선 제도와 유사한 성격을 띤 예비선거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도 내부운영 방식을 보다 민주적으로 바꿀 경우 현재 선거와 의회에서 기성 정당들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대결 구도가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두 거대 정당이 내부적으로 개혁하고 그들간 대립구도가 정책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하더라도 진보정치 세력이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동안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북한이나 사회주의, 외세 등에 대한 태도나 정책에서 보수성을 버리지 못했고, 당내 개혁에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보수 성향을 버리기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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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당은 지방선거에서 득표율이 10%만 넘어도 대선에서는 돌풍을 일으킬 것이다. 사진은 선거법 규탄 정치개혁 결의대회를 연 민주노동당   ▷ 출처:민주노동당 ]

진보정치 세력 변수

마지막으로 고려할 변수는 진보정치 세력의 돌풍이다. 진보정치 세력이 선거 정치에 참여한 이후 총선과 대선에서 최소한 2% 내지 3%의 지지를 얻어왔다.  

진보정치 세력의 확고부동한 지지 기반이 그 정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선거에서 진보정치 세력은 둘 또는 그 이상 나누어졌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기층 대중의 고통이 더욱 격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보정치 세력의 지지기반은 이보다 훨씬 더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 단, 진보정치 세력들이 모두 단결하고 민주 개혁적인 시민단체들과도 결합하기만 하면 말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전국 득표율이 10%만 넘어도 대선에서는 돌풍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치 세력이 돌풍을 일으키느냐 마느냐는 기성 정당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진보정치 세력의 단결력과 민주 개혁적인 시민단체와의 연대에 의해 더욱 좌우될 것이다. 단결과 연대, 여기에 훌륭한 인물이 더해진다면, 진보정치 세력의 돌풍은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3. 마치며

올해 정치는 주로 기성 정당이 자기 변혁에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이들이 내부 개혁에 성공해서 민주적이고 정책중심 정당으로 거듭난다면, 적어도 지역주의 대립 구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보정치 세력은 그간 내부 분열로 해서 제 몫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제 선거 정치에 본격 참여한 지 이미 10년이 넘었다. 객관적인 여건은 이전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다. 주체적인 조건을 재정비함으로써 진보정치 세력은 한국 정치의 중요한 주체로서 등장해야 하고, 그래야만 한국 정치가 진정으로 변할 수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