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1절 소비에트 공화국의 방위

노동사회

제12장 제1절 소비에트 공화국의 방위

편집국 0 5,303 2013.05.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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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절 소비에트 공화국의 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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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데니치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할 당시에는, 노동자 수천 명이 소비에트가 타전한 전보 한 통으로 도시 내 모든 구의 모든 공장에 있는 자신의 담당 구역으로 복귀했다. 페트로그라드 코뮌 초창기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2년을 투쟁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 시기에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는 일주일 동안 1만 5천 명을 우리 당에 보냈다. 이들은 전방에 새로 투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17년 11월 봉기의 일주일을 제외하면, 위험과 자기희생으로 가득 찬 이 고난의 시절만큼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열정만으로 헌신적인 투쟁을 기꺼이 수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 트로츠키
 

1. 외국의 군사 간섭과 내전

러시아는 매우 복잡하고 유동적인 정세하에서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 1주년을 맞았습니다. 세계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협상국의 열강들이 군사간섭을 통해 러시아 내에서의 전쟁을 격화시켜 소비에트 권력을 타도하려는 기도를 강화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죠. 국내에서는 반혁명 세력이 외세의 지원을 받아 간섭군과 백위군의 동맹을 통해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였고요.

이런 급박한 정세 속에서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독일 패전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에서 혁명운동의 발발에 따라 1918년 11월1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의 파기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백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코카서스의 피점령지역의 주민들에게 축사를 보내고, 독일 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인민들이 결코 영국과 미국 또는 일본 제국주의 억압을 허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고 표명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1917년 11월2일 「러시아 각 민족의 권리선언」을 공포했는데, 선언은 러시아에 있는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법제적으로 확립했으며, 스스로 분리하여 독립 국가를 창설하는 것까지도 포함된 자결권 보장을 천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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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경우, 1918년 11월29일 ‘우크라이나 임시 노·농정부’가 소비에트 권력의 재건을 선포했습니다. 벨로루시에서는 독일 점령군에 대한 인민전쟁이 전개되었으며, 소비에트군이 12월 민스크를 해방한 뒤 1919년 1월1일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918년 12월에 임시 혁명 노·농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정부는 독립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창립을 발표했죠. 

1919년 2월27일에는 벨로루시와 리투아니아 양 공화국의 소비에트가 각각 대회를 열어, 단일의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결정했습니다.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혁명군사평의회는 붉은 군대(赤軍) 몇 개 부대를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정부 관할로 이관했습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 공화국에서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시행되었고, 중?대규모의 기업들이 국유화되었으며, 8시간 노동일제와 모든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제가 실시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04).

이들 국가들에서 세워진 소비에트 권력은 출범하자마자 안팎의 반동세력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어요. 1919년 2월 말에는 독일군과 부르주아 정부군 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죠. 4월에는 폴란드 군단이 침입하여 빌니우스를 점령했습니다. 1919년 8월에는 리투아니아에서 부르주아지 정권이 수립되었고, 혁명운동 참가자와 소비에트 권력의 지지자들에 대한 잔혹한 제재가 가해졌죠. 서(西)벨로루시는 폴란드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sooya_02.jpg라트비아에서는 1918년 11월 리가에서 무장봉기의 준비를 지도하기 위한 군사혁명위원회가 창설되었고, 12월 4일에는 라트비아 임시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2월 들어 소비에트 권력은 리에피아야 주변 지역을 제외한 라트비아 전 지역을 장악했어요. 소비에트 권력은 철도와 대기업을 몰수하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거기에 소프호스체제를 도입했습니다. 또 8시간 노동일제와 사회보험을 실시했고요.

이런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독일군의 침공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독일군 부대는 러시아의 백위군과 발트 지방 독일인의 ‘국방군’, 그리고 라트비아 부르주아지 부대에 의해 지지를 받았고, 영국 해군 소함대 사령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19년 5월22일 리가가 함락되었는데, 간섭군은 여기서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재판이나 심문 없이 4,500명에서 7,000명 사이에 이르는 사람이 총살당했어요. 1920년 1월 초에는 부르주아 권력이 라트비아 전국을 장악하게 되었죠.

에스토니아에서는 1918년 11월 말 붉은 군대가 나르바를 점령했으며, 임시혁명위원회는 ‘에스트란트 노동코뮌’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1919년 1월 초에는 에스토니아 국토의 대부분을 소비에트 권력이 장악했습니다. 에스토니아 적군이 편성되었고,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실시되었으며 대기업이 국유화되었죠.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권력은 그 다음해 초에 붕괴되었어요. 1919년 2월 영국 함대와 핀란드, 스웨덴, 그리고 덴마크 등에서 온 용병의 지지를 받은 부르주아 정부군이 공세를 취하여 붉은 군대를 격퇴시킨 것이죠. 그리고 에스토니아 백위군은 유데니치 장군의 페트로그라드 공격에 참가했습니다.

이와 같이 발트 해 연안 국가들에서 수립된 소비에트 권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 채, 간섭군과 백위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소비에트 권력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죠.

발트 연안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과 반동 세력의 침탈에 이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대내외의 공격이 점점 강화되었습니다. 먼저 협상국 열강은 세계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의 강화를 결정했죠. 협상국들은 이미 콩피에뉴에서 대독(代獨) 휴전협정(1918년 11월11일)을 체결할 때부터, 독일 군대가 협상국군으로 대치될 때까지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서’ 독일군의 일부를 소비에트 영토 내에 남겨두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11월에는 루마니아의 야시와 파리에서의 협상국 사령부 회의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러시아 백위군 조직의 대표들은 크라스노프 장군과 데니킨 장군의 부대와 협력하여 실행할,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에서의 군사작전과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 계획을 논의하여 구체화했습니다. 이 무렵 흑해의 항구에 군대와 병기를 실은 군함과 운송선이 도착하기 시작했어요. 세바스토폴리, 노보로시스크, 오데사, 바투미에는 육군 전투부대가 상륙했고,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미국군과 영국군 4만 명 이상이 상륙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각기 병력 1만 명을 극동에 상륙시키기로 합의하는 협정을 체결했으나, 일본은 실제로 1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상륙시켰죠(황인평, 1986, Ⅲ: 77).

한편, 협상국 제국주의자들은 남부와 동부에서 백위군이 참담한 패배를 당한 뒤, 국내 반혁명 세력에 대한 원조를 강화함과 동시에 백위군 병력을 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1918년 11월 영국 간섭군은 콜챠크를 시베리아 최고 통치자로 위촉했어요. 협상국은 남부에서도 데니킨의 지휘 하에 돈 코사크 군과 의용군을 통합했습니다. 데니킨에게 군사 장비와 탄약이 공급되기 시작했죠.

협상국 제국주의자의 이런 공세에 대해 소비에트 정부는 간섭과 반혁명?반란군 지지 중지를 요구했고, 강화조약 체결을 제안했습니다. 1918년 11월6일 노동자·농민·코사크·적군대표 소비에트 제6회 임시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와 교전 중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정부에 대해 강화 체결을 위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협상국들은 소비에트의 제안을 무시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08).

이런 군사정세 아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당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인민대중의 모든 힘과 국가의 자원을 간섭군과 백위군에 대응하는 데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1918년 11월30일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노농국방회의’가 설치되었죠. 

국내전쟁에서의 세력관계는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을 한 축으로 했고, 국제제국주의의 힘에 의존하는 부르주아지와 지주를 다른 한 축으로 했습니다. 이 두 세력 사이에 수백만의 프티부르주아 대중, 그 가운데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이 존재하고 있었죠. 그래서 투쟁의 귀결은 프티부르주아 층이 어느 쪽에 서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 권력이 개혁적인 농업정책을 실시한 결과, 빈농은 ‘중농화’되었어요. 중농이 농민 가운데 다수자가 되면서, 붉은 군대의 전투능력과 단결은 노동자계급과 중농과의 상호관계에 의존하게 되었죠. 마찬가지로 백위군도 농민의 지지를 필요로 했고요.

1918년 가을 무렵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파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는 주요 사회층인 중농이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농이 국내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백위군이 승리하면 지주들이 복귀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국가의 독립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급속히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 기울었던 거죠. 1918년 초가을 레닌은 중농의 중립화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당이 중농과 굳건한 동맹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918년 말에서 1919년 초 사이에 간섭군은 남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영국군은 바투미와 바쿠를, 프랑스군은 오데사, 헤르손, 니콜라에프를 점령했죠. 그러나 그들의 후방에서는 파르티잔운동이 전개되었고, 당원의 지하활동가들은 점령군 내에서도 선동활동을 폈습니다. 한편, 소비에트 정부는 남부전선을 강화하여 1918년 12월에는 간섭군과 백위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1919년 1월 초에는 역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12).

협상국 군대는 붉은 군대 병력을 남부전선에서 끌어내기 위해 북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콜챠크는 동부전선의 북부 구역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이동시켜 페르미에서 코트라스에 이르는 지역 부근에서 영국군과 미국군 부대와 합류하여 단일전선을 형성한 뒤 모스크바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실제 백위군은 소비에트 제3군을 격파하고 1918년 12월 말 페르미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죠. 그러나 모스크바로 진격하려던 협상국 군대와 백위군이 계획은 소비에트 군의 완강한 공세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황인평, 1986 Ⅲ: 82). 

sooya_03.jpg1919년 봄에는 국내전쟁과 제국주의적 간섭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비에트 권력 타도를 위한 주요 역할이 국내 반혁명군에 맡겨지게 된 것이죠. 협상국의 지휘 아래서 간섭군과 백위군 연합세력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동부에서는 콜챠크 군이, 남부에서는 데니킨 군이,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유데니치 군이, 북부에서는 밀러 군이 진격했습니다.

협상국가들의 군대, 부르주아와 지주의 폴란드 군대, 핀란드,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그리스의 군대도 진격에 참가했습니다. 협상국 군사위원회의 계산에 따르면, 반(反)소비에트 병력의 총인원 수는 13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장병이 31만 명이었고, 군소국가 장병이 60만 명 이상이었으며 백위군이 37만 명이었죠. 진격의 주력은 콜챠크 대부대였고 고문은 프랑스 장군 쟈난이었습니다. 이 군대의 보급과 무장을 담당한 것은 영국 장군 녹스였고요.

병력과 장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소비에트 군은 모든 방면에서 응전을 했지만,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소비에트 러시아는 사방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1919년 5월에는 콜챠크 군이 볼가 강에 도달했으며, 중앙 지역과 모스크바를 위협했습니다. 

간섭군과 백위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모든 세력, 특히 노동자계급의 전 세력이 궐기할 필요가 있었죠. 노동자와 농민 수십만 명이 붉은 군대에 참가했습니다. 붉은 군대를 굳건하게 뒷받침한 것은 당원들이었는데, 당시 당원 1만 5천 명이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며, 공산청년동맹(콤소몰)은 최초로 동맹원 총동원령을 내리고 3,000명 이상의 콤소몰을 전선으로 송출했죠. 노동조합은 노동자 6만 명 이상을 동원했습니다. 전선의 후방에서도 노동자들은 병기와 탄약 생산에 열중했어요. 노동자 대중은 새로운 사회적 노동형태인 공산주의적 토요 노동봉사를 실시했습니다(황인평, 1986 Ⅲ: 97).

그 결과 1919년 여름에는 콜챠크 군은 우랄 산을 넘어 패주했어요.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도 백위군은 패배 당했다. 협상국 군대는 아르헨겔스크와 무르만스크 지역에서 철수를 시작했죠.

1919년 여름과 가을 소비에트 러시아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남부 쪽에서 데니킨 군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협한 것이죠. 협상국이 입안한 새로운 공격도 연합작전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진격을 개시한 데니킨 군에 호응하여 북부에서 백위군 부대가 진격했습니다. 유데니치도 페트로그라드 근방에서 전투행동을 재개했으며, 서부에서는 폴란드를 비롯한 몇 개 국가의 군대가 진격했습니다. 영국 수상 처칠은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작전에 ‘14개국의 원정’을 조직했다고 밝혔어요. 영국 한 국가만으로도 데니킨 군에 소총 25만 정, 대포 200문, 전차 30대, 그 밖의 많은 병기와 장비를 공급했다는 거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13).
 
1919년 6월30일 차리친이 함락되었어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데니킨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소비에트 군의 후방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반혁명 조직 ‘민족 중앙부’의 원조를 기대했죠. 반혁명파들은 데니킨 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해 오는 순간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고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주요한 위험에 대응하여 기본적 세력을 집중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데니킨과의 전투에 모든 것을 경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당과 소비에트의 지도적 활동가가 남부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또 붉은 군대의 신예 병력이 투입되었죠. 7월 말쯤 남부 전선의 붉은 군대는 데니킨에 대한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공세는 취해지지 못했죠.

그 무렵 백위군의 마몬토프 기병대가 남부 전선의 후방을 급습했어요. 소비에트 군은 마몬토프 군을 저지하기 위해 상당수 병력을 전선에서 이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죠. 이 틈을 이용하여 데니킨은 공격집단을 편성해서 모스크바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공격집단은 쿠르스크, 오리올을 탈취하고 투라를 위협했습니다. 1919년 9월경에는 백위군이 러시아의 중심 부근까지 육박하게 되었죠. 

9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당 활동가를 가능한 한 많이 군사 활동에 투입하자는 안을 채택했습니다. 중앙위원회는 당원 3만 명을 전선에 투입했고, 공산청년동맹원 1만 명을 전선으로 내보냈습니다. 또 당은 당의 대열을 보충하기 위해 당 주간(週刊)을 선포했어요. 중부 지구에서 노동자와 농민 20만 명이 당에 입당했습니다. 군대에서도 많은 전사들이 입당했죠.

이런 상황에서 10월15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다음과 같은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투라, 모스크바 및 그것으로 통하는 진로를 적으로부터 차단하고 겨울 동안 총공세를 준비할 것, …… 동남 전선에서는 데니킨이 우랄의 코사크와 합류하지 못하게 하고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투라와 모스크바를 방위할 것”이 그 결의의 주요 내용이었죠. 다른 각 전선에 대해 정치국은 “우선 첫째로 모스크바―투라 지구의, 둘째로 페트로그라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견지에서” 북부 전선, 서부 전선을 검토하도록 총사령부에 제안했습니다(황인평, 1986 Ⅲ: 103). 

1919년 10월 들어 압도적 다수의 노동대중과 광범한 인민의 지지를 받는 소비에트 러시아 군은 장병 수에서나 전투능력 면에서 반혁명군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군대가 드디어 반격을 시작한 겁니다. 간섭군과 백위군의 후방, 우크라이나, 돈, 북코카서스에서는 파르티잔 부대가 활동했죠.

붉은 군대가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았던 지역은 하리코프―돈바스―로스토프(돈 강 유역)의 선(線)이었어요. 적색 코사크 기병대, 사관학교 생도, 라트비아 사단으로 편성된 공격부대는 10월10일부터 30일에 걸친 크로미―오리올 지구의 전투에서 백위군을 분쇄했습니다. 붉은 군대가 오리올을 해방시킨 것이죠. 한편, 보죤누이 기병군단은 보로네지로 진격하던 도중에 시크로 마몬토프 군단의 주력을 격퇴했습니다.

소비에트 군 부대의 계속적인 승리에 따라 붉은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세를 펴는 것이 가능해졌어요. 우크라이나와 북카즈카프가 백위군 점령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소비에트 군은 페트로그라드 부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죠. 유데니치 군은 분쇄되었고, 그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1919년 12월 제7회 소비에트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회는 다시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의 각국 정부에 대해 각각 개별적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어요. 소비에트 정부는 인접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들 국가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강화교섭을 제의했습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핀란드가 강화교섭 체결에 동의했죠(황인평, 1986 Ⅲ: 105~106). 

1920년 봄 카프카즈 전선의 붉은 군대는 카프카즈 국경으로 접근했고, 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의 노동자는 부르주아지에 대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920년 4월에는 바쿠가 소비에트 도시로 되었죠. 1920년 11월에는 아르메니아의 노동자와 농민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소비에트 국가는 간섭군과 백위군을 물리치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어요. 협상국은 봉쇄를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죠. 1920년 1월 협상국 최고회의는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통상을 허가했습니다. 볼가 강 연안 국가들과의 강화가 체결되고 봉쇄가 해제됨으로써,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상태는 호전되었습니다.

그러나 협상국들은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어요. 1920년 4월 폴란드의 부르주아와 지주를 중심으로 한 반소비에트 세력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공격했습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가 점령되었죠. 협상국들은 폴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크리미아에 배치되어 있던 브란젤 백위군을 투입했습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또다시 간섭군과 백위군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죠. 

sooya_04.jpg붉은 군대는 5월 중순 무렵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세는 준비부족으로 실패했죠. 6월 초에는 남부에서 이동해 온 제1기병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백계 폴란드 군의 전선을 돌파했습니다. 제1기병군을 시발로 서남 전선의 전체 군대가 공세로 전환하여 폴란드 군을 격파했죠. 1920년 7월 초에는 서부전선의 군대도 폴란드 영토에, 서남 전선의 군대도 우크라이나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백위군 사령부는 협상국의 지원을 받아 예비군을 동원하여 1920년 8월 반격을 개시했죠. 소비에트 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바르샤바로의 공세는 실패했습니다.

소비에트 군은 9월 들어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고, 폴란드 정부는 이 공격을 두려워하여 10월이 되자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데 동의하고 곧이어 강화조약을 맺었죠.

폴란드와의 전쟁이 종결되자 소비에트 정부는 협상국 최후의 근거지였던 브란겔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가 개시되자 브란겔 군은 크리미아로 물러났어요. 1920년 11월 페레코프 지협(地峽)을 공격한 붉은 군대는 크리미야를 해방시켰습니다. 

러시아에서의 간섭과 내전은 드디어 종결되었습니다. 간섭군과 백위군이 최종적으로 격퇴된 것은 1922년이 되어서였지만, 소비에트 국가가 사실상 간섭군과 백위군을 물리친 것은 1920년 말이었죠(황인평, 1986 Ⅲ: 117~119). 

1920년 말에는 노·농적군(赤軍)의 장병 수는 55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붉은 군대의 중핵을 이룬 것은 노동자계급이었는데, 그들은 총동원만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당 그리고 콤소몰 등의 조직들이 행한 호소에 따라 군에 입대했죠. 또 당은 당원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붉은 군대에 보냈습니다. 그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고요. 노동자 약 94만 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했는데, 그 절반이 산업노동자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15). 

내전이 종결된 뒤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에서 당과 소비에트의 활동을 사실상 지도했던 레닌은 다음과 같이 천명했습니다. 

“당의 경각심과 엄격한 규율, 모든 정부 부서와 기관을 결속시킨 당의 권위,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결국에는 수백 만 명이 한 사람과 같이 수용한 중앙위원회의 슬로건,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치른 엄청난 희생, 이런 것들이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협상국 제국주의자와 전 세계 제국주의자의 두 번, 세 번, 심지어는 네 번에 걸친 군사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18).

소비에트 공화국의 붉은 군대가 간섭군과 백위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원인에 대해 러시아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황인평, 1986 Ⅲ: 119~122). 

첫째,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뒤 국내전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이 인민의 이익을 표현했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정책으로 받아들여 지지했다는 것이죠.
둘째, 노동자와 농민의 강고한 동맹과 모든 민족의 우호에 기초했던 사회제도와 국가제도가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셋째, 당과 소비에트 권력의 정당한 민족정책은 간섭군과 반혁명파에 대한 투쟁 속에서 이전에 억압당했던 러시아 모든 민족의 노동자를 결집시킬 수 있었습니다.
넷째, 적 후방에서 활동했던 파르티잔이 붉은 군대의 커다란 지주가 되었죠.
다섯째, 소비에트의 대외정책 역시 붉은 군대의 승리를 촉진시켰습니다.
여섯째, 간섭에 반대하는 국제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도 붉은 군대의 승리를 용이하게 했죠.
일곱째, 간섭군·백위군과의 투쟁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광범한 근로농민대중을 조직한 당의 지도가 붉은 군대 승리의 결정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한편, 러시아 노동운동사가 마르토프는 국내전쟁에서 붉은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을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습니다(마르토프, 1990: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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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광범한 대중이 붉은 군대에 의해 방위되는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을 자신들의 정책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을 지지했다.
⑵ 붉은 군대는 자국 인민에게 충실하고 자국 인민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인민은 붉은 군대를 적극 지지했다. 군대와 인민이 굳게 결합되었다.
⑶ 소비에트 권력은 전국의 인민, 전국의 힘을 동원하여 전선의 요구에 부응하고 군대에 대한 무기, 탄약, 군복, 식량의 공급 및 인원의 보충을 보장했다.
⑷ 붉은 군대 병사는 전쟁의 목적, 임무를 이해하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그들의 규율, 전투력을 강화하고 그들에게 자기희생의 정신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⑸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볼셰비키당이 붉은 군대의 후방과 전선의 지도적 핵심이었기 때문이었다.
⑹ 붉은 군대에는 새로운 형의 유능한 군사 지도자가 있었고, 비범한 조직가와 선동가가 존재했다.
⑺ 많은 유력한 당원들이 무력간섭자나 백위군의 후방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⑻ 소비에트 국가는 반혁명 세력과의 투쟁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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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장들과는 달리, 붉은 군대 승리의 원인으로 먼저 간섭군이 자국 내 문제로 러시아에 대한 침공을 계속할 수 없었고, 반혁명군은 지리적 분열로 통합적인 작전 지휘 체계를 수립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 분열이라는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배영수 2000: 616).

아무튼 국내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한 결정적인 요소는 붉은 군대 전사들의 정신적·정치적 우월성과 그들의 충만한 혁명적 열의, 그리고 계급적 연대에 의한 단결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2. ‘전시공산주의’ 

협상국 열강들의 간섭과 3년에 걸친 국내전쟁은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해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가져다주었으며,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던 소비에트 경제를 한층 더 심각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붉은 군대는 100만 명에 이르는 군인을 잃었고, 물적 손해는 390억 금 루블에 달했죠. 간섭군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지역을 침탈했으며, 장기간에 걸쳐 공화국의 원료, 광물연료, 식량을 빼앗아 갔습니다. 경제봉쇄로 말미암아 외국무역은 사실상 중단되었어요. 또한, 국내전쟁의 전선이 광대한 영토에 걸쳐 여러 방향으로 이동하게 됨으로써 광공업과 운수부문 그리고 농업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18~319). 

전쟁으로 인한 경제생활의 황폐, 기아는 노동자계급의 생활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전선에 동원되고, 식량징발 캠페인에 동원되고, 운수부문 재건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림 때문에 농촌으로 이주하여 그 수가 격감하게 되었죠. 1918년 가을에는 전체 기업의 38%가 조업을 중단했어요. 1919년에도 광공업 생산고는 계속 저하되어 1920년에는 전쟁 이전 수준의 7분의 1이었고, 선철(銑鐵)은 2.4%, 철도화물 운송량은 23%였습니다. 

1920년 말 소비에트 공화국의 광공업에 취업하고 있었던 노동자 수는 총 150만 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1913년 노동자 수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특히 노동자 수가 두드러지게 감소한 산업 부문은 섬유산업(72.7%)과 식품산업(69.5%)이었고, 금속산업에서는 노동자 수가 21.3% 가량 감소했죠.

산업노동자의 상태는 극도로 어려운 지경이었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기아였습니다. 배급표에 의한 빈약한 식량 할당마저도 규칙적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할당량의 전부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1919년 봄 모스크바 공업지구의 섬유노동자가 받은 배급량은 노동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칼로리 양의 15% 또는 20%에 지나지 않았죠. 

식량부족과 육체적 피로는 질병을 만연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질병 때문에 고통당해야만 했죠. 주거 조건도 매우 열악했는데, 그것은 전쟁 상황하에서 새로운 주택의 건설이나 낡은 주택의 수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발전소는 발전량이 모자라 종종 송전을 하지 못하거나 또는 먼저 기업에 송전해야 했으므로, 대도시에서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전등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거의 난방도 매우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요.

 극도로 악화된 경제 상태 아래서 ‘노농국방회의’와 모든 국가기구는 기아와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인민 생활의 개선을 위해, 전선과 후방에서의 유연하고 기동성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국민경제의 운용은 점점 중앙집권화 되었죠.

소비에트 국가는 시장을 경유하는 정상적인 상품교환에 의하여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제외적인(부분적으로는 군사적인) 방법으로 도시와 농촌과의 직접적 생산물 교환을 조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선의 군대와 후방의 노동자에 대한 물자공급을 확보했습니다(오사카시립대학경제연구소, 1965: 712). 

소비에트 국가는 가장 절박한 문제인 식량조달 해결을 위해 프롤레타리아적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노동자 식량대 ―이는 곧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공화국 식량인민위원부의 단일적인 ‘식량징발군’으로 결합됨.― 는 잉여생산물을 부유한 농가와 농민들로 부터 고정가격으로 구매하거나 공출 받는 방법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화폐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농민들에 대해서는 공업제품을 통한 보상이 필요했어요. 옷이나 신발 여타 상품의 많지 않은 재고품 전부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가는 도매상업 창고와 도매 기업을 국유화했죠. 또 매우 중요한 공업 상품의 사적 거래를 금지했습니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생산이 축소된 여건에서 국가가 곡물과 교환하기 위한 상품 예비분을 충분히 획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위원회의는 1919년 1월11일 식량할당 징발제도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죠. 이에 따라 농민은 잉여 곡물과 사료를 보상 없이 국가에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sooya_05.jpg국가의 이런 조치에 대해 일부 농민은 조직적으로 대항했어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던 마흐노의 반란처럼 농민은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도 반혁명세력의 백위군도 아닌 녹군(綠軍)을 자처하여 중앙의 간섭 없는 농민 자치체를 이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은 전국적인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토지를 빼앗겠다는 백위군보다는 토지를 분배해준 붉은 군대를 선택했죠. 이런 처지에서 농민들은 식량 공출을 감수했습니다(배영수, 2000: 617).

식량징발군은 식량을 징발하는 일 말고도 농기구를 수리하기도 했고, 농번기에는 파종이나 수확을 위해 농민을 지원했습니다. 1920년에는 ‘농민주간’이 실시되었는데, 이 기간에는 노동자들이 무보수로 농기구나 가옥 또는 제분소를 수리했죠.

한편, 당초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국유화 강행은 계획되어 있지 않았으나, 군사정세는 이런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어요.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장기화되면서, 군사물자 생산의 필요를 위해서는 현존하는 모든 가동 능력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공업의 대부분이 사기업 형태로 존재했고, 또 많은 기업의 소유자가 소비에트 기관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료나 자재를 은익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군사 생산을 최대화하기는 불가능했죠. 이에 따라 한층 더 넓은 범위의, 그것도 더욱 빠른 국유화가 불가결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322).

그리하여 1919년에는 거의 모든 중규모 공업이 국유화되었고, 1920년에는 소규모 공업의 일부도 역시 국유화되었습니다. 모든 기업에 대한 계획과 관리가 중앙 기관들에 집중되었고, 기업에 대한 연료, 원료, 설비 등의 공급과 완성품의 배분이 화폐의 지불에 의하지 아니하고, 중앙관리국의 지도서(指圖書)에 따라 행해졌죠. 국가가 기업들을 장악하여 집중화된 관리를 조직함으로써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소비에트 권력은 성립 초기부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슬로건을 선언했습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