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선진화'가 진전되기 위한 조건

노동사회

노사관계 '선진화'가 진전되기 위한 조건

편집국 0 2,742 2013.05.23 11:51

30여 년만의 물난리에 뒤이어 폭염이 세상을 녹여버릴 듯 강렬하게 쏟아지는 속에서, 이 나라 진보개혁세력은 지난 5?31 지방자치단체 선거결과의 충격에서 허덕이고 있는 듯하다. 열린우리당이 무슨 ‘개혁진보세력’이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극우보수세력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아직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초록은 동색”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또 민주노동당 역시 동반추락의 큰 타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은 숨길 수가 없을 듯하다. 연구자들 사이에 “민주정부의 위기”라거나 “진보개혁세력의 새 진로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고 있는 것은 이런 정황의 반영이다. 

5·31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진단과 분석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노무현 정부가 ‘자기만의 도덕성’에 바탕을 둔 오만불손과 서투른 행정집행력으로 국민의 환멸을 불러온 데다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겹쳐 자멸했다는 것과, 정치적 민주화에 치중하다보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격랑에 빠져 ‘실질 민주주의’의 발전을 소홀히 하였고 서민경제의 몰락으로 집약되는 사회 양극화의 늪에 빠지면서 민심을 잃었다는 것, 두 가지로 요약된다. 앞의 것은 수구보수세력의 쾌재 섞인 비아냥거림에 뿌리를 둔 것이라 젖혀두더라도, 뒤의 실질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지적은 자못 의미가 깊다. 우리의 지난 현대사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면, 1987년 이후는 절차 민주주의의 확립과 함께 실질 민주주의 발전이 역사적 과제로 대두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 민주주의마저 지체시킨 ‘좌파 신자유주의’ 권력 

민주주의의 알맹이를 절차(정치), 실질(경제), 산업(참여)으로 나누어 볼 때, 우리 사회의 정치 민주화는 가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아직 많은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국민 기본권 신장과 정치참여의 기본요건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북화해도 뒤뚱거리기는 하지만 길게 보면 큰 걸음을 내딛고 있고, 과거 추악한 역사도 곳곳에서 청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에 와서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군림해온 반봉건적 권위주의 행태와 의식이 급속도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실질 민주주의는 진전되기보다 오히려 퇴보하였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심각성이 날로 더하고, 노동소득 분배율의 하락을 통해 빈부격차는 확대일로에 있으며, 거대기업의 풍년가 아래에는 농민·영세자영업자·중소기업의 절박함이 겹겹이 쌓여 있다. 무엇보다 압축성장의 환상 속에 사라진듯했던 ‘빈곤문제’가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 오늘의 상황을 극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나 개혁진보세력이 외면당한 것을 단지 민중의 삶이 핍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민중은 실질 민주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형식 민주화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나머지 개혁진보세력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던져버린 것은 아닐까? 권력 스스로가 “좌파 신자유주의”라며 냉소와 조롱을 자초하고 있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이 같은 회의의 구체적인 근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그 대표적인 요소를 우리는 ‘노동기본권의 현실’에서 보고 있다.
 
형식 민주주의라도 제대로 되었다면 민중들의 지지가 한나라당이라는 보수집단으로 쏠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정말 절차 민주주의가 제대로 진전되었는지에 의심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민주정부 아래서 노동기본권이 얼마나 확대되었는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서는 형식 민주주의의 내용마저도 제대로 채웠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실질 민주화로의 길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자본의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규제혁파’는 활발한 데 비해, 각종 노동관계법상에서 노동기본권을 제약하는 독소조항은 온전히 남아 노동운동의 발목을 휘어 감고 있는 현실이다. 아직도 교원?공무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곳곳에서 제지를 당하고, 단체행동권은 아예 근원부터 거부당했다. 필수공익사업장에서는 직권중재의 서슬이 노조의 협상력을 극도로 위축시키는가 하면, 남발되는 긴급조정권 때문에 해당 사업장의 노조들은 긴장을 풀 길이 없다. 단체교섭 대상에 대한 좁은 해석과 조정 및 중재대상의 협소화 등은 쓸데없이 노사갈등과 교섭비용을 증가시키고, 기업단위 복수노조의 금지조항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도처에서 가로 막는다. 

이러한 노사관계의 현주소는 특히 아직도 연간 천여 건을 넘나드는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건수가 입증한다. 게다가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비정규직 확산법”이라는 노동계의 비판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또 이미 노사정위원회에서 수년간 논의해왔던 특수고용직의 노동기본권 보장문제는 정부가 이제야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습’을 하려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밀쳐내고 있는 현실이다. 

참여정부, 로드맵에서 노동기본권 먼저 끄집어내라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 중층적 교섭구조 건설과 노동기본권의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노동 기본권문제만 봐도, 공무원노조법을 제정한 것 이외에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 즉 ‘로드맵’ 하나에 몽땅 꾸겨 넣은 채 3년여를 경과하고 있다. 집권 첫해에 나온 로드맵은 노동기본권의 제약요소들을 해소하는 한편 고용은 유연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른바 고용의 ‘유연안정성’이라는 정책 목표와 합치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곧 노동계의 반발을 불러왔고, 유연안정성뿐만 아니라 노동기본권의 개선도 답보상태에 빠졌다. 결국 참여정부는 약속과 달리 사회적 약자인 다수 노동자들에게 정책 보호의 틀을 제공하지 못했다.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와 이익을 쟁취할 수 있는 제도로서 노동기본권 보장마저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노동기본권 개선의 부진은 실질 민주화를 지체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실질 민주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목적의식적 노력과 제도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동기본권의 보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각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몫을 확보할 때 실질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채워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노동기본권 확장을 노사관계 선진화계획, 즉 이른바 로드맵이라는 보따리에 뭉뚱그려 싸놓고 “노사 간 합의 실패”를 이유로 시간만 끌었다. 결국 실질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조건 형성, 즉 절차 민주주의의 확립에서부터 실패한 것이다. 

참여정부가 진정으로 개혁세력을 자처하며 ‘노사관계 선진화’를 성취하려 한다면, 지금이라도 인류 보편의 인권이라 할 노동기본권 보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순서다. 그것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진보개혁세력의 장래에 기여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