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운동이 꾸는 대형사고의 꿈, 부활의 꿈

노동사회

노동·사회운동이 꾸는 대형사고의 꿈, 부활의 꿈

편집국 0 3,029 2013.05.19 07:29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 다른 세계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생뚱맞은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서민들도 이 질문에 필수적으로 대답해야 할 일이 생겼다. 국가가 지금 당신 안방으로 고속도로를 지나가게 해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과 경쟁이 필수과목”인 시대에, “태평양을 관통하는 기업전용 고속도로”, 곧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데 정부가 ‘올인’을 선언한 것이다. 그게 과연 다른 세계를 열어줄까? 협상 책임자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 따르면 확실히 그렇다. 한미 FTA 추진은 “후세의 생존을 위한” 그리고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한” 참여정부의 “자주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국정브리핑』, 3월8일).  

그런데 그 ‘생존’과 ‘도약’을 막기 위해 지난 3월28일, 협상출범이 공식 선언된 지 채 두 달이 못 돼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가 발족했다. 범국본은 농축수산, 영화인, 시청각미디어, 문화예술, 교수학술단체, 보건의료, 노동, 학생, 여성, 교육, 지적재산권, 환경, 금융, 공공서비스 등의 분야를 망라하는 270여개 단체를 포괄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의 연대 틀거리로서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최대 규모다. 범국본의 발존 선언문은 한미 FTA를 “제2의 한일합방”과 “민중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악령”에 비유했다. 어디서 비롯된 인식 차이일까? 그리고 화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 차이의 충돌은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동을 만들어낼까?

노무현 대통령 ‘올인’과 관료들의 ‘준비’

가속 페달을 밟아 대던 사람들은 일단 덜컹거림을 한 번 겪었다. 2004년 11월 한미 통상장관 회담 이래 한국 행정부의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FTA 개시의 대가로 미국 측이 요구한 4대 선결과제를 3개월 만에 해치웠고, FTA 절차규정에 명시된 공청회는 농민들의 항의 속에 20분 만에 끝났다. 부시 행정부의 무역촉진권한(TPA) 시한에 맞춰 1년짜리 빡빡한 시간표도 만들어졌고, 협상과정에서 나온 문서를 3년간 비공개한다는 합의도 했다. 이런 막무가내 진격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폭로와 비판과 우려를 낳았다. 그 결과 최소한 협정 초안을 5월12일 의회에 공개하고 국정홍보처가 대국민 홍보를 위해 42억7천5백만원의 예비비를 신청하는 데까지는 이르렀다.    

그렇지만 자갈밭 좀 지난다고 기어 변속까지 할 사람들이 아니다. 졸속 논란이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보고서 조작 논란, 즉 정부의 ‘준비 없음’에 대한 비판은 한미 FTA를 추진하는 관료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사실 재정경제부와 외교통상부 관료들이 보기에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한미 FTA를 통해 도입되는 것은 ‘미국식 선진 제도’이고, 이를 넉넉히 받아 안을 수 있을 만큼 IMF 이후 우리도 많이 ‘선진화’된 상태다. 즉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협상에 나서는 자신들이 아니라 협상 결과에 따르는 충격을 수용해야 하는 국민들일 뿐이다. 협상 실무책임자와 얘기해 본 어느 시민운동가가 내린 결론에 의하면, 그들의 속내가 그렇다(하승창, 『프레시안』, 5월12일).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범국본 활동가들과도 일부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절차 문제는 한미 FTA의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범국본은 통상절차법 제정과 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해 한미 FTA 절차상 문제를 ‘국민의 알 권리 투쟁’으로 발전시켜나갈 계획을 갖고 있고 실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인터뷰했던 범국본 활동가들은 모두 절차나 속도 때문에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게 아니었다. 그 때문이라면 ‘저지’를 먼저 내걸 이유가 없다. 활동가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한미 FTA 추진의 의도와 결과 자체, 태평양 건너에서 기업전용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발주하는 자들의 속셈과 그 공사로 파괴되리라 예상되는 것들 때문이다. 다른 말로, FTA를 통해서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의 하부구조로 통합될 때 예상되는 ‘공공성 파괴’와 한미 FTA와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강화 등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야기하는 ‘전쟁 위험성’ 때문이다. 

성장동력 발굴과 경제제도 선진화, 그리고 공공성 파괴와 전쟁 위험성 강화, 한미 FTA 체결이 초래할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이토록 서로 다르다. 양 측에서 거짓말이니 오해니 해가며 “한미 FTA 바로알기”를 두고 몇 차례 공방이 있긴 했지만, 당분간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를 것 같지는 않다. 강행 처리와 결사 저지는 결국 물리적으로 충돌할 것이다. 판을 설계하고 먼저 ‘올인’을 건 것은 정부, 특히 대통령의 의지다. 객관적인 조건은 저지하려는 측에게 상당히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건 10년 만에 찾아온 운동의 기회”

“저지를 낙관할 순 없겠지만, 결코 비관할 상황도 아닙니다. 사실 주체적인 조건은 상당히 좋습니다. 우선 1987년 이후 범국민운동본부로 이렇게까지 힘이 집중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노동자와 농민들의 연대가 긴밀해졌고, 금융을 중심으로 사무직 노동자들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또 물론 차이는 있지만 이 사안을 두고 ‘공공성 파괴’를 강조하는 동지들과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강조하는 동지들 사이에 이해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올 11월 이후 말 노사관계 로드맵 분쇄와 한미 FTA 저지 등을 내거는 민주노총 총파업은 1996~97년 총파업 이후 가장 완강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운동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기회입니다.”

김장호 범국본 공동상황실장(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의 이야기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면 사실 대중투쟁의 조직이 말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다. 5월 초 『한겨레』에 실린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농업과 영화시장을 제외한 의료·교육, 법률·회계, 일반 서비스 분야의 개방 찬성률이 모두 60%가 넘는다. 한미 FTA가 급작스럽게 던져진 의제라는 점에서 이를 견고한 지지율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슈 주도를 선점당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미 FTA 속에는 BIT(양자투자협정), USTR(미국 무역대표부), ICSID(국제은행 산하 국제분쟁해결센터) 등 ‘줄기세포 문제’ 때만큼이나 지루한 학습이 필요한 용어들이 난무한다. 범국본이 어쩌면 이미 실질적인 최종협상안이 완성돼 있을지도 모를 11월 이후에나 총력집중 투쟁을 계획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여건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표면에는 눈에 보이는 균열도 있다. 우선 앞서 인용한 여론조사만 봐도 농업개방 반대는 70% 가깝고 영화시장 개방 찬성은 50%를 밑돈다. 즉 피해가 명확하고 개방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온 분야를 두고는 ‘의미 있는 지지율’이 형성되어 있다. 둘째 정부와 자본 내부 입장차이가 생각 외로 크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 등 소위 ‘사회지도급 인사’들이나 사업자단체, 국책연구소 일부 연구자들에게서 ‘반대론’까지 포함하는 ‘신중론’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중, 한일보다 한미 FTA를 먼저 추진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은 공부 못하는 고등학생을 대학으로 옮기면 잘하리라 기대하는 꼴”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5월17일 무역협회 토론회, 연세대 이제민 교수). 셋째, 유가 상승, 달러화 약세 등 경기불안 요소의 요동과 노무현, 부시 모두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는 대통령이라는 점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말, 세상 바꾸는 대형사고 치겠다

이러한 균열에 던져진 씨앗에서 무엇이 자라날까?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10년 만에 맞이한 ‘운동적 기회’는 어떻게 해야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결국 범국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스스로 풍부한 자양분, 즉 설득력 있는 대안논리와 전망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이 내놓는 관료적 모호함에 찌든 장밋빛 전망을 넘어 “무엇을, 누구를 위한 FTA인가”를 실증적으로 명확하게 증명하고, 한미 FTA 따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아닌 호혜적 국제거래 현실화를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교육과 토론과 조직, 연구와 담론투쟁의 확장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가야 할 부분이다.  

범국본은 이를 위해 우선 상반기 △ 6월5일부터 10일까지 제1차 협상 시기 미국 원정투쟁, △ 1차 협상과  2차 협상 사이 한 달여 동안 광화문 열린광장 릴레이농성, △ 7월 초 1천5백에서 2천 쪽에 이르는 『범국민보고서』 발간 △ 7월10일부터 14일까지의 제2차 협상을 전후로 총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대중투쟁 등의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원정투쟁은 미국 노동계 등과 국제연대를 강화하고 국내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걸 목표로 한다. 릴레이농성장은 일상적으로 토론회와 교양학교 및 문화제, 그리고 담벼락영화제와 주먹밥집회, 도시락파티 등이 진행되는,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는 공간이다. 한미 FTA 저지여론 확산의 거점이며 무엇보다 ‘월드컵’이라는 광풍에 휩쓸려버리지 않기 위해 범국본이 뿌리를 박아두는 곳이다. 『범국민보고서』는 2차 협상을 앞두고 숫자 좋아하는 관료와 보수언론을 내용으로도 압도하기 위한 무기다. 범국본은 이미 기자 순회교육과 방송사 뉴스책임자 간담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차 협상을 전후로 7월1일 영화인 총궐기와 한국노총 노동자대회를 시작으로 7월12일 제2차 범국민대회와 민주노총의 4시간 총파업까지 강력한 대중투쟁이 진행된다. 특히 범국민대회는 협상장을 포위해서 집중타격하는 투쟁으로, 1999년 시애틀에서 진행되었던 반세계화투쟁을 모델로 한다. 그러나 7월 대중투쟁은 정점이 아니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기점이자 하반기 활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이다. 범국본은 이런 과정을 거쳐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드디어 11월 이후, “노무현 정부와 한국사회의 비전을 걸고”, “세상을 바꾸는” “대형사고”를 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물론 계획은 계획일 뿐이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리다.

비로소 만난 신자유주의 ‘실체’와 노동·사회운동의 ‘비전’

“한국사회에서 추상으로만 존재하던 신자유주의가 한미 FTA를 통해 실체를 갖게 됐습니다. 소위 대안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투쟁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무대를 갖게 됐죠. 그런 의미에서 한미 FTA 투쟁은 ‘예’와 ‘아니오’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 ‘저지’로 그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운동이 그동안 추상적으로 주장해왔던 한국사회의 비전을 실체화하는 긴 과정의 시작입니다. 때문에 다양하고 세밀한 대응들이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활동가들이 범국본의 계획에만 갇혀 있기보다는 자기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했으면 합니다.”

이원재 범국본 공동상황실장(문화연대 공동사무처장)의 이야기다. 표현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큰 맥락에서 인터뷰했던 대다수의 활동가들이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 노동·사회운동이 꾸고 있는 “대형사고의 꿈”은 위기이자 기회의 징후다. 한미 FTA 투쟁을 중심으로 앞으로 진행될 일정이 한국사회 기득권세력에게 대형사고가 될지, 노동·사회운동에게 대형사고가 될지, 아니면 통치권자 자리를 차지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돌출행동’이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한바탕 분란 후 찻잔 속의 태풍이 될지는 아직 예단하기 이르다. 핵심은 설득력 있고 어느 정도는 자기완결성을 갖춘 사회적 전망을 누가 먼저 제출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을 터다. 

사실 명료한 거시 방향 없이 좌충우돌 해온 것은 한국사회 모든 정치세력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미 FTA 저지투쟁으로 결집된 노동·사회운동은 그 투쟁을 통해 자신의 사회 비전을 구체화하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 동북아공동체와 개성공단 문제, 규제된 세계화의 구체적 범위, 운동들의 선순환 시스템 구축, 거기다 새로운 성장동력의 문제까지, 상호 비판하고 소통하고 논쟁해야 할 것들이 많다. 많은 활동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건 예와 아니오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비전을 건 투쟁”은 이미 시작됐다. 노동·사회운동은 존재 가능한 ‘다른 세계’를 제시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