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혁신의 출발점은 조합 민주주의다

노동사회

운동혁신의 출발점은 조합 민주주의다

편집국 0 3,198 2013.05.19 03:11

 


%EC%9D%B4%EC%9B%90%EB%B3%B4.jpg겨우내 굳었던 동토를 뚫고 새 생명이 움터오기 시작하는 이른 봄, 아직 꽃샘추위와 잔설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훈풍은 어김없이 남녘에서 불어오고 있다. 대중운동, 진보운동에도 신선하고 따스한 봄기운이 불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운동 진영의 이른 봄은 너무나 춥고 을씨년스럽다. 특히 그 중심축이라 할 민주노총의 현실은 안타깝다 못해 좌절감마저 들게 한다. 보수진영의 세가 체계를 갖추어 확산되는 듯하고 공세의 강도가 갈수록 두드러지는 판국이어서 민주노총 사태가 던지는 충격은 너무도 크다. 

 

9시간짜리 지리멸렬 혼란극의 시나리오


지난 2월10일 서울 여성개발원에서 열린 민주노총 제36차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었다. 힘겨루기와 폭언이 난무한 가운데 가장 큰 의제이었던 임원 선출과 조직혁신안은커녕 안건 순서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장장 9시간 동안 대혼란을 거듭하다 막을 내린 것이다. 결정이라고는 비상대책위원회 임원진이 총사퇴하고 2월13일 비상대책위원회를 다시 꾸려 2월21일 대의원대회를 갖는다는 것으로, 안건을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로 넘긴 정도였다. 전체 대의원 920명중 610명이 참석하여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 지나 시작된 대회의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먼저 대혼란의 시작은 위원장-사무총장 후보 기호1번(이정훈-이해관) 지지자들이 IT연맹 산하 KT노조 대의원들이 ‘어용’이라는 이유로 회의장 입장을 막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규약에 따라 선출된 대의원 입장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도 무시한 채 완강하게 힘을 행사한 끝에 작전을 성공시켰다. 두 번째는 현대자동차노조의 파견대의원 참가거부였다. 단위노조에서 선출한 대의원을 상급단체의 착오로 참가시키지 못했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회장은 한바탕 험한 활극이 벌어졌지만 끝내 현대차대의원들은 선관위원장이 제시한 대의원 전원 만장일치 결의를 얻지 못하여 퇴장하고 말았다. 세 번째는 회의진행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다섯 가지의 안건이 제출되었고 이에 대한 찬반토론이 이어졌다. KT노조 징계, 임원직선제 실시, 선거연기, 단위노조대표자 구속발의, 강승규 전 수석부위원장 영구제명 등이 그것들이다. 긴급발의된 이 안건들 대부분은 일부 임원선거 후보의 공약이나 주장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모든 발언은 가감 없이 허용되었고 격한 논전은 한없이 이어졌다. 참관인석에서는 일부 발언자에 대해 박수와 고함으로 응원하는 소란이 계속되었고 질서를 요구하는 집행부에 폭언으로 맞서는 모습도 되풀이되었다. 정회를 거듭하면서 다음날 새벽 0시30분 경, 의장이 제안한 21일 임시대의원대회 개최 등에 대해 동의를 표하면서 대회는 끝났다. 이때 남아있는 대의원수는 473명, 의장 제안 찬성 대의원 수는 306명, 재적 대의원의 3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였다. 거친 언쟁, 폭언,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대의원대회, 험한 대거리로 난장이 된 선거판, 이런 현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권위 붕괴시키고 조합원 냉소 키워온 내부폭력


민주노총은 그 출발부터 권력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대회장은 언제나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단결·투쟁·연대로 새 역사를 쓴다는 자부심이 충만해 있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민주노총 대회는 대의원 사이에 균열이 생겨나고 참관인석의 환호와 욕설이 난무하는 험악한 자리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1998년 2월9일 임시 대의원대회였다. 당시 민주노총은 IMF 외환위기가 엄습한 상황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사회경제 개혁안과 노동기본권 확충 및 정리해고제 도입을 골자로 한 사회적 협약안을 성사시켰다. 임시대회 대의원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참관인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나 함성으로 격앙되었다. 결국 사회적 협약안은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가운데 기립투표로 부결되었고, 민주노총 1기 지도부 총사퇴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져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였다. 


이후 대의원대회에서는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었다. 정파 간 대립과 갈등의 양상들이 갈수록 두드러졌고 논전도 거칠어졌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정파 사이에 세워지는 대립의 날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대회 때는 예외 없이 참관인들이 동원되고 이들은 비위에 안 맞는 대의원의 발언에 격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회의장을 소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일쑤였다. 의장과 진행자의 정중한 당부나 경고의 효과는 그 순간뿐이었고, 참관인들은 언제든 행동으로 옮길 듯한, 위협적인 태세를 멈추지 않았다. 


힘으로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는 작년 세 차례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판을 이루었다. 대회는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해공작으로 무산되고 신나통, 소화기까지 등장하는 폭력 폭언이 난무하였다. 힘의 논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문제가 많은 사회적 교섭을 다수의 횡포로 강행하려 하므로 물리력으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제도 개선투쟁의 장으로서 정책참가의 중요성이나 그 수단으로서의 사회적 교섭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한 채 투쟁과 교섭의 병행을 주창한 민주노총 지도부를 권력과 자본의 야합으로까지 매도했다. 여기에 소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거나 모든 폭력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일부의 궤변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번 2월10일 민주노총 대회의 모습은 파행으로 일관한 이제까지의 행동 궤적의 연장선에 있다. 이제 민주노총에 폭력은 일상화하고 이를 극복할 제어 능력이 소진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팽배해 있다. 대의원대회 하나 민주적으로 치룰 수 없는 내셔널 센터가 무슨 계급적 대표성이나 연대성의 실현을 주창할 수 있으며, 대의원 확정, 대회 의안 확립에서도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역량으로 산하 조직을 어떻게 지도 지원한다는 것인가. 노동운동이 잘되기를 바라는 조합원들과 국민들의 실망과 냉소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만든 민주주의 체계와 질서가 붕괴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자정의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주체인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의욕을 마비시키는 냉소주의가 방치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원인은 대중조직 원칙으로서 ‘조합 민주주의’ 상실 


민주노총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지적될 수 있다. 조직구조상의 모순이 낳은 결과일 수도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환기적 양상이라 하기도 한다. 정파 간 대립 갈등의 소산이라 하기도 하고 민주주의 훈련과 토론문화가 성숙되지 않은데서 비롯된 사태라는 분석도 있다. 또 자본과 권력의 분열책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위기라고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한가한 분석도 있다. 사태를 보는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원인규명은 달라지지만 주장 또는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정파대립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이 얘기되는 듯하다. 곧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합내 민주주의’를 무시하거나 잘못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조합내 민주주의란 노동조합이 갖는 조직상의 특성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 노동조합은 동일한 이념을 기준으로 하는 정치조직이 아니라 대중조직이다. 곧 노동자 대중이 사상, 신념, 종교, 신앙, 성별,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스스로 단결하고 참여함으로써 계급성과 투쟁성을 발휘하는 조직이며 이를 담보하는 원칙이 조합내 민주주의이다. 이 조합내 민주주의는 조합원이 진정한 주인으로 제구실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위한 운영과 활동이 노동조합의 핵심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조합내 민주주의는 단순한 절차상 또는 형식상의 민주주의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집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집중이 이루어져야만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의기구의 결정이나 그에 기반을 둔 지도부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을 때 민주주의 원칙은 실종되고 만다. 물론 잘못된 결의, 방침, 지시는 곧바로 철회되거나 수정 보완할 수 있게 많은 의견이 폭넓게 수용되어야 한다. 토론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며 치열한 토론 끝에 얻어진 결론에 대해서는 흔쾌히 승복하는 원칙이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조합내 민주주의는 대중조직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념 이전에 관철되어야 할 원칙이다. 또한 조합내 민주주의에 의해 검증되거나 지지받지 않은 이념은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아무도 이 원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파행과정을 보면 이 원리는 쉽게 무너지거나 ‘아전인수’격으로 변질되기 일쑤이다. 이념의 차이로 각색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급증이 발동되고 여러 가지 근거로 밑받침되어 힘의 논리로 발전한 것이 지금의 상황인 것이다.  


회의에서 지켜져야 할 조합내 민주주의 원칙과 토론문화의 왜곡은 관성처럼 굳어진 대의원들의 역할에 대한 착각이 가세해 있다. 대의원들은 현장 조합원 또는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이나 제안은 현장 조합원 또는 조직의 공통된 요구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 안건에 대한 사전 토의를 거쳐 그 결과가 대의원대회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의원대회 참가를 위해 현장 토론을 했다는 얘기는 듣기 어렵고 조직적 논의는 이런 저런 현실적 조건 때문에 무시되는 예가 빈번하다. 그러다 보니 대의원대회는 개인의 관점이나 일부 정파의 주장을 설파하는 웅변대회장이 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통일된 결정을 내리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데 온 힘을 쏟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주장을 펴는 데 타협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른 관점과 주장은 경청하거나 숙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타기되고 규탄되어야 할 대상이다. 민주적 토론과 다수결 원리에 따른 결정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부정되며 여의치 않으면 힘이 동원된다. 여기에서 밑으로부터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런 경향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고립될 때 더욱 격화된다.

 

더는 추락할 곳 없는 민주노총, 기초로 돌아가라  


많은 사람들이 상황의 엄중함을 말한다.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정책의 범람,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확대, 경영합리화와 구조조정의 급격한 진전, 고용형태와 노동자의 의식의 변화 등등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은 도전들이다. 최근에는 경총 회장이 “경영자의 파업”을 얘기하며 노골적으로 협박을 해대는 판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도전에 가장 앞장서 싸워야할 민주노총은 조직적 결정의 총화인 대의원대회 하나 제대로 치룰 수 없는 혼란을 거듭 하고 있다. 민족 민중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한 조직적 권위를 스스로 해체시키고 있고 노동자계급의 대표성도 날이 갈수록 의심받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광범한 대중토론, 현장토론을 통해 정확한 자기 진단을 행하고 대중조직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조합내 민주주의의 원칙을 실현함으로써 노동운동 혁신의 출발점을 속히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8호